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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Aug 25. 2020

박물관에 간 맥주 환자

맥주 환자 눈으로 세계 바라보기

박물관은 신비한 보물 창고 같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갔던 국립중앙박물관은 광화문 안에 있었다. 나는 그 건물이 조선총독부였는 지도 모르고 쏘다니곤 했다. 특별히 숙제를 한다거나 조사를 하러 간 것도 아닌데 그냥 박물관에 있는 걸 좋아했다. 전시물에 대한 관심보다 건물 곳곳을 탐험하는 듯한 기분과 박물관의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으리라. 어렴풋이 기억하는 옛 국립중앙박물관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차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봤다면 위압적이고 기괴한 모습이 거북하고 불편했을 텐데. 기억은 이렇게 왜곡되어 추억이 되곤 한다.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해는 다사다난했던 1995년이었다. 난 대학교를 갓 입학해 야생마처럼 날뛰고 있었다. 단체 미팅을 기다리며 잔디 위에서 막걸리 한잔을 하는 캠퍼스 낭만도 있었지만 여전히 최루탄이 교문 앞에 터지고 프락치가 교내에서 활보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1995년 8월 광복절에 시작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 회복을 위한 쇼로만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쉽게 할 수 없는 꽤 대담한 결정이었는데.

구 국립중앙박물관(조선총독부) (출처 : 인사이트)

역사의 아픔이자 치욕인 조선총독부 철거에 대해 이견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만약 그 건물이 남아있었다면 아주 가끔 추억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아니다. 오히려 조선총독부 해체를 위한 시위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든 저렇든, 내 어린 시절 박물관의 기억과 감정은 95년 이후 사라졌다. 시간이 한참 지나 방문한 새 국립중앙박물관은 깔끔하고 모던했지만 내 가슴을 뛰게 만들지는 못했다.



박물관, 이 단어가 가슴을 뛰게 한 건, 7년 전 런던이다.


독일 쾰른 식품 박람회 일정을 마친 나는 영국 런던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같이 출장을 간 친구가 오랜만에 유럽을 가는데 독일만 보고 올 수는 없다는 투정에 난 영국을 제안했다. 맥주 때문이다.  한때 영국은 세계 최고의 맥주 국가였다. 1차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자본의 힘을 업은 영국 맥주는 전 세계 식민지로 퍼져 나갔다. 맥주는 대영제국의 문화와 정신을 전파하는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대영 제국이라는 해가 진 후, 영국 맥주도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 라거의 나라인 독일과 크래프트 맥주의 나라인 미국 사이에서 여전히 기를 못 펴고 있지만 이역만리 떨어진 한국에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런던 펍에서 축구를 보며 리얼 에일을 마시는 건, 일종의 판타지였다.

블랙프라이어스 펍 (출처 : 윤한샘)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런던에 있는 많은 펍과 에일을 경험하고 싶었다. 대영박물관 같은 관광지는 방문 목록에 없었다. 맥주 마실 시간도 없는데 웬 대영박물관? 하지만 동행 한, 맥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친구는 대영박물관을 원했다. 그래, 프랑크푸르트와 쾰른 그리고 런던까지 나와 맥주 마시느라 고생했는데, 반나절 정도는 내가 희생해야지.


그리스에서 약탈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대영박물관은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을 잔뜩 품고 있었다. 철거된 조선총독부가 떠올라 맘에 들지 않았다. 채광이 좋은 웅장한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가이드북을 펼쳤다. 어차피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을 터, 그리스 로마관을 슬렁슬렁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두 단어에 눈이 꽂혔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맥주의 탄생지 아니던가. 혹시 맥주에 관련된 유물이 있으려나? 기대감 비슷한 긴장감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난 반쯤 미친 사람처럼 대영박물관을 휘젓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유물, 책에서만 보던 맥주 관련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대영박물관은 고대 맥주 탄생지 유물들의 천국이었던 것이다. 무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조사라도 하고 올 것을.


책과 구글에서만 봐왔던 고대 맥주의 흔적이 여기 있다. 마음이 급했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의 흔적, 그중 맥주에 관련된 유물들을 미친 듯이 훑고 다녔다. 맥주와 빵이 기록된 설형문자들과 당시 문화를 알 수 있는 유물들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내 생애 다시 여기에 온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대영박물관 (출처  윤한샘)
맥주를 의미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설형문자 점토판 (출처 : 윤한샘)

사람들은 로제타 스톤 사진을 찍기 위해 난리였지만 난 맥주를 임금으로 나눠줬다는 설형문자가 담긴, 손바닥 크기만 한 점토를 찍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집트 미라 앞에서 바글거릴 때, 난 고대 이집트 맥주 이야기와 관련 있는 오시리스와 이시스, 그리고 맥주를 만드는 모습이 담긴 작은 점토상 앞에 서 있었다. 그리스에서 훔쳐온 엘긴 마블 보다 맥주잔의 전신인 고대 고블릿 잔에 감탄하며 맥주의 흔적이 담긴 고대 잉글랜드 유물은 없는지 찾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그냥 스쳐갈 만한 유물들이 나에게는 세상 값진 보물이었다.



“맥주 환자…”


박물관을 나와 블랙프라이어스 펍에서 밍밍한 리얼 에일을 한 잔 하며 중얼거렸다. 그냥 환자도 아니고 중증 환자였다. 우리들 사이에서 보통 세 단계로 맥주 환자를 구별하곤 한다. 먼저 맥주 초기 환자다. 이들은 맥주에 푹 빠져 시중에 나와있는 모든 맥주를 마시려고 한다. 초기 환자들은 자신의 월급의 일정 부분을 맥주 구입에 사용하며 보통 SNS나 블로그에 자신이 마신 맥주를 자랑하고, 새로운 맥주가 출시되면 하루라도 가서 빨리 마셔야 직성이 풀린다. 맥주의 향과 맛을 구분하고 평가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한다.  


맥주 중증 환자는 맥주에 관대한 태도를 갖는다. 대부분의 맥주 스타일을 마셔봤고 다양한 경험을 한 뒤라, 맥주 향미나 신상 맥주에 대해 다소 초월해있다. 이들에게 맥주를 자랑하는 것은 촌스러운 짓이다. 맥주 축제나 박람회에서 꼭 마셔야 할 맥주를 구분할 줄 알며 새로운 맥주에 큰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해외여행에서 유명한 펍이나 브루어리를 방문한 경험이 있으며 남들보다 우월한 맥주 지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뿌듯해한다. 이들 중 몇몇은 펍을 차리거나 맥주 양조장을 운영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맥주 말기 환자는 모든 것을 맥주와 연관시키는 심각한 단계다. 책은 말할 것도 없이 네플릭스의 영화와 다큐멘터리도 맥주와 연관된 것만 본다. 미술과 음악도 어떻게든 맥주와 연결하려고 고민한다. 맥주 이야기로 밤을 새울 수도 있다. 영화, 드라마, 스포츠, 미술, 음악, 역사, 사회학, 정치학, 생물학, 화학을 공부하지만 항상 그 중심에는 맥주가 있고 맥주와 관련 없는 것은 과감히 접는다. 해외여행도 중증환자와는 결이 다르다. 박물관, 미술관, 유적지를 들러 일반인들은 생각지도 못하는 연관성을 찾아 경험하고 기록한다. 전지적 맥주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돌아온 후, 난 말기 환자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닥치고 유럽 역사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국 현대사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는 알 바 아니었던 내가 영국사와 독일사 그리고 벨기에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역사와 인물, 무엇이든 맥주와 연관된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파고들었다. 한국맥주문화협회를 설립하면서 나의 말기 증상은 완성됐다. 역사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영화 심지어 화학과 물리 같은 이상한 학문도 맥주와 관련이 있으면 건드리고 있었다.  


두 번째 대영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난 이미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맥주 말기 환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헤매지 않았으며 조급하지 않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중 맥주를 찾아냈으며 시대별 문자의 변화도 구별할 수 있었다. 이집트의 유물에서 밀과 보리가 있는 그림과 맥주를 만드는 토상들을 찾아냈다.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며 내 지식과 세계관이 확장된 것이다. 물론 맥주와 관련된 것만.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박물관도 마찬가지였다. 괴테 생가 옆에 있는 박물관은 이미 몇 번을 가봤던 곳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괴테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파우스트의 저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맥주 말기 환자가 된 후, 괴테 생가와 박물관은 살짝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도대체 맥주와 괴테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맥주 말기 환자가 되면 이렇게 괴테를 바라본다.

괴테, 프랑크푸르트 괴테 뮤지엄에서  (출처 : 윤한샘)

먼저 이 모든 것은 괴테가 아닌 마틴 루터로 시작된다. 루터는 16세기 종교혁명을 한 인물이다. 세계사와 종교사에서 워낙 유명한 인물이지만, 맥주 책을 조금 본 사람들이라면 루터를 복비어와 수녀원 양조자였던 그의 아내 ‘카타리나’와 연관시킬 것이다. 루터가 평생 좋아했던 맥주가 그의 아내가 만든 맥주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루터가 재판을 위해 카를 5세를 만나러 갔을 때, 그의 절친이 쫄지 말라며 맥주를 보냈고, 그 맥주가 복비어라는 일화는 맥주 책 좀 본 사람들이 어디 가서 소소하게 푸는 안주거리다.


하지만 맥주 말기 환자에게 누구나 아는 이런 썰은 시시하다. 우리는 루터가 표준 독일어를 만든 사람임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그 표준 독일어를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작품을 통해 세계 문학 언어로 승화시킨 사실도 함께 떠올린다. 루터와 괴테가 완성한 독일어는 1871년 독일이 통일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어는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 통일이 맥주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1871년, 만약 독일 제국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2차 산업혁명도 없었을 것이며,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라거 발전도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맥주 산업과 시장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루터와 괴테, 비스마르크와 독일제국, 그리고 라거와 지금의 맥주시장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게 맥주 말기 환자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너무 과장한다고, 억지 부리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루터와 괴테 그리고 맥주가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예를 보면 맥주 말기 환자를 치료, 아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썼던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바흐 켈러를 가면 지하에 작은 박물관이 있다. 물론 괴테의 파우스트를 기념하기 위한 공간이다. 이 곳을 투어 하다 보면 놀라운 그림을 보게 된다. 아우어바흐 켈러의 주인이자 세력가였던 하인리히 스트로머가 루터와 그림 속에 함께 있는 것이다. 그는 도망자였던 루터를 숨겨주고 후원한 사람이다. 그 옆에는 루터가 카를 5세 앞에서 재판을 받는 그림도 있으며 루터를 상징하는 문양과 하인리히 가문의 문양이 나란히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시대 별로 사용했던 아우어바흐 켈러의 비어 머그도 놓여있는데, 아마 그는 루터와 종종 맥주를 마시며 종교와 시대상황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괴테는 루터가 맥주를 마시던 공간에서 인생 역작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루터, 괴테, 독일제국은 모두 맥주로 수렴된다.

하인리히와 루터, 라이프치히 아우어바흐 켈러에서 (출처 : 윤한샘)
카를5세와 루터, 라이프치히 아우어바흐 켈러에서(출처 : 윤한샘)

베를린도 나 같은 사람에겐 거리 곳곳이 맥주와 연결된 도시다. 베를린 중심에 있는 훔볼트 대학은 일반 사람들에게 아인슈타인이 졸업한 명문 대학이겠지만 나에게는 파스퇴르의 라이벌이자 백신의 아버지인 로베르트 코흐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 코흐는 세균을 순수 분리 배양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한 사람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칼스버그 연구소장인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은 라거 효모를 순수하게 분리하지 못했을 것이고 라거는 지금과 같이 대중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훔볼트 대학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콜비츠의 피에타 상은 어떠한가? 콜비츠는 20세기 초 가난하고 핍박받는 노동자와 전쟁의 피해자를 판화와 조각으로 표현한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다. 두 아들을 전쟁으로 잃은 후, 그녀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작품으로 표현하며 전쟁과 나치에 대항했다. 그중 피에타는 그녀의 슬픔과 메시지를 가장 잘 나타낸 작품으로 꼽힌다. 맥주 말기 환자에게 맥주와 콜비츠의 피에타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나는 맥주와 예술이라는 강연에서 종종 콜비츠의 작품을 이용하곤 했다. 미술을 전공자도, 전문가도 아니었지만 콜비츠의 작품에서 그녀의 아픔과 절절한 슬픔을 읽었고, 그런 감정을 맥주와 함께 소개했다. 그런 콜비츠의 피에타를 베를린에서 직접 봤을 때의 감정은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추적추적 비를 맞고 있는 피에타 상 앞에서 난 한동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이처럼 맥주 말기 환자들은 맥주를 통해 역사와 문화에 남들과 다른 감정을 이입하곤 한다. 특히 베를린 페라가몬 박물관은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 곳이다.

콜비츠 피에타, 베를린 (출처 : 윤한샘)

페라가몬 박물관은 1910년부터 중동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지어졌다. 1930년 박물관의 섬에 완성된 이 곳은 수메르에서 앗시리아 그리고 신 바빌로니아까지 한 때 최고의 문명을 누렸던 흔적들로 가득하다. 특히 신 바빌로니아 시대, 네부카데네자르 2세가 건설한 이슈타르 문은 인류 최고의 걸작이다.  아름다운 청벽돌로 된 문과 신비로운 동물의 조각, 그리고 박물관도 감당하지 못하는 거대함에 난 숨이 멎고 말았다.


이슈타르 문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대재단, 공중정원, 바빌론의 탑까지 페라가몬 박물관 속 메소포타미아는 아름답고 화려한 역사를 보여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슈타르 문이 있는 신 바빌로니아를 두고 ‘장대함에 있어 바빌론을 따라갈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화려한 도시에 사는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행복했을까? 사실 이 곳은 항상 불안과 걱정이 지배했다. 강은 수시로 범람해 농작물을 앗아갔고, 수 백 년에 걸친 많은 전쟁과 그로 인한 왕권의 교체는 일상의 터전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불안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사후보다 현세, 나중보다 지금을 갈망하게 했다.


화려한 이슈타르 문을 지나면 메소포타미아 인들의 일상을 담은 소소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인생의 행복, 그 이름은 맥주, 인생의 불행, 그 이름은 원정’. 그들의 삶과 문화를 바라보니 머릿속에 이 문구가 떠올랐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이렇게 행복을 맥주에 비유하곤 했다. 투병한 벽 뒤에 있는 유물들은 나에게 지금을 즐기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바보야. 사랑하는 사람들과 맥주 한 잔 하는 일상이 바로 행복이라고.

이슈타르 문, 베를린 페라가몬 박물관 (출처 : 윤한샘)

맥주 말기 환자들은 지루할 틈이 없다. 세상 어느 것 하나 맥주와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연결점을 발견하고 감탄하며 새로운 스토리로 구성하는 것, 맥주 말기 환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선물이다. 지금도 난 맥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맥주로 재미있게 놀기 위해 분투한다.


원래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그 앎이 커질수록 세계는 흥미롭고 인생은 재미나다. 맥주가 문화인 이유는 그 중심에 맥주라는 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자물쇠가 있는가. 그렇다면 맥주라는 열쇠로 풀어보자. 이 맥주 말기 환자의 말을 믿어보라.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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