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의 모든 맥주는 자유다.
공항 출입국 사무소는 긴장의 공간이다. 표정 없는 직원들과 고요 속 들려오는 도장 소리는 오랜 여정으로 피곤한 몸과 마음을 다잡게 만든다. 프랑크푸르트 공항도 그랬다. 무뚝뚝해 보이는 독일 사람들, 별다른 장식 없는 인테리어는 처음 독일에 왔다는 설렘을 잠시 접게 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자신감 있게 출입국사무소 직원과 시선을 맞춰야 한다. 난 이 곳에 사업차 온 것일 뿐이고 내 여권은 전 세계 188국에서 인정받는 대한민국 여권이지 않은가?
그러나 내 이런 긴장감과 떨림은 순간일 뿐이었다. 아무 질문 없이 이내 여권에는 입국을 허가하는 빨간색 ‘FRANKFURT’ 도장이 찍혔다. 늘 까다롭고 불쾌했던 미국의 출입국사무소와 달리 독일은 깔끔하고 신사적이었다. 큰 숨으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공항을 천천히 나왔다. 2008년 2월, 내 생애 첫 유럽 도시인 프랑크푸르트는 차가운 칼바람이 부는 조용한 도시였다.
비즈니스 차 방문하는 도시는 개인 여행으로 올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을 주곤 한다. 사업 목적을 위한 시간을 제외한 스케줄은 특별한 계획 없이 오롯이 혼자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즈니스 여행이 한 도시를 낯설게 체험하기에 더 나은 면도 있다. 하지만 첫 출장은 조금 예외일 수 있다. 박람회를 위한 투어는 비용 절약을 위해 으레 단체로 오기 마련이다. 이런 여행은 가이드의 열렬한 인도 아래 사장님들의 단결된 움직임이 미학이다. 첫 프랑크푸르트에서 나 또한 이런 미학의 충실한 실행자였다.
우리 팀의 가이드는 정인순 씨라는 여성이었다. 공항 첫날부터 지각으로 큰 사고를 쳤던 그녀는 약간 상기돼 보였다. 둘째 날이었지만 사장님들은 첫날 사고에 대한 불만을 여전히 얼굴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일사불란하게 시청 앞 독일 음식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멋진 시청 야경이 바로 건너 보이는, 전통 인테리어가 담담하게 느껴지는 레스토랑이었다. 요란한 우리와 달리 직원들은 단체 손님이 별 일은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메뉴를 살펴볼 새도 없이 황금빛 액체가 툭 하고 놓였다. 손잡이가 달린 원통형 유리잔에 담겨있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맥주처럼 보였다. 오히려 맥주보다 음식에 더 눈길이 갔다. 일 인분이 맞나 싶을 정도의 큰 돼지족이 삶은 양배추와 함께 놓여있었다. 학센이라는 독일 전통 요리였다. 겉바촉촉, 이 음식을 설명하기엔 이 단어가 어울린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육즙으로 촉촉한 이 족발은 단숨에 내 취향을 사로잡았다. 부드러운 질감에 시큼한 맛이 나는 양배추 김치, 사우어크라우트는 금상첨화였다. 하지만 잠시 뒤, 무엇보다 내 머리를 띵하게 한 건 다름 아닌 평범하게 보였던 그 황금빛 음료, 맥주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 몰래 마셨던 맥주부터 30대 중반까지 마신 맥주까지, 이 모두를 합하면 조그만 호텔 수영장 정도는 된다.(아마 지금은 중급 호텔 수영장 정도 되려나)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시청 앞에서 학센과 함께 마신 이 맥주는 그동안의 모든 맥주를 리셋할 정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들이킨 맥주에는 섬세한 풀과 건초 향이 가득했다. 혀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쓴맛과 작지만 무수한 탄산들이 약간 텁텁했던 학센을 마치 푸딩처럼 만들고 있었다.
'아니, 내가 아는 그 맥주 맞아?'
달랐다. 내가 그동안 마셔왔던 맥주와는 분명 달랐다. 이내 한 잔을 마신 후, 메뉴판을 부리나케 살피기 시작했다. 지금 마신 게 빈딩(Binding)이라는 필스(pils) 맥주란다. 필스 밑에는 바이젠(weizen)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주문 후 받아 든 그 맥주는 호리병 같은 잔에 불투명하고 거품이 터질 듯한 모습으로 담겨있었다. 약간 비릿하면서도 바나나 같은 향, 미세하지만 폭발할 듯한 탄산감 그리고 빛이 투과되지 않는 밝은 색의 맥주는 카스, 하이트, 맥스, 오비라거, 그리고 미국에서 폼 좀 재고 마셨던 버드와이져, 밀러, 미켈롭과는 완연히 달랐다.
어느덧 나는 한국 아저씨들의 왁자지껄함을 배경 삼아 슬로우 모션으로 맥주를 음미하고 있었다. 다른 차원에 있었던 걸까? 독일 맥주가 궁금해졌다.
독일의 박람회(Messe)는 자세히 보려면 일주일은 필요할 정도로 거대하다. 시장 트렌드 조사 차 온 출장이었기에 웬만하면 모든 부스를 보고 돌아가야 했지만 3일 차부터 살짝 계획을 틀고 싶었다. 독일의 맥주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독일어는 까막눈이었고 이 곳 지리도 몰랐다. 그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정인순 가이드였다.
사실 첫날부터 꼰대 사장님들의 표적이 된 그녀가 계속 눈에 밟혔다. 그만할 법도 한데 얼굴에 계속 첫날 실수에 대한 미안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오전 일정을 급히 마치고 정인순 가이드에게 연락했다. 밥을 살 테니, 오후에 개인적으로 프랑크푸르트를 구경시켜줄 수 있냐고.
8살 연상인 그녀는 아주 쾌활한 여성이었다. 당시 독일에 온 지 20년이 훌쩍 넘었고 독일인 남편과 아들, 딸을 둔 김해 출신 여인은 흔쾌히 프랑크푸르트 투어를 수락했다. 그녀는 약간의 경상도 사투리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돔, 오페라 하우스, 뢰머 광장 등 프랑크푸르트 곳곳의 역사를 맛깔나게 설명했다. 그녀의 자존감을 걱정했던 내가 오히려 무색할 정도였다. 투어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무렵, 늦은 점심을 위해 들어간 곳은 가리발디라는 이태리 레스토랑, 메뉴를 고를 새도 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와인을 주문했다.
아니, 낮부터 와인이요?
하지만 이내 나는 오히려 내가 더 이상한 사람인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는 해가 중천에 있는 낮에 맥주와 와인을 마시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 문화가 달랐다. 이내 어색함을 가리고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맥주를 골랐다. 이름은 둔켈(Dunkel), 이 맥주를 주문한 이유는 하나였다. 이상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둔켈, 독일어로 어둡다는 뜻이다. 둔켈 비어는 흑맥주였다. 맥주를 잘 모르지만 독일어가 능숙했던 정인순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500ml 벡스 둔켈을 한 잔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길거리 곳곳에 맥주 한잔을 마치 음료수처럼 마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자연스러운 그들과 달리 난 뭔가 경직되어 있었다. 술이란 자고로 해가 떨어진 뒤에 마셔야 자연스러운 게 아니던가. 하지만 한국에서 수천 킬로 떨어진 독일에서는 낮술이라는 터부로 나를 옭아매는 눈이 없었다. 유일하게 같은 말을 쓰는 한국 여성도 와인을 음료수처럼 마시고 있지 않은가.
커다란 화분과 같은 잔에 담긴 둔켈을 반 잔 정도 시원하게 비워낸 후에야 나를 둘러싼 고리타분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이런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적어도 독일에 있을 때만은 넓은 테라스에 앉아 혼자 맥주를 주문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독일에서 맥주는 나에게 자유롭다는 감정을 선물했다.
한국에서 낮에 혼자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낮에 마시는 맥주의 줄임말인 낮맥은 유럽 사람들에게 생소할 것이다. 맥주에 대한 문화적 맥락이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맥주는 해가 진 후 마시는 쾌락적 음료다. 서로의 끈끈함을 증명하는 도구 중 하나일 뿐이다. 게다가 어스름한 조명도 부족한 지, 눈이 어슴푸레할 정도로 마셔댄다. 그래서 낮에 마시는 맥주와 밤에 마시는 맥주는 같지만 다른 맥락을 갖는다.
나 또한 맥주는 빨리 흐릿한 눈을 만들기 위해 소주에 섞어 마시는 술에 불과했다. 하지만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신 맥주는 달랐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만의 시공간에서 마신 맥주 한잔은 전형적인 한국 직장인이었던 내게 자유를 선물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서 살짝 벗어나도 괜찮겠다는 용기도 얻었다. 누구에게는 단순한 술에 불과한 맥주에서 나는 삶의 방향성에 대한 작은 힌트를 얻은 것이다.
이후 10년 넘게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다. 빨간색 프랑크푸르트 입국허가 도장이 많아질수록 적응하기 힘들던 단체 여행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여전히 독일어 까막눈이지만 시내 맛집, 괜찮은 한국음식점, 나름 깔끔한 호텔은 물론 프랑크푸르트 돔 옆에 있었던 로마시대 유적의 복원 과정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프랑크푸르트의 맥주 맛집을 추천하기는 쉽지 않다.
이 곳은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시는 아니다. 유럽의 경제 중심지지만 뮌헨, 쾰른, 밤베르크 같은 맥주 역사는 가지고 있지 않다. 프랑크푸르트는 오히려 독일의 빅브랜드 맥주를 모두 마실 수 있는 맥주 코스모폴리탄과 같다. 빈딩이라는 독일에서 가장 큰 맥주회사를 가지고 있지만 빈딩을 위해 이 곳까지 맥주 순례를 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이 도시는 맥주 순례지와 같다. 맥주의 종류와 브랜드는 상관없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시는 맥주는 모두 자유와 해방이다. 대성당이 보이는 마인 강가, 뢰머 광장이 보이는 시청사 밑, 황소와 곰이 있는 증권거래소 옆, 특별할 것 없는 괴테 생가 앞에서 마시는 모든 맥주는 다른 도시보다 특별하다.
아, 그 불쌍했던 정인순 가이드는 잘 지내고 있을까? 걱정 마시라. 그 이후로 우리는 오누이처럼 지내고 있다. 10년 넘게 독일과 서울에서 만나며 감사하고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누님은 맥주에 1도 관심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