오마이뉴스 국민휴가위원회가 소개하는 맥주 여행
여행에 맥주를 더해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독일이다. 특히 뮌헨은 맥주 하나로 모든 코스가 완성되는 도시다. 황금빛 라거의 고향, 체코도 빠질 수 없다. 프라하를 둘러본 후, 화려한 카를 교를 바라보며 마시는 필스너 우르켈은 상상만으로 행복하다.
영국, 일본, 미국은 어떤가. 심지어 중국도 여행과 맥주를 연결 짓는 게 어색하지 않다. 그렇다면 대한한국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쉽게 단정할 필요는 없다. 1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시나브로 생겨난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 100개가 넘는다. 작지만 빛나는 브루펍도 제법 많이 만날 수 있다.
부산은 맥주 여행의 마중물 도시다. 해운대와 광안리를 거닐면 고릴라, 갈매기, 와일드 웨이브, 툼 브로이 같은 부산을 대표하는 크래프트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서울에는 가장 많은 브루펍이 숨 쉬고 있다. 정동 독립맥주공장, 공덕 미스터리, 공릉 바네하임, 합정 서울 브루어리, 구의 아쉬트리, 마장 메즈나인, 서대문 브루어리 304 등, 브루펍 투어만으로도 일주일이 모자란다.
여행에 맥주를 더했다면 이제 힐링을 첨가해 보자. 서울과 부산은 어색하다. 너무 바쁘고 복잡하다. 다행히 보석 같은 곳이 존재한다. 느긋하게 맥주 여행을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 푸른 남해를 품고 있는 통영이다.
예전에는 통영 방문이 쉽지 않았다. 철도가 없고 길도 좁았다. 대전통영고속도로가 뚫린 뒤에야 비교적 수월하게 갈 수 있게 됐다. 남해를 끼고 아름답게 이어진 섬들은 통영의 보물이다. 이순신 장군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수 백 개의 섬은 충만한 여행을 약속한다.
충무김밥과 꿀빵, 통영 다찌 같은 음식도 빼놓을 수 없다. 다찌는 술을 시키면 따라 나오는 안주에서 유래한 문화다. 주인장 마음대로 차려지는 갖가지 수산물을 한상 가득 맛볼 수 있다.
먹거리와 볼거리로 가득한 통영이 요즘 맥주로 물들고 있다. 겨우 인구 10만 명에 불과하고 철도도 없는 작은 도시에 맥주라니. 이유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박경리, 윤이상, 김춘수 같은 예술가의 혼이 살아있는 통영에 자유롭고 발랄한 크래프트 맥주가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먼저 숙소 걱정은 묻어두자. 시내에 무려 맥주 호스텔이 있다. 남망산 앞에 있는 미륵미륵은 1층에 펍을 운영하고 있는 특이한 호스텔이다. 통영 산 맥주를 포함해 다양한 국내 크래프트 맥주를 상시 판매한다. 맥주 관련 이벤트도 즐길 수 있다. 이번 여행에 이보다 더 찰떡궁합인 숙소가 있을까.
미륵미륵 호스텔에 짐을 풀고 나면 1층에 있는 맥주가 유혹할 것이다. 이겨내자. 여기는 오늘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남겨두자. 우리의 첫 목적지는 호스텔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통영맥주다. 찾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흰색 타일에 빨간 굴뚝이 있는 건물 주위에서 당황할까 봐 걱정될 뿐이다. 양조장이 있는 자리에 만약 ‘동호탕‘이라는 이름이 보인다면 축하한다. 맥주를 마실 시간이다.
통영맥주는 원래 동호탕이란 목욕탕이었다.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면 입구로 가보자. 정면 창을 통해 반짝이는 양조장비들을 볼 수 있다. 안에는 어릴 때 갔었던 목욕탕 흔적이 남아있다. 냉탕과 샤워기도 그대로다. 테이블과 의자가 아니었다면 탈의실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창이 드문 목욕탕 구조라 옆 사람과 말하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것 같다. 행여 여기서 옷을 입고 맥주를 마셔도 될까 걱정된다면 빨리 메뉴판을 보자. 이태리타월이 아닌 맥주를 주문할 수 있을 테니.
맥주는 통영을 상징하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순신 스타우트와 열 두척 유자에일은 한반도 대첩의 주 무대였던 통영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이다. 원래 통영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에서 유래했다. 동피랑 페일에일은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을, 달아 바이젠은 달아항에서 이름을 따왔다. 다찌 둔켈과 바다에 반짝임을 의미하는 윤슬 골든에일도 모두 통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단 첫 방문지이니 과음하지 않기로 하자.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동피랑 페일에일이 좋을 것 같다. 초록색 이태리타월이 나왔다고 혹여 몸을 닦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 것. 맥주 받침이다. 서비스로 나오는 팝콘은 눅눅하지 않으니 맛있게 먹자.
동피랑은 가벼운 시트러스 터치에 낮은 쓴맛이 주는 균형감이 좋았다. 나머지 맥주가 탐난다면 구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역 맥주는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기념품이다. 게다가 6캔을 사면 할인도 해주고 전용 파우치에 넣어주니 안 사면 손해다.
통영맥주에서 한숨을 돌렸다면 이제 굶주린 배를 채울 시간이다. 바다를 보며 힐링도 하고 맥주를 곁들이며 맛있는 식사까지 할 수 있는 장소가 없을까? 있다. 라인도이치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통영의 맥주 터주대감이다.
미륵도에 있는 라인도이치는 통영맥주에서 택시로 10분이 채 안 걸린다. 통영대교를 건너 미우지 해안로를 따라가면 바다를 바라보는 빨간 벽돌 건물이 나타난다. 거대한 아치형 창문과 라인도이치 간판에서 벌써 독일 냄새가 풀풀 난다.
라인도이치 역사는 2000년 초반 하우스 맥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립자 손명수 씨는 2002년 독일 장비와 기술을 도입해 데바수스라는 브루펍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통영 바다가 이곳으로 이끌었지만 사업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한다.
하우스 맥주 열풍이 식으며 사라졌던 양조장을 되살린 사람은 그의 아들 손중성 대표다. 2019년 손 대표는 묵혀놨던 장비를 다시 설치하고 예전의 레시피를 되살려 양조장을 재개했다. 라인도이치라는 이름은 독일 스타일 맥주를 추구했던 데바수스에 대한 헌사였다.
구릿빛 당화조와 끓임조에서 독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요즘 한국에서 찾기 힘든 장비다. 그래서인지 라인도이치는 맥주 순수령에 기반 한 맥주를 추구한다. 바이젠, 헬레스, 둔켈, 필스너 같은 독일 스타일을 바탕으로 골든 에일, 아이피에이(IPA)처럼 미국 스타일 맥주도 선보이고 있다.
식사 메뉴는 피자부터 파스타, 리조토, 스테이크, 치킨, 샐러드, 프라이즈 등 다양하다. 수제 도우가 궁금해서 피자를 주문했다. 맥주는 여러 스타일을 조금씩 즐길 수 있는 샘플러를 선택했다.
모든 맥주가 좋았지만 바이젠복이 가장 인상 깊었다. 바이젠복은 7~8% 알코올을 가진 독일 밀 맥주를 의미한다. 라인도이치 바이젠복은 풍성한 바나나 향과 섬세한 정향 그리고 뭉근히 올라오는 단맛이 피자와 잘 어울렸다. 헬레스와 필스너는 기본에 충실했고 골든 에일은 깔끔해 마시기 편했다.
여유롭게 맥주를 마신 후 양조장을 바라봤다. 구릿빛 당화조가 통영의 진짜 맥주가 누구지 묻는 듯했다. 20년 전 이곳에 뿌리내린 맥주를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는 헌신과 진정성에 답이 있었다.
통영 맥주 여행의 마침표, 미륵미륵 후끈한 낫맥
라인도이치를 나오니 비로소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바다 끝 섬 사이로 낙조가 지고 있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다. 하지만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미륵미륵을 숙소로 잡은 이유를 잊지 말자. 배가 부르니 통영대교까지 걸어본다. 다리에서 쏟아지는 화려한 빛이 바다를 만나 윤슬이 가득했다.
미륵미륵 맥주 호스텔에 도착했다면 펍으로 들어가자. 이곳에 통영 맥주 여행의 마침표를 찍어줄 디저트가 남아있다. 이름은 ‘후끈한 낫맥‘, 무알콜 홉소다에 라거를 섞은 맥주 칵테일이다. 3% 알코올과 향긋한 홉 향, 깔끔한 청량감은 마무리 맥주로 더할 나위 없다.
힐링을 위한 여행에 과음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맥주를 마셨으니 마지막은 가볍게 정리하자. 진정한 맥주 여행은 취함이 아닌 취향에 있다. 오늘은 맥주로 통영을 만났으니 내일은 통영의 다른 매력을 느껴보자. 한국의 나폴리가 아닌 푸른빛 통영의 매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