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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Aug 13. 2020

상암동에 맥주 아고라를 짓다

맥주 아고라를 꿈꾸다

그 집 마당에는 수국이 있었다. 대문 옆에는 재래 화장실이 있었고 삐걱거리는 마루 한쪽에 다락으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마당 한 구석에 있는 보라색 수국이 그나마 40년 된 구옥의 낡음을 가려주고 있었다. 이 집을 어떻게든 살리려 했다. 집의 낡음도 한 켠의 역사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장사를 하기에는 공간도 허가도 여의치 않았다. 그럼에도 이 보라색 수국만은 살리고 싶었다. 수국만이 구옥의 흔적을 기억할 수 있을 듯했다.


2016년 봄, 상암동 작은 골목에 맥줏집을 지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불장난이었다. 구옥을 매입해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 이건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었다. 다 맥주 때문이다.


독일과 영국을 갈 때마다 멋진 펍에 들르곤 했다. 가끔씩 이런 펍을 운영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렇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동생이 요리와 운영을, 내가 맥주와 홀을 책임지기로 했다. 동생은 요리학교 출신의 셰프이자 장사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자영업의 '자'도 모르는 나는 동생이 차리는 밥상에 맥주 지식만 살짝 얹기만 하면 됐다.


서울 상암동에 오픈한 플라츠는 그렇게 태어났다. 플라츠, 독일어로 광장이라는 뜻이다. 가게 이름이 필요한 순간, 머리에서 자연스럽게 ‘플라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유럽의 도시를 다니며 인상 깊었던 것이 그들의 광장이었다. 어느 도시든 광장이 있었고, 그곳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플라츠가 맥주를 매개로 한 소통과 관계의 장이길 바랬고 맥주 아고라이기를 꿈꿨다.   


맥주 전문가를 자처했던 나는 맥주 냉장고에 구멍을 뚫고 맥주 타워와 탭을 설치하며 인테리어를 대부분 직접 시공했다. 조금 어설펐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가게는 완벽함이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사람 냄새나는 곳이면 충분했다. 수국이 만발했던 40년 넘은 구옥은 좁은 골목 가로등 아래, 유럽풍의 외관과 예쁜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으로 변했다.

상암동 플라츠 (출처 : 윤한샘)

유럽 전통 맥주와 국내 크래프트(수제) 맥주들, 그리고 독일 스타일의 요리가 메뉴판을 채웠다. 나름 전문적이고 차별화된 컨셉이라고 자신했지만 사실 걱정이 한아름이었다. 우리가 생각한 컨셉이 상암동에서 통할까? 한때 상암동도 예쁜 카페와 파스타 집들이 있던 동네였다. 하지만 점점 직장인들을 위한 삼겹살과 실내포차들이 즐비해지고 있는 터였다. 플라츠는 여러 면에서 연남동 같은 동네에 더 어울리긴 했다.


오픈은 조용했다. 플라츠 대표, 가게 주인, 자영업인, 소상공인, 뭐라 불러도 상관없을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아직은 여러모로 빈틈이 많은 가게였기에 더디더라도 그 틈을 메우면서 나아가려 했다. 장사 초기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매일 불특정 했다. 아마 이태리 레스토랑 같은 외관, 처음 생긴 가게에 대한 호기심들이 이들을 이끌었으리라. 그 와중에 손님들의 욕구도 모두 달랐다.


왜 소주를 팔지 않느냐,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타박부터 금연인 테라스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까지,  이런 일들은 종종 나의 명치와 얼굴에 펀치처럼 꽂히곤 했다.  아팠지만 견뎌야 했다. 자영업을 하는 누구나 겪는 일 아니던가.


장사 맷집, 이게 필요했다. 여러 대 두들겨 맞아야 결정적 펀치도 견뎌낼 수 있는 법이다. 더디게 생기던 맷집은 결국 나를 내려놓았을 때 단단해졌다. 하지만 그동안의 커리어를 모두 잊고 자영업자의 페르소나를 추가하는 것은 쉽지 만은 않은 일이었다. 나는 허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허약함에서 벗어나려면 탈피를 해야 했다.  더 단단한 껍질을 두르는 것, 누가 때려도 쉽게 상처 받지 않는 것, 돌아보면 이건 플라츠가 나에게 준 선물과 같았다.

상암동 플라츠 (출처 : 윤한샘)

더 단단한 껍질이 만들어지는 동안, 펀치를 날리는 손님들은 조금씩 줄어들고 플라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우리 편이 생긴 것이다. 고마운 마음이 가득한 한편 궁금한 마음도 생겼다. 메뉴와 인테리어가 매달 바뀌는 것도, 특별히 이벤트가 있는 것도, 주인이 잘생긴 것도 아닌데 왜 자주 오시는 걸까?


어느 정도 지났을까, 불현듯 공감과 관계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감과 관계라... 플라츠의 맥주와 음식 그리고 분위기는 다소 생소했을지언정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일탈감을 선사했다. 나 또한 이 곳에서 손님들이 정서적 자유를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플라츠라는 시공간에서 일상의 피곤함을 잊고 순간을 즐기기를 바랐다.


의도치 않았지만 이 곳에는 자유와 일탈이 있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플라츠에서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플라츠라는 공간의 문화를 창조하고 함께 공유하는 정서적 공생관계였던 것이다. 우리의 아군들은 상암동 어떤 곳보다 플라츠에서 자유로웠다. 플라츠가 추구하는 철학과 문화를 좋아하고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암동 플라츠 (출처 : 윤한샘)

장사를 시작하기 전, 가게의 정체성은 주인이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장사를 하며 한 가게의 정체성과 문화는 이를 지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손님들이 우리의 철학을 지지하는 그때, 가게의 정체성이 형성됐다. 독일이나 영국의 식당들이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플라츠에 이런 정체성이 쌓이는데 6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나에게 단골은 단순히 자주 오는 손님이 아니었다. 이 분들은 가게의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대우가 다를 수밖에. 단골들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선호하는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맥주가 정해져 있었다. 그분들의 성향이 아닌, 문화를 공유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명확한 선도 존재했다. 나와 손님 모두 그 선을 넘으면 플라츠의 문화가 부서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선을 넘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난 단골들이 고마웠다. 이런 분들과 함께 있다는 느낌은 특별한 것이었다.


여전히 몇몇 단골손님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S사의 이 본부장님이 그런 분이다. 그가 처음 플라츠에 호감을 가진 건, 슈나이더 바이 세라는 맥주 때문이었다. 회사 이름과 맥주 이름이 같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정작 그분이 제일 좋아하던 맥주는 점촌 IPA였다. 그는 일주일에도 2~3번은 들러 이 맥주를 마시곤 했다. 따로 주문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눈빛만으로 맥주 주문은 이루어졌다. 이 본부장님이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는 선을 넘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플라츠의 문화를 존중할 줄 아는 멋진 사람이었다. 가끔 너무 많은 점촌 IPA를 마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때가 되면 엄지척을 날리며 사라지곤 했다.


또 다른 분은 J방송사의 S 사장님이셨다. 2층 창가 자리는 항상 그분 자리였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시곤 했지만, 가펠 쾰쉬라는 독일 맥주 딱 한 잔만을 드시곤 했다. 다양한 세대와 격의 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참 좋았다. 그가 있는 자리는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맥주라는 술이 소통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분을 통해 깨달았다. 자주 오셨지만 난 정확히 선을 지켰다. 어쩌면 S 사장님은 선을 지키는 플라츠의 문화를 좋아하셨을지도 모른다.  


길고양이 나탈리도 빼놓을 수 없지. 검은색과 흰색이 아주 매력적인 턱시도 고양이였다. 플라츠가 있던 골목은 길고양이들의 은신처이자 전쟁터였다. 볕이 잘 드는 플라츠의 테라스는 이 녀석의 쉼터였다. 아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고양이였지만 손을 전혀 타지 않아 앙칼졌다. 암컷임을 알자마자 우리는 나탈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 녀석은 우리 식구가 되었다. 며칠 안 보이면 걱정됐다. 그러나 별일 없이 나타나면 사료를 챙기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만약 이 녀석을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 가게 이름은 플라츠가 아닌 나탈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장사는 대박은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았다. 처음 도전하는 자영업은 절대 만만치 않았지만 난 꾸역꾸역 하루를 보내며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있었다. 화단에 심은 무화과도 잘 여물고 있었고, 방송국에서 촬영을 오기도 했다. 유명한 PD와 연예인들도 종종 매출에 기여했다. 플라츠는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좋은 맥주와 음식을 먹으며 색다른 골목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운 나탈리

2020년 상암동에 플라츠는 없다. 2018년을 앞두고 플라츠를 매각했다. 나도 동생도 급작스러운 결정이었다. 동생보다는 내 문제가 컸다. 역시 맥주 때문이었다. 자영업도 나쁘지 않았지만 맥주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사실 가게를 운영하는 동안 맥주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개의 테이스팅 노트를 쓰고, 새벽에는 해외 맥주 책을 번역하며 맥주 컨텐츠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키우고 있었다. 컨텐츠로서 맥주가 품고 있는 잠재력을 발견한 후, 이를 다른 것과 융합하여 차별화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해졌다.


한국맥주문화협회에 대한 구상도 이즈음에 시작되었다. 맥주를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던 사람들이 모여 재미있는 일을 해보자는 논의가 시작되었고, 내가 주도가 되어 실체화시켰다. 협회를 통해 맥주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대중문화로 성장시킬 수 있는 사업을 진행할 계획도 세웠다.


형인 나보다 더 진중하고 생각이 깊은 동생이 이런 마음을 이미 알아챘다. 그리고 결국 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주었다. 플라츠를 하는 동안 내가 더 기대고 의지했는데, 마지막도 그랬다.


이기적인 나의 결정이 안정적인 흐름을 타던 플라츠를 멈춰 세웠다. 너무 급작스러운 결정이라 주위 사람들이나 단골손님들에게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 플라츠의 문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여전히 쓰리다.


가로등이 있는 작은 골목, 함께 웃고 안부를 묻던 단골들, 동고동락을 했던 동생과 스텝들, 멋진 맥주와 요리 그리고 나탈리까지, 모든 것이 플라츠를 만들었다. 문화란 총체적인 경험과 공감이 만드는 구체적인 정서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경험하고 깨달았다.


나탈리는 잘 있을까? 매일 테라스에서 편하게 늘어져 있던 나탈리가 보고 싶다. 마감 후 모두가 떠난 새벽에도 창밖에서 안부를 묻듯, 마치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나탈리. 상암동 작은 골목 지붕 어딘가에서 따뜻한 볕과 함께 평안하게 지내길. 나의 추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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