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꽃으로 만드는 마법
십 수년 전만 해도 맥주는 단순했다. 황금색, 약간의 쓴맛, 단순한 향, 입안을 쏘는 듯한 탄산감과 청량감. 우리가 생각하는 맥주의 모습은 이게 거의 다였다. 크라운, 하이트, 테라, 오비라거, 오비필스너, 이름은 계속 바뀌었지만 맛과 향 그리고 이미지는 비슷했다. 오히려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맥주로 생각되지 않았다.
지금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요즘은 맥주의 모습이 다채롭다 못해 복잡하게 느껴진다. 바나나, 자몽, 꽃, 다크 초콜릿, 비스킷과 같은 다양한 향은 물론이고 입안을 얼얼하게 하는 쓴맛을 가진 맥주도 있다. 식초와 같은 신맛이 나는 맥주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분명한 건 맥주를 흑맥주와 그렇지 않은 맥주로 구분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최근 한술 더 떠 대형마트나 펍에서 맥주를 고르다 보면 IPA, 페일에일, 바이스비어, 스타우트, 둔켈, 세종 등 이상한 단어를 볼 수 있다. 도대체 암호와 같은 이 것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맥주스타일(Beer style), 위에서 언급한 암호의 정식 이름이다. 맥주스타일을 우리말로 더 풀어내면 어떻게 될까? 바로 맥주양식이다. 많은 맥주 소비자들이 맥주스타일을 맥주종류 또는 맥주형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스타일을 단순히 종류로 해석하면 오류가 생길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의미를 놓칠 수 있다. 맥주종류와 맥주양식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종류는 단순히 기술적인 구분을 의미하지만 양식이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정해진 방식 또는 시대나 부류에 따라 독특하게 지니는 문학 또는 예술형식을 말한다.
건축의 고딕, 미술의 고전주의 같은 양식, 즉 스타일은 과거로부터 남겨진 것들을 후대인들이 조직적인 관계와 통일된 표현방식을 통해 분류한 것이다. 맥주스타일 또한 같은 맥락을 갖는다. 하지만 건축이나 미술과 달리 맥주를 ‘스타일’의 관점으로 바라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불과하다.
1970년대 중반 ‘비어헌터’로 불렸던 고(故) ‘마이클 잭슨’(맞다, 팝스타와 동명이인이다.)은 세계를 여행하며 경험한 맥주를 소개하는 책을 발간했다. ‘The World Guide to Beer’, ‘Eyewitness Companions Beer’, ‘Ultimate Beer’ 등과 같은 저서에서 그는 맥주들을 나름의 기준에 따라 분류하고 구조화했다. 그리고 이 시도가 맥주가 스타일이 될 수 있다는 단초를 제공했다.
오랜 기간 그 지역에 존재했던 맥주들은 자신들만의 재료, 문화 그리고 양조방식을 바탕으로 고유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마이클 잭슨은 독일, 영국, 벨기에 등에서 경험한 맥주들을 지역적, 문화적 배경과 함께 알코올 도수, 색깔, 향미와 같은 기술적인 지표로 범주화했다.
그는 맥주가 인위적인 경계를 통해 분류되는 술이 아닌, 수 백 년 동안 자연스레 형성된 문화와 삶의 양식임을 이해했던 것이다. 당시 버드와이져와 같은 대량 생산 맥주만을 마시던 사람들에게 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 마이크로 브루잉 맥주와 크래프트 맥주의 등장으로 시장이 세분화되며 맥주스타일 또한 발전되었고 맥주산업에서 필수적인 체계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맥주를 기술적인 기준으로 분류하면 알코올 도수, 색깔 등으로 나눌 수 있지만 스타일로 분류하면 조금 다른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고딕양식이 정확한 수치의 높이와 넓이를 통해 구분되지 않듯이, 스타우트라는 스타일도 알코올 도수와 색깔과 같은 기술적인 수치로만 구분되지 않는다. 단지 그 스타일이 허용하는 범위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 위해선 우선 맥주가 살아있어야 한다. 전설 속의 맥주는 어떤 맥주인지 알 수가 없기에 스타일로 구분할 수 없다. 맥주스타일의 첫걸음은 현재 지역의 정서와 문화를 대표하고 시음할 수 있는 맥주에서 시작된다.
독일 바이에른의 바이스비어, 쾰른의 쾰쉬, 라이프치히의 고제, 체코 필젠의 필스너, 영국 런던의 페일에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스타우트, 벨기에 플랜더스의 레드에일 등 맥주스타일의 가장 큰 뿌리는 지금껏 유지되고 지역을 상징하고 있는 전통 맥주들이다.
잔뿌리도 있다. 다행히도 큰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잔뿌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바이스비어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바이젠복, 스타우트에 유당을 넣은 밀크스타우트, 람빅에 과일이 들어간 푸룻람빅과 같은 맥주는 서브 스타일로 분류된다. 메인 스타일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공유하지만 자신만의 역사와 특징을 가지고 있는 맥주들이다.
최근 들어 지금껏 맥주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흥미롭고 역동적인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더 세분화되고 다채로운 맥주스타일이 급격하게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1980년대 이후 성장하고 있는 크래프트 맥주가 있다.
전통적인 맥주스타일에 대한 재해석으로 시작된 크래프트 맥주는 끊임없는 도전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해 왔다. 더구나 크래프트 맥주의 대중화는 이러한 맥주들을 스타일로 빠르게 정착시키고 있다. 가장 비근한 예가 아메리칸 페일에일이다. 1980년 시에라네바다가 만든 페일에일은 영국 페일에일을 미국 홉으로 버무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맥주는 이후 서브 스타일을 뛰어넘어 아메리칸 페일에일이라는 새로운 맥주스타일이 되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종류의 맥주들이 탄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맥주들이 모두 스타일로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양식은 당대가 아닌 후대에 평가되고 분류되기 때문이다. 어떤 맥주가 스타일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거나 확고한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최근 가장 활발하게 맥주스타일을 제시하고 논의하는 채널은 맥주대회나 협회와 같은 곳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목적에 맞게 맥주스타일을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이러한 맥주스타일이 조금씩 세부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특정 채널의 맥주스타일을 참고는 하되 맹신을 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맥주스타일은 수치가 아닌 문화로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맥주를 만드는 브루어뿐만 아니라 구매하는 소비자 모두에서 맥주스타일은 등대와 같다. 브루어에게 맥주스타일은 선대가 남긴 마일스톤(milestone)이다.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맥주의 시작점인 것이다. 브루어는 맥주스타일이라는 검증된 기준과 지식을 통해 도전과 창작의 범위를 가늠할 수 있다.
소비자에게도 맥주스타일은 구매 리스크를 줄여주는 중요한 정보다. 소비자는 맥주스타일을 통해 알코올 도수, 색깔, 쓴맛의 정도, 향미와 같은 정보를 사전에 얻을 수 있다. 이는 미지의 맥주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되어 구매 결정의 무게를 낮춰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맥주스타일은 브루어와 소비자를 연결시켜 주는 보이지 않은 교감과 같다.
요즈음은 대형마트뿐만 아니라 편의점에서도 다양한 맥주들을 만날 수 있다. 빼곡히 들어서있는 맥주는 때로 우리에게 혼란을 건네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산업과 문화가 성장하고 취향이 세분화되고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이다. 우리의 삶의 양식이 다채로워진다는 증거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중)
맥주스타일을 알기 위해서는 약간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조금만 건네면, 그 맥주는 꽃이 된다. 맥주스타일을 알아 가는 과정은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탐험과 같다. 탐험의 첫 발을 내딛는 그때, 맥주는 우리에게 단순한 술이 아닌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