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라디오는 인류의 영원한 친구가 아닐까?
라디오에서 멀어진 게 언제부터일까? 8, 9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매일 밤 자신을 위로하던 목소리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로새기고 있는 목소리는 정은임이다. 그녀가 매일 새벽 들려주던 영화와 음악 이야기는 사춘기, 잠들지 않는 나의 밤을 달랬다. 혼자 있지만 외롭지 않았던 시간, 정은임의 라디오는 고독을 채워주던 정겨운 친구였다.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이렇게 라디오는 우리에게 아련함이 된다.
2019년 6월, 라디오 디제이가 됐다. 뿐만 아니라 피디와 작가도 해야 했고 엔지니어는 덤이었다. 방송국은 홍대 근처 4층 빌딩에 있는 마포FM. 프로그램 이름은 ‘알쓸맥잡’, ‘알아두면 쓸데 있는 맥주 잡학상식’이었다. 변명하고 싶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신박하지 않은 ‘알쓸’ 시리즈를 누구보다 먼저 맥주 방송에 쓰고 싶었다.
마포FM은 마포 지역 방송국으로 ‘무려’ 정식 주파수를 가지고 있는 라디오다. MBC 에프엠 포유와 규모만 다를 뿐, 방송통신위원회의 심의 규정을 따르는 공중파라는 의미다. 주파수는 100.7MHz, 낮은 출력으로 인해 마포구와 서대문구에서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방송이지만 공중파에서 맥주 이야기를 한다는 건 파격적인 일이었다.
솔직히 맥주 라디오라는 발칙한 상상을 할 때만 해도 실제로 실현될지 몰랐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방송 상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안서를 보낸 건, 지역 방송국에서만 들을 수 있는 다채로운 목소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역 방송국이라면 지역 소식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대형 라디오가 감히 다룰 수 없는 깊고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 축구 클럽 팬들의 거친 아우성,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 들려주는 꿈과 미래, 황혼의 어르신들이 전달하는 유쾌한 세상 이야기 그리고 성소수자들의 주체적인 삶까지, 정제되지 않고 거칠지만 꾸밈없고 솔직한 이야기가 마포FM의 매력이다.
마포FM을 만드는 사람들은 디제이, 피디, 작가, 엔지니어까지 1인 다역을 해야 하는 방송 풋내기지만, 누구보다 주체적이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는 삶의 주인공들이다. 시민들이 만드는 방송, 마포FM은 단순한 지역 라디오가 아닌, 우리 이웃의 공동체 라디오인 것이다.
비록 작은 라디오지만 주파수를 통해 맥주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면 정말 멋질 거 같았다. 문제는 방송국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였다. 맥주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문화고 따라서 라디오에서 충분히 다뤄질 수 있다고 주저리주저리 기술한 제안서는 의외로 쉽게 통과되었다. 마포FM 편성 피디 J는 흥미로운 주제라며 기대 이상의 관심을 보였다. 특히 장수 방송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 샀다. 모든 맥주가 자신 만의 스토리를 갖는다는 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수 천 편의 분량이 나올 수 있을 테니까.
제안서에는 맥주 초대석, 맥주 수다, 맥주와 음악과 같은 계획이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편성 피디와의 미팅에서 맥주가 방송의 다양성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침이 마르도록 설파했다. 가끔씩 냉장고에 맥주가 채워질 수도 있다는 작은 선물과 함께.
본격적인 방송은 4개월 후인 6월에 시작하기로 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녹음, 다음 주 화요일 새벽 12시 본방, 수요일 새벽 12시에 재방되는 57분짜리 방송이었다. 명색이 공중파 라디오라 방송 심의 규정에 따라 맥주 방송은 반드시 밤 10시 이후에만 송출이 가능했다.
시민 방송의 의의, 방송 수칙 그리고 장비 엔지니어링과 같은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며 ‘알쓸맥잡’의 뼈대를 구상했다. 마포FM은 기존 라디오 포맷을 따르기보다, 주체적이고 개성적이며 동시에 공동체 이익에 부합하는 방송을 지향했다. 알쓸맥잡 또한 맥주를 매개로 사람과 사회를 이야기하는 포맷으로 기획했다. 맥주를 통해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이야기하고 지식도 나눌 수 있기를 바랬다. 올바른 음주 문화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했다. 완벽한 기획은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틀을 세우고 2019년 6월 13일 드디어 대망의 첫 방송을 시작했다.
예상대로 첫 방송은 실수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몇 번의 교육을 받고 메모도 했지만 처음 다뤄보는 방송국 장비는 나를 멘붕에 빠트렸다. 마이크 스위치와 음악 스위치는 연신 헷갈렸고 볼륨 조절 실패로 시작만 몇 번을 다시 했다. 분량도 조절 못해 준비한 음악은 반도 못 틀었고 헤드폰으로 들리는 발성과 톤 그리고 호흡은 엉망이었다. 버벅거리고 말이 꼬이는 건 예사 일이었다. 엔지니어, 피디, 디제이가 불규칙적으로 빙의되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디제이는 주인공이다. 특히 얼굴이 보이지 않는 라디오에서는 목소리만 가지고 정해진 시간을 이끌어 가야 하는, 독보적인 주인공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이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전문 피디나 작가와 같은 스텝들의 도움이 있다면 그 부분을 메울 수 있다. 혹은 원래 달변가 거나 누가 뭐래도 마이웨이를 가는 자존감 높은 사람이라면 부족한 자원에도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지 않은 나에게 디제이는 벽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취향이나 속마음을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주로 상대의 말을 듣는 타입이었다.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그런 경험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말을 하면 할수록 혼자 꼬이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사회생활에서 나를 함부로 드러내는 것이 약점이 될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나이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발표나 발언을 할 때는 반드시 기승전결의 틀 속에서 움직였다.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달변가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항상 짜여진 틀이 필요했다. 나는 유비보다 제갈량 같은 과였다.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조력하는 편이 좋았다. 그런 이유로 주위에 친구는 많았으나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내가 라디오 디제이를 하다니…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걸 알고도 라디오 진행을 제안한 이유는 이 방송이 맥주 문화에 대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방송이 아닌 녹음 방송이었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한 대본을 읽는다면 문제가 없을 듯했다. 게스트도 미리 염두에 둔 부분이었다. 디제이가 아닌 피디 역할에 충실하면 개인 분량은 줄이면서 내용은 풍부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첫 방송부터 이 생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On Air
‘On-Air’ 불이 들어오자 나는 라디오 알쓸맥잡 소개와 코너, 향후 진행 방향 등 미리 써 온 대본을 읽었다. 기획 의도, 방향 그리고 세부적인 구성까지 앞으로의 포부를 부지런히 밝혔다. 그러나 방송이 중간 정도에 이르자 어딘가 공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용이야 미리 검토했으니 문제가 없었다. 그냥 이상했다. 나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건가?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걸까? 아니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내가 누군 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지금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 만무했다. 청취자들이 단순히 책이나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이 방송을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맥주 지식은 라디오가 아니라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난 녹음 정지 버튼을 눌렀다.
라디오는 항상 보이지 않는 타자가 존재했다. 스튜디오의 시공간은 누군지 모르는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채워진다. 단순한 뉴스 전달 프로그램도 청취자와의 소통을 전제하는데, 맥주 문화를 알리는 방송은 당연히 더 세심한 고민이 필요하다. 설사 청취율이 낮고 피드백이 드물더라도 소통은 라디오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가치였다. 무플보다 악플이 나은 이유이다.
알쓸맥잡은 이런 배려가 부족했다. 첫 방송을 하면서 이걸 깨닫다니… 혼자 앉아 있는 스튜디오는 적막했고 난 막막했다. 일단 청취자에게 내가 누군지 밝히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첫 수순은 먼저 나 자신을 마주 하는 것이었다.
도망칠 곳이 더 이상 없게 되자 대본에 없는 나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이며 왜 맥주와 사랑에 빠졌고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조심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담담하게 전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자연스럽지 않았다. 목소리에는 어색함과 당황함이 묻어났다.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얼굴은 벌게지고 땀도 삐질 삐질 나왔다.
라디오에서 껍질 안에 숨는 것은 불가능했다. 맥주 라디오라면 맥주에 대한 나의 관점과 생각을 전하고 소통해야 한다. 공격받는 것이 두려워 객관이라는 명분 속에 내 의견을 숨기거나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 방송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전파 낭비일 뿐.
게스트와 함께 하는 코너도 이런 맥락 속에 다시 기획했다. 비어 소믈리에와 진행하는 맥락잡기는 맥주 스타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코너였다. 하지만 맥주뿐만 아니라 어울리는 음악도 함께 소개하며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협회 이사님들과 함께 하는 알쓸맥잡은 말 그대로 ‘알쓸신잡’의 맥주 버전이었다. 바네하임 K 대표와 L원장님을 초대해 맥주에 관한 역사, 음악, 미술, 여행, 산업을 대중없이 이야기하는 코너다. 진정한 맥주 수다를 들을 수 있는 환자들만의 시간으로 나 또한 진행자에서 벗어나 부담 없이 참전했다. 반면 맥인싸는 맥주계 인사이더를 초대하는 코너다. 양조장 대표, 펍 운영자, 비어 소믈리에 등 맥주 관련 업에 종사하는 분들과 함께 소소한 맥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많은 분들의 인생과 가치관을 배울 수 있어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코너는 공감이 중요했고 이는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나를 먼저 드러내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물론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사십 평생 하지 않았던 일을 어찌 몇 달 만에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다행스럽게 맥주가 있었다. 게스트와 맥주로 소통하며 나는 조금씩 껍질을 깨고 있었다.
여전히 아마추어 티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6개월 정도 지나자 알쓸맥잡은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재미와 감동까지는 모르겠지만 맥주로 나름 뭔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20년 3월, 코로나는 이 작은 방송에도 적잖은 떨림을 만들었다.
이 몹쓸 병이 심각해지자 게스트 초대는 언감생심이었다. 방송을 온전히 혼자 이끌어야 하는, 의도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어쨌든 방송은 계속되어야 했다. 나는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을 발로 꽉꽉 밟아 뒷 주머니에 쑤셔 넣고 모른 채 하기로 했다. 기대가 낮으면 맘도 편하다고 했던가. 꾸미지 않고 맥주로 소통하는 솔직한 방송을 하자고 마음먹으니 오히려 스튜디오가 아늑해 보였다.
나의 관점으로 맥주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겁내지 않기로 했다. 지식 한 스푼, 주관 한 스푼, 재미 한 스푼을 넣는 방송이면 될 거 같았다. 맥주 기사를 소개하고 평론을 통해 세상을 이야기해보자. 맥주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해석과 분석도 하고, 전망도 함께면 좋겠지. 대한민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곳은 알쓸맥잡 밖에 없을 테니 그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내가 마신 맥주도 담담히 소개하기로 했다. 나와 맥주 이야기에 자세한 대본은 필요 없었다.
예전 같으면 하기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누군가에게 내가 하는 이야기가 힘이 될 수 있고 즐거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맘이 한결 편해졌다. 맥주와 라디오, 이 둘은 인류가 발명한 가장 훌륭한 매개체이자 친구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마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함께 하지 않을까?
아직도 누가 알쓸맥잡을 듣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과 맥주로 소통할 수 있는 매주 한 시간이 이제 소중하다. 전문 용어로 ‘마’가 수시로 뜨고 버벅거리며 여전히 진행 솜씨도 어설프지만 이 프로그램을 오래 하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아마 껍질을 더 깨야만 가능하겠지. 혹시 화요일, 수요일 밤 12시, 마포 근처를 지난다면 주파수를 100.7MHz에 맞춰 보시길. 누군가 여러 분을 위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있을 테니.
안녕하세요. 여기는 마포FM 알쓸맥잡, 윤한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