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첫 가족 여행에서 만난 런던 그리고 리얼 에일
영국의 겨울은 따뜻했다.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위해 찾아간 조지인(George Inn)은 유난히 포근하게 느껴졌다. 오래된 영국 스타일 건물과 현대식 빌딩이 성곽처럼 에워싼 마당 안으로 피라미드 가스난로와 노란 백열등의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겨울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옹기종기 앉아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코로나가 오기 바로 전 런던은 밝고 활기찼다.
축구와 맥주. 우리 가족의 첫 유럽 여행의 테마는 시나브로 정해졌다. 유럽 축구를 직접 관전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로망이었다. 하지만 엘리트 축구 선수였던 아이는 주말과 방학에도 대회에 나가야 했고, 나와 아내는 이런 아이를 쉼 없이 따라다녀야 했다. 아이러니하게 아이가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꿀 수록, 유럽 축구 직관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주말 밤 맥주를 마시며 티비 속 프리미어 리그 관중 모습에 대리만족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인생이 어찌 계획대로만 흘러가던가. 제2의 기성용을 꿈꾸던 아이가 선수 생활을 정리하자 아내는 망설임 없이 불가능할 것 같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초등학생부터 5년간 축구 선수로 바쁘게 달려왔던 아이와 힘들게 뒷바라지를 했던 아내의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맥주가 이 여행의 테마가 된 것은 오롯이 나 때문이다. 아내는 별 말없이 맥주 삼시세끼를 허락해주셨다. 내가 유럽에 가면 맥주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가 될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송한 마음도 잠시, 머릿속에 두 도시가 떠올랐다. 축구와 맥주가 공통어로 통하는 곳, 영국 런던과 독일 뮌헨이었다. 가족 여행으로 유럽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하던가. 한 번에 영국과 독일, 두 나라를 방문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런던과 뮌헨은 관광, 축구, 맥주를 고루 즐길 수 있는 곳이었고 무엇보다 나에게 익숙한 도시였다.
어떤 팀의 경기를 관전할지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손흥민의 토트넘 경기를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으나 ‘축잘알’인 우리는 맨체스터 시티와 리버풀을 명단에 올렸다. 맨시티의 유려하면서도 아름다운 축구와 헤비메탈 같이 박진감 넘치는 리버풀 축구는 초록색 도화지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예술 작품이었다. 독일에서 바이에른 뮌헨 경기도 보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분데스리가는 1월 내내 휴식기를 가졌다.
본격적인 여행 준비가 시작되자 나는 축구 티켓 예매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플랜 A는 리버풀에 가는 것이었다. 리버풀 팬인 ‘콥’은 아니었으나 홈구장인 안필드의 분위기를 꼭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리버풀 경기 티켓 값을 보는 순간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맨시티 팬이 되기로 했다. 티켓 가격도 가격이지만 리버풀은 마지막 목적지인 뮌헨으로 가는 직항 비행 편을 갖고 있지 않았다. 반면에 맨체스터 시티 경기 티켓은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뮌헨으로 가는 직항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장인 알리안츠 스타디움 투어를 스케줄러에 추가했다. 물론 나는 거기서 마시는 파울라너 생맥주가 더 큰 목적이었지만.
런던, 맨체스터 그리고 뮌헨이라는 뼈대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근육과 살을 붙일 차례. 구체적인 방문지는 각자의 욕망을 골고루 반영해 정하기로 했다. 아내는 런던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과 유적지를, 아들은 축구장 투어와 셜록 홈즈를 원하고 있었다.
곧 런던의 일정은 토트넘 경기장 투어를 시작으로 국회의사당, 빅벤,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그리고 영드 셜록의 촬영지인 ‘스피디 카페’로 타이트하게 채워졌다. 맨체스터에서는 맨시티와 에버턴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관람하기로 했고 뮌헨에서는 알리안츠 스타디움, 마리엔 시청사, BMW 박물관을 중심으로 여유로이 독일 문화를 즐기기로 했다.
아내와 아들의 욕망이 채워지자, 본격적으로 나의 욕망을 계획할 순서가 돌아왔다. 나는 철저히 전지적 맥주 시점으로 구글 지도를 탐색했다. 비교적 자주 방문했던 뮌헨은 크게 고민할 거리가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지도가 들어 있었고, 대부분의 가스트호프를 가봤던지라 방문지와 동선이 쉽게 그려졌다. 문제는 런던이었다.
런던을 방문한 지 벌써 6년, 이는 곧 맥주 환자인 내가 리얼 에일을 마셔본 지 6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리얼 에일(real ale)은 캐스크(cask)라는 통에서 이차 발효와 숙성을 하는 영국 전통 맥주다. 캐스크 에일이라고도 불리는 이 맥주는 양조장에서 발효가 종료되면 바로 펍으로 보내 추가적인 발효 또는 숙성을 진행한 후 서빙된다. 보통 맥주 환자들이 영국에 가는 이유는 이 리얼 에일을 마시기 위해서다.
리얼 에일은 한 때 라거에 밀려 사라질 위기를 겪었다. 멸종 직전의 리얼 에일을 되살린 건 1971년 결성된 캄라(CAMRA ; Campaign for Real Ale)였다. 이 조직은 라거에 두드려 맞고 뒷골목에 찌그러져 있는 영국 맥주를 살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다. 심지어 ‘영국 전통 방법을 따르지 않는 맥주를 맥주로 규정하지 않는다’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사용하며 영국 전통 맥주의 부활을 진두지휘했고, 그 결과, 정부와 시민들의 지지 아래 리얼 에일을 영국 문화의 하나로 안착시켰다.
리얼 에일은 탄산의 압력이 아닌, 전통적인 핸드 펌프를 통해 서빙된다. 샴푸를 펌핑하듯이 캐스크에 펌프질을 하면 공기 압력을 통해 맥주가 나오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맥주와 산소가 만나는데, 이는 산화라는 결정적인 결함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오픈하면 48시간 안에 소진되어야 하며 품질을 관리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캄라는 이 까다로운 관리를 위해 캐스크 마크(Cask Marque)를 만들었고 이 인증을 받은 펍에서만 리얼 에일을 판매하도록 했다.
잘 관리된 리얼 에일은 영국 맥주 효모가 만드는 프루티 에스테르(fruity-ester) 향을 품고 있다. 과일 껍질과 건자두의 향이 반쯤 섞인 듯한 이 오묘한 향이 영국 에일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또한 퍼글스(fuggles)와 이스트 켄트 골딩스(East Kent Goldings) 같은 영국산 홉은 섬세한 꽃향과 젖은 흙향을 맥주에 부여하며 탄산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벼운 바디감을 느낄 수 있다. 이 맥주를 처음 마시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단순한 향미와 밍밍한 바디감에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리얼 에일의 진면목은 그 단순함에 있다. 마치 평양냉면 같이.
나는 종종 리얼 에일을 평양냉면에 빗대어 설명하는데, 놀랍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생경한 평행 이론을 단박에 이해한다. 중독적 담백함, 평양냉면의 매력을 묘사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의 조합이 아닐까. 처음 먹을 때는 단순함과 밍밍함에 낙심하지만 나중에는 그 담백함에 중독되어 버리는 역설.
이런 평양냉면의 방정식에 리얼 에일을 대입하면 동일한 답이 도출된다. 장담하건대, 경험치가 쌓일수록 리얼 에일의 밍밍한 바디감과 단순한 향미는 점차 중독적 담백함으로 바뀔 것이다.
리얼 에일과 평양냉면의 평행 이론은 향미적 유사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 둘은 문화를 향유하는 식음료라는 공통점 또한 가지고 있다. 우리가 평양냉면의 원조와 먹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하는 건, 문화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리얼 에일도 영국의 문화적 후광을 마시는 맥주다. 만약 당신이 런던의 작은 펍에서 반쯤 눈을 감은 채, 구리색 리얼 에일이 담긴 노닉 글래스(nonic glass)를 들고 있다면 한 때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의 과거를 즐기고 있다는 반증 이리라.
런던에서 리얼 에일을 판매하는 펍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구글에서 캐스크 마크(Cask Marque)를 검색하면 아이코닉한 핸드 펌프가 박혀있는 지도가 나온다. 지도의 아이콘이 바로 리얼 에일을 파는 펍을 의미한다. 클릭하면 펍의 주소와 개략적인 설명을 볼 수 있다. 만약 평점이 궁금하면 구글 지도에서 해당 펍의 리뷰를 보면 된다. 리얼 에일의 열렬한 팬이라면 애플리케이션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맥주 삼시세끼’를 허락받았지만 가족 여행에 맞는 펍을 고르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맛은 물론 문화도 공유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우선 여행 동선에 따라 10개의 후보를 선정했다. 구글에 들어가 평점을 살펴본 후, 음식과 공간에 대한 스토리 텔링을 기준으로 필터링했다. 그 결과, 조지인(George Inn)과 풀러스 키친 에일&파이(Fuller’s Kitchen Ale&Pie), 두 펍이 나의 간택을 받았다.
더 조지(The George)라고 불리는 조지인(George Inn)은 템스강 남쪽, 서더크(Southwark)에 있는 오래된 펍이다. 런던 브릿지를 건너 서더크 성당을 지나면 만날 수 있다. 조지인은 펍이지만 개인이나 기업이 아닌 영연방 문화재 보존 조직인 내셔날 트러스트(National Trust) 소속이다. 현재는 영국 최대의 펍 체인이자 양조장인 ‘그린킹’(Greene King)이 운영을 맡고 있다.
런던 대화재 이후 1677년 재건축된 조지인은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조지(George)는 4세기 초기 기독교 순교자인 성 조지(Saint George) 또는 성 게오르그를 뜻한다. 용을 퇴치한 전설로 더 유명한 그는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모습으로 유럽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조지인의 간판에도 용을 퇴치하는 성 조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현재 펍으로 운영되고 있는 조지인은 과거에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중세 시대 ‘여관’(inn)은 숙박, 식당, 병원, 술집, 공연장과 같은 복합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근대 이후, 점차 ‘인’은 숙박을 위한 여관으로 굳어지고 나머지 역할은 각자의 전문성을 갖는 곳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여관과 달리 조지인은 문화적 기능을 가진 공간으로 거듭난다.
17세기 엘리자베스 여왕의 문화 부흥 정책과 셰익스피어의 등장은 영국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다. 이런 문화적 흐름 속에서 다양한 연극이 런던 곳곳에서 펼쳐지곤 했는데, 그 중심에 ‘인 야드 씨어터’(inn-yard theartre)라는 곳이 있었다. 인 야드 씨어터란 발코니가 있는 건물들로 둘러싸인 야외 광장을 갖고 있는 극장식 여관을 의미한다. 광장에서 셰익스피어와 벤 존슨의 연극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발코니에서 맥주와 음식을 먹으며 관람하곤 했다. 한 때 런던에는 다양한 인 야드 씨어터가 있었으나 대화제와 세계 대전으로 모두 손실되고 조지인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이 곳이 내셔날 트러스트의 관리를 받는 이유다.
조지인의 입구는 건물과 건물 틈에 있어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나무로 된 큰 문을 넘어 짧은 골목을 지나면 건물에 둘러싸인 아담하고 포근한 광장이 보인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는 클래식한 외관을 가진 조지인이 있고 정면과 왼쪽에는 생뚱맞게 ‘ㄱ’ 자 모양의 현대식 빌딩이 있다. 본채 중간에는 용과 싸우는 성 조지의 모습이 그려진 작은 간판이 걸려있고 한쪽 끝으로 찰스 디킨스가 종종 커피를 마셨다는 발코니가 보였다. 한때 연극 공연장이었을 야외 광장에는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애초 계획은 내부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예약을 안 받는 곳이라 웨이팅을 해야 했지만 연말이라 이미 만석이었다. 빠른 포기는 편한 법, 우리는 야외에서 맥주를 즐기며 여독을 풀기로 했다. 맥주를 주문하기 위한 카운터는 건물 1층 오른쪽에 있었다. 영국 펍에서는 카운터에서 돈을 지불한 후, 직접 맥주를 가져와야 한다. 독일과 달리 따로 잔 보증금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맥주는 다양하지 않았다. 리얼 에일인 애봇 에일(Abbot ale)과 조지인 에일(George Inn ale), 스타우트인 기네스 그리고 이태리 라거인 페로니가 있을 뿐이었다. 애봇 에일은 이미 경험해 본 터라, 나는 첫 맥주로 조지인 에일을 주문했다. 반면 도전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는 리얼 에일 대신 페로니를 선택했다.
아들의 콜라까지 테이블로 가져오니 그제야 런던의 밤을 만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아름다운 구리색을 가진 조지인 에일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밍밍한 바디감과 옅은 프루티 에스테르를 가진 전형적인 리얼 에일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 맥주가 비현실적인 적으로 다가온 건, 순전히 런던 한 구석, 오래된 펍에 함께 앉아 있는 아내와 아들 덕분이었다. 내가 마신 리얼 에일이 괜찮아 보였던지 아내는 조지인 에일을 한 잔 마시고 싶다고 했다. 아무래도 페로니는 이 곳과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으리라.
밤이 깊을수록 영국의 첫 추억은 리얼 에일과 함께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지고 있었다. 빨강 이층 버스와 튜브, 화려한 토트넘 경기장과 방금 건너온 타워 브릿지까지 오늘 하루의 여정이 맥주 한 잔 속에 들어 있었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오전부터 런던 투어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국회의사당, 빅벤, 웨스터 민스터 사원, 버킹엄 궁과 같은 런던의 주요 관광지를 안내해주는 가이드 프로그램을 위해 8시까지 국회의사당 역으로 가야 했다. 아침 식사는 투어를 마친 후, 악명 높은(?)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를 먹기로 했다. 식당은 버킹엄 궁 근처에 있는 ‘풀러스 키친 에일&파이’. 이 곳은 영국의 대표적인 맥주 브랜드인 풀러스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겸 펍이다. 오후 투어 예정지인 내셔날 갤러리와 대영 박물관도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모닝 맥주’를 마시기에도 완벽한 곳이었다.
이른 아침 공기와 함께 한 도보 투어는 런던을 더 친근하게 만들었다. 오전 투어의 최종 목적지인 버킹엄 궁에 다다르자 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이 허기라면 맛없기로 소문난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를 맛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버킹엄 궁을 따라 남동쪽으로 15분 정도 걸어 내려가자 영국식 건물 1층에 있는 ‘풀러스 키친 에일&파이’가 보였다.
이 건물은 생츄어리 하우스(Sanctuary House)라는 호텔이다. 외부에서 보이는 고전적인 목재 인테리어와 애칭 글래스에서 영국식 감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Breakfast Served’라고 쓰여 있는 작은 입간판이 놓인 입구로 들어서자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한쪽으로는 리얼 에일 핸드 펌프와 라거 탭이 구비된 바가 있었고 고풍스런 샹들리에와 영국식 창문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아침 10시였지만 큰 테이블은 이미 사람들로 차 있었다. 우리는 한쪽 면이 기둥에 붙어있는 아담한 3인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이 곳은 고기를 넣은 영국식 파이가 전문인 곳이지만 우리는 계획대로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를 주문했다. 소시지, 베이컨, 구운 버섯, 달걀 프라이, 베이크드 빈, 토마토와 토스트 반 조각 그리고 블랙 푸딩이 큰 접시에 나오는 이 영국식 아침식사는 가장 흉악한 음식 중 하나다. 싸구려 뷔페 한 접시 같은 구성에 가격은 세금 포함해서 13 파운드, 우리 돈으로 무려 25,000원이었으니, 여러모로 최악의 가성비를 가진 아침 식사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여행자는 이 형편없음도 너그러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족속들이다. 다른 옵션을 포기하고 이 곳에 온 것은 클래식한 영국 인테리어와 음식을 기꺼이 즐기고자 함이 아니던가. 게다가 아침 10시에 리얼 에일을 주문해도 눈치 볼 일이 없으니 불만은 잠시 꺼두기로 했다. 모닝 맥주를 바라보는 탐탁지 않은 아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내 앞엔 풀러스 런던 프라이드 캐스크 에일이 놓였다. 낮게 깔린 잿빛 구름과 비가 내릴 듯 무거운 공기가 느껴지는 오늘 같은 날씨에 가벼운 맥주 한 잔은 움츠려 든 몸을 이완시켜주는 고마운 존재다.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는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았다. 비주얼은 이국적이었으나 싸구려 뷔페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불만은 나만 가지고 있었을 뿐, 아내와 아들은 이국적임, 아니 ‘영국적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밍밍한 풀러스 런던 프라이드에 불만을 갖지 않는 내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비합리적인 단기 여행자는 그래서 즐거운가 보다.
2019년 12월 31일,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은 요란했다. 템즈 강에서는 쉴 새 없이 불꽃이 터졌고 호텔 방 지붕에서는 쥐들이 런던의 마지막 밤을 기억하라는 듯 뛰어다니고 있었다. 2020년 첫날은 어느 새해보다 바빴다. 맨체스터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런던역에 도착한 우리는 미리 예매해 둔 기차표를 발권한 후, 2층 풀러스 펍에서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떡국 대신 먹는 에그 베네딕트은 의외로 만족스러웠다. 풀러스 리얼 에일 또한 새해 첫 맥주로 부족함이 없었다. 다행히 모닝 맥주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은 전보다 너그러워졌다. 이제야 맥주 환자인 아빠를 포기한 건가?
가족과 맥주가 만나는 추억이 생겼다는 건, 나에게 축복과 같은 일이다. 영국 맥주를 마실 때마다 내 기억의 끈은 우리 가족의 첫 유럽 여행지인 런던과 연결될 것이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조지인과 풀러스 에일&파이는 잠시 멈춰 있고 다시 방문할 시기 또한 기약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 두 펍을 다시 찾아갈 것이다. 그때는 아내뿐만 아니라 아들과 밍밍한 리얼 에일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는 축배를 들리라. Viva La Vi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