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맥주 대회 심사위원이 되다
맥주 대회가 열리는 군델핑엔(Gundelfingen)의 늦가을 공기는 차지만 싱그러웠다. 뮌헨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이 작은 도시는 아름다운 도나우 강을 품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도시는 늦잠을 자고 있는 듯 조용했지만 남동쪽 창고에는 활기찬 기운이 돌고 있었다.
‘캄바 올드 팩토리’(Camba Old Factory)였다.
캄바는 세계적인 양조 장비 회사 브라우콘(Braukon)이 설립한 자회사로 다양한 맥주를 통해 독일 크래프트 씬을 이끌고 있는 브루어리다. 캄바 올드 팩토리는 소규모 양조장과 레스토랑, 팬샵을 운영하고 있는 캄바의 아지트였다.
이 오래된 창고는 캄바의 정체성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실험적인 맥주가 탄생하는 인큐베이션이었고 양조장이 필요한 사람에게 시설을 대여해 주는 기회의 공간이기도 했다. 수 십개의 맥주와 음식을 판매하는 힙한 레스토랑이 되기도 했으며 지역의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공동체 공간이기도 했다. 매년 캄바는 독일 홈브루어, 즉 취미로 맥주를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대회를 주최하는데, 오늘 캄바 올드 팩토리가 북적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L원장님과 나는 이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았다. 오랜 친구이자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비어소믈리에인 H가 독일 홈브루잉 대회 심사위원을 제안했을 때 살짝 망설였다. 이 대회는 한국에서 심사했던 맥주 대회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는 물론 독일 전역의 프로 양조사들이 만든 맥주들이 출품될 뿐만 아니라 모든 소통을 독일어로 해야되고 심사 룰도 캄바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지역색이 뚜렷한 대회였다.
전주에서 열리는 전국 김치 대회에 독일 사람이 김치를 심사한다고 상상해보라. 푸른 눈의 이방인이 전국에서 만든 김치를 심각한 표정으로 시식하며 갓김치가 어떻네, 총각김치가 저렇네 하면 흥미롭기는 하겠지만 의심스러운 시선도 거두기 힘들겠지. 이번 심사는 나에게 이런 뉘앙스로 다가왔다. 솔직히 배타와 텃새에 대한 두려움이 무엇보다 앞섰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평생 한 번 가볼까 한 도시에서 독일 홈브루어들이 만든 맥주를 심사할 수 있는 특권을 누가 가져볼 수 있을까? 맥주 환자로서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주눅 들 필요도 없었다. 독일인들보다 맥주에 늦게 눈을 떴을 수는 있어도, 수년 간 다양한 맥주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고 이미 한국에서 심사위원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말고, 배우는 마음을 갖는다면 충분히 즐기고 올 수 있으리라.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L원장님과 함께 있으니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듯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캄바 올드 팩토리’ 표지와 함께 허름한 창고 건물이 보였다. 길게 이어진 입구를 지나 주차장에 들어서니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여러 대의 캠핑카들이 눈에 띄였다. 주위에는 맥주병과 소형 케그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잠이 덜 깬 듯 한 사람들이 슬금슬금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전날 밤 크게 한 잔들 하신 게 분명했다. 이 대회를 위해 전날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당일 오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참가자들이 하루 전부터 캠핑을 하며 자신들만의 전야제를 벌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리로 이끄는 것일까?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대회는 다른 맥주 대회에서 찾을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희뿌연 연기가 가시지 않은 캠핑 사이트를 뒤로 하고 입구에 들어서자 마리온이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겼다.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금발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나흘 전 뮌헨에서 열린 세계 비어소믈리에 대회(5th World Championship of Beersommelier)에서 만난 사이였다. 이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나는 마리온을 비롯한 다른 오스트리아 대표들과 이미 즐거운 시간을 보낸 터였다.
브라우콘과 캄바에서 일하고 있는 마리온은 캄바 올드 팩토리 구석구석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다소 초라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내부는 2000리터 발효조를 구비한 정식 양조시설과 레스토랑 그리고 팬샵까지 맥주에 관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공간을 잘 사용하는 독일 특유의 인테리어 덕분에 심플한 매력이 있었다. 수 십 개의 탭과 맥주 메뉴가 보이는 탭룸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고 그 앞에는 긴 테이블과 의자가 줄을 맞춰 정렬해 있는 비어가든도 있었다. 캄바 올드 팩토리는 모든 맥주 환자들이 꿈꾸는 놀이터였다.
미니 투어를 마치자 마리온은 우리에게 맥주 세 잔과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쿠폰을 건넸다. 심사위원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다. 심사를 위해 마시는 맥주와 좋아서 마시는 맥주는 다르다. 맥주 심사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주어진 시간에 맥주의 거품, 색, 탄산, 향, 맛, 바디감, 질감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후, 밸런스와 완성도를 판단해야 한다. 이취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잡아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심사위원들과의 토론을 통해 순위를 가려내야 하기에 맥주에 대한 기준과 식견 그리고 철학도 필요하다. 그러니 당연히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 채 마시는 맥주와 즐기기 위해 마시는 맥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세 장의 맥주 쿠폰은 고된 노동에 대한 작은 선물이었다.
갑자기 탭룸 뒤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긴 책상을 ‘ㄷ’자로 붙이며 각자 가져온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출품한 맥주를 소개하고 함께 시음하는 공간을 만들고 있던 것이다. 왁자지껄 흥겨운 분위기 속에 이미 맥주 한 두잔은 걸친 듯 보였다. 맥주 홍보 문구를 테이블에 붙이는 사람, 만들어 온 맥주를 나눠주기 위해 간이 디스펜서를 놓는 사람 그리고 병에 담긴 맥주를 차가운 얼음에서 꺼내 시음을 준비하는 이도 있었다.
쾰른에서 온 한 브루어는 아이스박스를 이용한 간이 서빙 장비를 두고 주위 사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자신은 꽤 쿨하다고 생각했지만 주위 동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맥주 장비를 두고 옥신각신 하는 모양은 진정한 맥주 환자들 다운 모습이었다. 맥주와 장비를 놓고 토론도 하고 장난도 치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분위기가 생경했지만 좋았다. 진정한 크래프트 정신이 묻어 나는, 맥주 환자들이라면 갈구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심사 장소로 들어가려던 찰나, 의자에 앉아 계신 긴 흰 수염의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자신의 캐리커쳐가 그려진 비어코스터와 직접 만들어 출품한 맥주들이 놓여 있었다. 영어 소통이 힘들어 많은 이야기는 못했지만 아마추어 양조사로서 오랜 시간 맥주를 만들어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순간 세월의 흔적은 사라지고 젊은 사람 못지않은 진심과 열정이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맥주를 권하셨지만 심사위원들은 심사 전에 참가자들의 맥주를 시음할 수 없다. 아쉬운 마음과 인사를 뒤로 하고 심사 장소로 발길을 돌린다.
내가 저분의 나이가 되더라도 맥주로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미묘한 울컥함이 밀려왔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심사 장소는 메인 장소와 완벽히 분리된 공간에 마련되었다. 넓지는 않았으나 커다란 창이 늦가을 화창한 햇살을 드리우고 있어 쾌적했다. 한쪽으로는 심사위원 명패가 있는 5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L원장님은 2조에 나는 마리온과 3조에 배정되었다. 우리가 속한 조는 기본적으로 영어가 가능한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테이블 위에는 영어 심사지도 보였다. 우리를 위해 따로 준비한 것이다. 독일에 비해 맥주 후진국에서 온 우리를 편견 없이 동등하게 대하는 모습과 세심한 배려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프로페셔널하게 심사를 하는 것이 이들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을 하니 우려했던 텃새에 대한 걱정도 사라졌다.
심사는 총 3라운드로 예정되었다. 첫 라운드에서 통과된 맥주가 두 번째 라운드로 올라가고 컷 오프 방식으로 파이널까지 가는 방식이었다. 맥주 스타일에 따른 카테고리 별로 심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라면 이 대회는 카테고리 구분 없이 맥주 하나하나를 단독 평가 후 탈락 유무를 정하는 룰로 진행되었다.
우리 테이블 캡틴은 마리온이었다. 유창한 영어로 심사 순서와 룰을 설명한 그녀는 바로 첫 라운드를 시작했다. 제시된 맥주를 시음한 후 심사지에 평가 항목을 표기하고 의견을 적은 후, 캡틴의 주도 하에 각 맥주에 대한 토론이 진행됐다. 나 또한 스타일 적합도와 완성도, 오프 플레이보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토론에 참가했다. 심사위원들도 동양에서 온 남자의 말을 집중하며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때론 공감하고 때론 치열하게 논쟁하며 서로의 의견을 조율해 나갔다.
맥주들은 훌륭했다. 홈브루잉다운 다양하고 독특한 맥주들이 많았지만 모두 스타일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본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단단한 기본기는 브루어들의 개성과 기발함을 만나 때로는 수려하게, 때로는 임팩트 있는 모습으로 코와 혀를 즐겁게 했다. 미세한 부분으로 평가가 갈리기는 했으나 70% 이상의 맥주들은 상업 맥주로 바로 판매해도 될 만큼 수준이 높았다.
두 번째 라운드 심사가 끝난 후 맞은 잠시 동안의 휴식시간. 바우처를 들고 심사장 밖으로 나가 본다. 캄바 올드 팩토리 안은 이미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홈브루잉 맥주는 물론 수 십 개의 캄바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이 곳은 맥주 천국이었다. 파이널 심사가 남아있어 제한된 맥주와 음식만을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맥주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니 심사로 인한 피로와 긴장이 날아갔다. 유일한 동양인인 우리를 바라보는 어색한 시선도 어느덧 평범하게 바뀌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총 10명의 심사위원이 파이널 라운드를 위해 결정되었다. 각 라운드를 뚫고 올라온 20개의 맥주들은 당연히 훌륭했다. 모두 각자의 매력으로 자신을 어필하고 있었다. 파이널 라운드 맥주들은 심사위원 개개의 평가와 의견이 더 중요하다. 자잘한 문제들은 이전 라운드에서 필터링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시음한 맥주들도 있었기에 더 신중한 토론 속에 신속하게 평가가 마무리되었다. 최종 평가지가 제출된 후, 점수 합산을 위한 주최 측 사람들만 제외하고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오후 12시에 시작된 심사는 5시가 돼서야 마무리되었다.
“자유네요!” 후련했다.
“네, 이제야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L원장님도 한껏 여유로운 표정으로 탭룸에서 맥주를 받고 있었다.
“오늘 대회는 맥주 문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가져가네요.”
“그러게요. 맥주 대회가 단순히 맥주를 평가하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고 지역민들이 모여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아갑니다.” L원장님 또한 나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잠시 후, 브라우콘과 캄바의 대표인 마쿠스가 마이크를 잡았다. 대회에 참여한 홈브루어와 참관인 그리고 심사위원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 대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된 목소리로 전하고 있었다. 곧이어 수상자가 하나씩 호명되자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상장과 함께 홈브루잉 용품이 부상으로 주어졌다. 수상자들은 기쁨 가득한 얼굴로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자부심과 행복, 환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영예의 대상은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출품한 중년의 남성에게 돌아갔다. 이 맥주는 첫 라운드부터 우리 테이블에서 심사한 맥주였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임페리얼 스타우트였지만 과하지 않고 밸런스가 훌륭했기에 누구나 즐겁게 마실 수 있는 맥주였다. 크레이지하지는 않았지만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진 맥주가 이번 대회의 1등을 차지한 것이다. 그는 순수한 아마추어 브루어였다. 내 맘대로 만든 맥주가 대상을 탈 줄 몰랐다며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함께 한 이 순간을 그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평생 이 장면을 기억하겠지.
캄바가 주최하는 홈브루잉 대회는 독일에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대회는 상업 양조자는 물론이고 순수 아마추어들이 참여한다. 캄바는 수상된 맥주의 레시피를 정식으로 구매하는 보상을 하지만 이 대회의 가치는 이런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심지어 맥주를 심사하기 위해 이 작은 도시로 달려온 심사위원에게 소정의 거마비도 지원되지 않는다. 캄바의 스페셜 맥주 한 병과 식사 바우처가 유일한 심사비다. 그렇다고 아무나 이 대회의 심사위원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독일 맥주업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전문가들만이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을 수 있다.
도대체 왜 이들은 금전적 보상도 없이 수 백 킬로를 달려와야 하는 이 대회에 기꺼이 참석하려고 하는 걸까?
그 답은 캄바 올드 팩토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직접 제작한 장비를 자랑하는 쾰른 출신 브루어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몇 년째 이 대회에 맥주를 출품하고 있다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미소와 여유를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다. 지위, 나이, 인종, 성별에 상관없이 맥주 하나에 모두 행복해하고 있었다. 출품자와 심사위원 그리고 먼 곳에서 방문한 일반인에게 이 대회는 맥주로 힐링하는 축제였다. 홈브루잉 맥주를 매개로 소통하는 시간과 공간, 이것이 바로 이 대회의 가치였다. 독일 맥주 또한 고루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더 높은 곳을 향해 나래를 펴고 있었다.
오늘 대회에서 유일하게 안타까운 점은 우리 숙소가 여기서 1시간 거리인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 머물고 싶었지만 기차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훌륭한 맥주와 음식, 무엇보다 이번 기회를 통해 만난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움이 가득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들처럼 우리는 문을 나서는 내내 포옹과 인사를 하며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에 이 자리에 다시 온다면 맥주와 친구들이 나눠 준 기쁨과 에너지 때문이리라.
그땐 아우크스부르크가 아닌 군델핑엔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숙소를 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