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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Sep 04. 2020

축제가 사라졌다

옥토버페스트에서 도장깨기를 바라며

아우크스부르크에 숙소를 잡은 건 가격 때문이었다. 옥토버페스트 기간에는 뮌헨의 모든 것이 오른다. 특히 숙박비가 3배 이상 오르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매년 전 세계에서 600만 명의 인원이 오는 축제니 그럴 만도 하다. 출발 며칠 전에 옥토버페스트 참가를 결정하는, 나 같은 사람은 보통 뮌헨의 위성도시에 숙소를 잡고 기차를 타는 방법을 택한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작고 조용한 도시다. 아우크스부르크 돔 주위로 이어지는 아담한 골목과 고즈넉한 분위기는 언제라도 다시 오고 싶게 만든다. 여러 위성도시 중에서 이 곳을 선택한 이유도 몇 년 전 잠시 경험했던 이 도시만의 매력 때문이었다. 사실 마르틴 루터의 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역사적인 곳이라 방문했었는데, 카톨릭이 중심인 이 곳에서 그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도시 자체가 주는 평안함이 좋았고, 이렇게 두 번째 방문하는 인연으로 연결됐다.   

아우크스부르크 성당 (출처 : 윤한샘)
돔호텔에서 본 아우크스부르크 전경 (출처 : 윤한샘)

하루에 100유로인 돔 호텔은 뮌헨에서 열리는 옥토버페스트를 즐기고 다음 날 독일을 떠나는 일정을 위해 완벽한 선택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 돔을 지나 오른쪽 골목에 있는 이 호텔은 고풍스러운 중세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방에서 바라본 아침 도시 전경은 중세 마을과 다름없었고 심신이 지친 여행자들은 그 풍경에 심신이 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전 기차역, 흐리고 찬 기운이 느껴졌지만 독일의 9월에 흔히 볼 수 있는 날씨였다. 33유로면 바이에른 전 지역의 기차를 하루 동안 탈 수 있는 바이에른 티켓을 끊고 플랫폼에 있자니 옥토버페스트에 가는 무리들이 눈에 띈다. 바이에른 전통의상을 입은 이들은 벌써부터 맥주 한 잔씩 하고 있다.


바이에른의 전통 의상은 남녀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남자 의상은 레더호젠(Lederhosen), 여자 의상은 던들(Dirndl)이라 부른다. 예전에 ‘옥토버페스트’라는 곳에서 비슷한 코스프레를 볼 수 있었다. 종로, 강남, 홍대, 주요 상권에 있었던 옥토버페스트는 직접 양조한 필스, 둔켈, 바이스비어를 파는 브루펍이다. 그곳의 종업원들은 짝퉁 바이에른 전통 의상을 입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뮌헨을 몇 번 와서인지, 그 옷을 입은 모습이 낯설지 않다.


한때 바이에른에서 옥토버페스트라도 전통의상을 입는 것을 금기시하던 때가 있었다. 독일은 나치의 경험을 상기시킬 수 있는 상징적, 기호적 문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체주의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될 수 있으면 지양했다. 여기에는 지역과 전통문화도 예외가 없었다. 우리는 정체성이라 여기지만 그들에게는 우월성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은 독일 연방 중 가장 보수적인 곳 중 하나라 외견으로 드러나는 상징적 행동이나 표식에 더욱 엄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근래 들어 문화와 관련된 것들은 많이 완화가 된 듯하다. 게다가 전 세계인들의 맥주축제 옥토버페스트 아닌가. 그들이 이어 온 세계적인 축제의 전통 의상에 국수적인 의미를 입히는 건 오버인 듯하다.


기차가 뮌헨으로 갈수록 지평선 넘어 구름 사이로 해가 보였다. 다행이다. 처음 가는 옥토버페스트에 비가 오면 그 보다 불행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축제 첫날 아닌가. 날씨는 무조건 화창해야 했다. 익숙한 뮌헨 중앙역에 내린 후, 짐짓 당당하게 플랫폼을 나섰지만, 이내 당황했다. 당연히 축제가 시청이 있는 마리엔 플라츠에서 시작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테레지엔비제로 가야 했다.


커다란 텐트에서 맥주를 마실 생각을 하며 부리나케 움직이는데 기대치 않았던 퍼레이드가 보인다. 옛 바이에른의 가문의 문양을 들고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약간 촌스러운 음악을 연주하는 브라스 밴드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자연스레 발걸음을 멈추고 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옥토버페스트가 단순히 맥주를 마시는 축제가 아니었지


이 축제의 본질을 잠시 잊고 있었다. 옥토버페스트는 단순히 맥주를 마시며 노는 잔치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전통문화로 물드는 시간이다. 하지만 말을 탄 한 무리의 사람들 뒤로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커다란 맥주통을 실은 마치가 보이자, 이내 가슴이 설레었다. 학커-프쇼(Hacker-Pschorr), 옥토버페스트에 참여하는 6개의 맥주 브랜드 중 하나다. 화려한 장신구를 한 말이 꽃으로 단장한 맥주 마차를 끌고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옥토버페스트 퍼레이드 (출처 : 윤한샘)
학커-프쇼 맥주마차 (출처 : 윤한샘)
파울라너 맥주 마차 (출처 : 윤한샘)

우리는 맥주가 옥토버페스트의 핵심 가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축제는 1810년 루트비히 1세와 테레사 왕비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잔치였고 경마와 같은 스포츠 경기가 중심이었다. 현재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장소가 예전에 경마를 했던 광장이다.


1850년만 해도 이 축제는 정치적인 목적이 중심에 있었다. 당시 바이에른은 북독일의 최강자 프로이센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위상이 격상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민중들에게 바이에른의 정체성을 고취시키고 서서히 논의되고 있는 통일 독일 제국의 주체로 참여하기 위해 이 같은 축제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바이에른 민중들은 축제의 참여자이긴 했지만 주인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이에른 깃발이 나부끼는 테레지엔비제에 있으면 바이에른 왕국의 시민으로서 가슴이 벅차올랐으리라. 나중에 나치도 똑같은 방법으로 옥토버페스트를 이용했다.


1871년 독일 통일에서 맥주는 독일 민족 정체성 형성을 위해 필요한 식문화였다. 독일인들은 맥주와 소세지 하에 같은 민족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 맥주는 반드시 맥주순수령을 따라야 했다. 독일인은 순수한 맥주를 마시는 한민족이었다. 맥주순수령은 1516년에 제정되었지만 독일인의 마음속에 스며든 건, 1871년 이후였다. 맥주와 축제, 이 두 단어 속에 있는 원초성과 정치성이 만드는 아이러니함이 생경하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바이에른 국기와 전통 의상을 입고 퍼레이드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테레지엔비제 중심에 우뚝 서있는 바바리안 동상을 상상하니 19세기 독일 제국 속에서 바이에른이 가졌던 자부심과 긍지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퍼뜩 감상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니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표식이 없다. 분명 예전에 왔었던 곳인데, 축제 지형으로 바뀌니 잘 모르겠다. 이럴 땐 구글 지도보다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가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물고기 떼 같은 한 무리의 인파들이 한 곳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놀이 공원이었다. 가로수 사이로 롤러코스터와 관람차가 보였다.

웰컴 투 옥토버페스트 (출처 : 윤한샘)
옥토버페스트 행사장 (출처 : 윤한샘)

메인 입구에 다다르자 근처에 물품 보관소가 보였다. 귀중품도 없었고 나의 목적은 놀이기구를 타는 것이 아닌, 텐트에서 옥토버페스트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기에 백팩은 갖고 있기로 했다. 하지만 잠시 뒤, 난 행사장에서 나와 물품 보관소로 다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백팩은 맥주 텐트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축제 장소에는 가져갈 수 있으나, 맥주 텐트로는 반입이 안됐다. 들어가기 전 미리 좀 알려주지.


백팩을 맡긴 후, 다시 찬찬히 옥토버페스트 광장을 바라봤다. 관람차, 자이로드롭,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 기구들이 있었고 곳곳에 소세지와 전통 음식을 파는 예쁜 부스들이 많이 보였다. 맥주와 관련된 아이템들로 도배되어 있을 것이라 상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독일과 바이에른 문화를 여기저기서 즐길 수 있었고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즐겁게 그 시공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커다란 그릴에 구워지고 있는 소세지를 보고 있자니, 빵 속에 소세지를 넣어 머스터드를 뿌려 먹는 브라트 우어스트(Bratwrust)가 땡겨 한입 베어 문다. 자, 이제 그토록 고대하던 빅텐트로 들어갈 시간이다.


단출한 차림으로 들어간 곳은 파울라너 텐트였다. 옥토버페스트에는 6개의 맥주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학커-프쇼(Hacker-pschorr), 파울라너(Paulaner), 슈파텐(Spaten), 아우구스티너(Augustiner), 뢰벤브로이(Löwenbräu),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äu), 뮌헨에 양조장을 가지고 있는 이 브랜드들은 자신들만의 빅텐트를 세울 수 있으며 옥토버페스트에 독점적으로 맥주를 공급한다. 다른 텐트를 마다하고 파울라너로 들어간 이유는 전문가적 궁금증 때문이었다. 옥토버페스트 시즌이 되면 한국에도 이 파울라너 옥토버페스트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한국의 맥주와 현지의 맥주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텐트에 들어가기 전, 나는 아직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텐트 속 풍경은 이내 이성이란 천사를 머릿속에서 쫓아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규모의 텐트, 수 천명의 사람들, 옴파(oom-pah) 브라스 밴드가 연주하는 올드 팝송들 그리고 얼추 예닐곱 개는 돼 보이는 맥주잔을 들고 움직이는 여성 서버의 모습은 어른판 찰리 초콜렛 공장과 다름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 아니 초현실적이었다.

파울라너 빅텐트 (출처 : 윤한샘)

수 십 명이 앉아있는 긴 테이블 사이의 빈자리에 어색하게 앉아 맥주 주문을 했다. 13.95유로, 1리터 잔을 의미하는 마스(mass)에 담긴 옥토버페스트 맥주의 가격이었다. 생각보다 비싸다는 말을 중얼거릴 찰나, 마스에 담긴 맥주가 눈 앞에 놓였다. 드디어 고대하던 찐 옥토버페스트 맥주를 마실 순간이 온 것이다. 처음이니 가볍게 한 모금 하려는데 수 천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아인 프로지트, 아인 프로지트 (Ein Prosit)


브라스 밴드의 반주에 맞춰, 모든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고 몇몇은 호기롭게 테이블 위로 올라가 맥주를 원샷을 하고 있었다. 아인  프로지트는 건배라는 뜻이다. 이 양반들아, 이거 1리터라고! 노래가 끝나기 전, 원샷을 못한 탈락자들이 속출했고 사람들은 이런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휴지와 쓰레기를 루저들에게 주저 없이 던지고 있었다. 그 순간, 텐트 안의 규칙을 이해했다. 권주가가 불리는 동안 일종의 원샷 챌린지가 펼쳐졌던 것이다. 아니, 이건 한민족의 문화 아니던가.


안암동에서 학교를 다녔던 난 막걸리 찬가가 끝나기 전, 막걸리를 한 번에 마시는 사발식 문화에 익숙했다. 물론 술이 약한 나에게 이 문화는 너무 고역이었다. 하지만 주위에 막걸리와 맥주 1리터를 목에 털어 넣는 외계인들을 꽤 많이 봤기에, 이는 한국인들의 종특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문화가 옥토버페스트에 있는 것이다.


원샷을 부추기는 권주가는 수시로, 틈을 주지 않고 이어졌고 점점 주술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이 노래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술잔에 손이 가 있었다. 사실 원래 계획은 이랬다. 6개의 빅텐트를 방문해 그중 3개의 맥주를 마시고 모든 텐트의 분위기를 체험하고 오는 것, 그리고 3개 맥주의 차이점을 기억하고 오는 것, 이게 혼자만의 옥토버페스트에서 내가 계획한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


옥토버페스트 맥주는 라거 맥주로 축제를 위한 한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옥토버페스트 맥주 스타일을 만든 이는 가브리엘 폰 제들마이어(Gabriel von Sedlmyr)다. 그는 프란치스카너 오너 요제프 제들마이어의 아들로  1871년 비엔나 라거에 영향을 받아 ‘우어 메르첸(Ur-Märzen)’을 출시했고 이 맥주는 옥토버페스트 공식 맥주가 되었다. 설에 의하면 당시 둔켈이라는 어두운 맥주가 주로 축제 맥주로 팔리고 있었는데, 새로운 스타일인 메르첸이 등장하며 축제 맥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난 1871년이라는 우연에 살짝 음모론적 시각을 가져본다. 독일 통일과 함께 출시한 맥주가 옥토버페스트 맥주가 된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파울라너 옥토버페스트 맥주 in 마스 (출처 : 윤한샘)

메르첸은 캬라멜 아로마, 약간의 단맛, 조금 무거운 바디감을 가지고 있는 라거로, 축제를 위해서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축제를 위한 맥주는 두 가지에 충실해야 한다. 많이 마시게 할 것 그리고 기분을 좋게 만들 것. 그래서 축제에 제공되는 메르첸은 단맛을 조금 낮추고 알코올을 약간 높였는데, 이 특징은 곧 옥토버페스트 맥주 스타일로 굳어졌다.  옥토버페스트 맥주 라벨에 종종 메르첸이라는 단어도 함께 볼 수 있는 이유는 두 맥주가 본질적으로는 같기 때문이다.


6개 축제 맥주의 차이점을 구별해내는 건 개인적으로 중요한 관심사였다. 옥토버페스트를 매년 올 수는 없는 터, 기회가 있을 때 현지에서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권주가가 두어 번 돌자 옥토버페스트 맥주의 차이점을 분석하고자 했던 나의 원대한 계획은 이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옆 사람들과 친해진 지는 이미 오래, 시도 때도 없는 건배에 내 앞의 마스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파울라너 텐트의 모든 사람들은 맥주와 분위기에 미쳐있었다. 독일 중년 부부, 미국에서 온 아디다스 직원들 그리고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까지 우리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옆 테이블을 보니 어느 한 남자가 엉덩이를 까고 춤을 추고 있다. 이제 이 텐트를 나가야 할 때가 온 듯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맥주가 마치 꿀물과 같이 느껴졌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두 잔, 2리터의 맥주를 마셨다. 이미 주량의 한계치에 가까웠다. 취했냐고? 전혀 아니다. 숙취 약을 탄 것도 아닐진대 정신은 말짱했고 심지어 더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텐트도 가야 한다. 다행히 아직 이성이 나를 버리진 않았다.


뮌헨 맥주를 대표하는 슈파텐, 사자 로고가 매력적인 뢰벤브로이 텐트를 지나 두 번째 들어간 곳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뮌헨 맥주 브랜드인 아우구스티너였다. 이 텐트는 그나마 파울라너보다 침착했다. 물론 이내 처음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친구가 됐고 돌고 도는 권주가에 맥주잔을 비웠다. 두 잔, 정확히 두 잔을 더 마셨다. 2시간도 안돼 4리터를 마신 것이다. 주량은 한참 초과됐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면 괜찮다고 느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너 빅텐트에서 (출처 : 윤한샘)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난 아우크스부르크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다. 다행히 이성이 아직 붙어 있다. 만약에 뮌헨에 숙소가 있었다면 더 행사장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이 출국일이라 마지막으로 뮌헨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싶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언제 다시 이 곳에 올 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술도 깰 겸, 뮌헨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싶었다. 해가 막 질 때 즈음, 아우구스티너 브루어리 쪽 출구로 나와 중앙역 쪽으로 걸어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뮌헨의 밤을 눈에 담으며 순간을 만끽하고자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밤의 끝이 아름답고 행복할 거라 생각했다. 중앙역에는 늦게까지 아우크스부르크행 기차가 있었고 필요하면 아우크스부르크 역에서 호텔까지 걸어갈 수도 있었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에 대한 아쉬움은 그렇게 달래면 된다.


문제는 뮌헨 중앙역에서 먹은 동남아 쌀국수였다. 점심부터 술만 먹었기에 속이 허했다. 이 순간 한국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국물 아니던가. 역 안에 있는 동남아 식당에 가격과 맛이 괜찮은 베트남 쌀국수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다 순간적인 배고픔을 못 참고 국물까지 싹 비워버렸다. 그리고 지옥은 그렇게 시작됐다.


기차를 타고 순식간에 몰려오는 피로감에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러다 순간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 좋다. 많이 안 좋았다. 이성은 기차 내 화장실로 가던가 가까운 역에 내려서 이 불편함을 해소하라고 하고 있었다. 망할 귀차니즘. 왜 그랬을까? 참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오기가 이성을 쫓아냈다. 하지만 몸은 더 이상 못 버틴다며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어떤 역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음 역에서 내린 후, 난 화장실을 찾을 여력도 없이 기차가 없는 플랫폼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기차가 떠나자 빈 기찻길에 난, 모든 불편함을 쏟아내고 말았다. 정말 모든 것을. 얼마나 지났을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피함이 온몸을 엄습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다. 작은 역이었고 플랫폼은 어두웠다. 그리고 비도 내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 난 정신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처참했다. 이것이 내 생애 처음인 옥토버페스트의 말로란 말인가.


어느덧 비가 꽤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다음 기차는 30분 뒤면 도착 예정이다. 추위와 숙취에 떨며 자책 모드에 들어갔다. 이제 남은 마지막 목표는 단 하나, 아무 일 없이 숙소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이다. 모든 말초 신경을 다음 기차와 내릴 역에 집중했다. 가까스로 도착한 아우크스부르크에도 비가 내렸다. 숙소까지 걸어가는 낭만은 사치였다. 택시를 타고 호텔 입구에 도착한 후, 난 기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이내 내일 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너무 긴 하루였다.

옥토버페스트 광경 (출처 : 윤한샘)

2020년, 축제가 사라졌다. 코로나는 옥토버페스트도 멈추게 했다. 꼭 다시 돌아가 아픈 기억을 덮을 만큼 좋은 추억을 만들고자 했던 계획도 무기한 연기됐다. 다음 옥토버페스트는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가고 싶었다. 맥주 축제가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함께 느끼고 싶었다.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민족과 인종을 초월해 맥주 아래 소통을 하고 벽을 허무는 원시적인 경험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였다. 축제는 이래야 한다. 그리고 맥주는 그 안에서 우리를 연결시키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꿈은 연기됐다. 인생은 항상 이렇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것 같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 3년 전 옥토버페스트를 가야겠다는 순간의 결심이 지금 와선 평생 바꿀 수 없는 추억을 선사했다. 옥토버페스트 맥주의 기억은 꿀물과 불편함, 두 극단으로 남아있지만 평생 가슴속에 간직될 것이다.


만약 옥토버페스트에 한번 더 갈 수 있다면, 도장깨기를 하고 싶다. 텐트 안에 모여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노는지 보여주고 싶다. 흥이 라면 누구에게 지지 않는 한민족 아니던가. 맥주 분석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빅텐트를 하나씩 격파하며 진짜 재미있게 노는 것, 죽기 전 다시 갈 옥토버페스트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같이 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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