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장에서 맥주 신의 가르침을 얻다
나는 만드는 것에 서툴다. 학창 시절에는 미술에 소질 있는 친구들이 신기했고 군대에서는 작업을 잘하는 동료들이 부러웠다. 재료만 있으면 무언가 만들어내거나 기계를 착착 고치는 모습은 나에게 신들의 경지였다. 그런데 여태까지 나의 달란트는 이들과 다른 곳에 있다고 믿고 있던 내가, 지금 양조 장비를, 그것도 누구의 도움 없이 만지려 하고 있다.
"하..."
쨍하니 빛나는, 정돈된 듯 복잡한 스테인리스 관들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나란히 달려있는 은색 레버들은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듯 차가웠고 조작 패널 위 반짝이는 디지털 숫자들은 비웃는 듯 깜빡였다. 지금이라도 포기할까, 나는 커다란 빨간색 비상 버튼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상업 양조 첫날, 오랜만에 느껴보는 막막함이다. 맥주는커녕, 사고만 안치면 좋으련만. 다른 술과 달리 승온과 끓임 그리고 냉각을 거쳐야 하는 맥주는 양조 프로세스와 장비에 익숙해야 한다. 작은 실수 하나가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솔직히 내 몸보다 장비가 고장 나는 것이 더 두려웠다. 양조 장비의 고장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 비즈니스가 끝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럼 내가 완전 초보냐, 당연히 아니다. 나는 맥주를 취미로 만드는 홈브루어이고 한국맥주문화협회장으로서 다양한 맥주 강의를 하는 선생이다. 심지어 이곳은 양조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적도 있는, 나름 익숙한 장소였다. 하지만 홀로 장비 앞에 서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금부터 만드는 맥주는 돈 받고 팔아야 하는 맥주다. 맥주가 나오지 않거나 나온 들 맛이 없으면 큰 낭패였다.
생각할수록 어제 일이 기가 막혔다. 사실 오늘을 위해 양조 경험이 많은 동생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고성에 있는 문베어 브루잉에서 수년간 양조사로 근무하다 막 퇴사한 참이었다. 다섯 번 정도 함께 양조를 한 후, 장비와 프로세스에 익숙해진 뒤, 홀로 만들어볼 요량이었다. 많은 양조사를 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오누이처럼 지낸 사이라 스스럼없이 부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이 생겼다는 전화가 왔다. 그것도 함께 양조하기로 한 바로 전날. 오랫동안 아이를 바랐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기뻐했지만, 전화를 끊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맨 땅에 헤딩하라는 하늘의 뜻이구나..."
가장 큰 문제는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맥주는 데이터의 술이다. 양조사는 자신이 만드는 맥주의 색깔, 쓴맛, 향미, 탄산의 정도를 숫자로 디자인하고 양조 과정을 통해 맥주로 구현하는 전문가다. 초기 물의 양과 온도, 곡물이 머금고 있는 물의 양, 쓴맛과 향을 위해 넣어야 하는 홉의 종류와 양, 발효에 필요한 적정한 효모의 양, 최적의 발효 온도 등등을 기록해야 한다. 양조장마다 장비가 다르기에 환경에 맞는 데이터는 필수다. 복잡해 보이지만 초기 데이터를 잘 정리만 해놓으면 나중에는 경험을 통해서 전체 프로세스를 조절할 수 있다.
독립맥주공장의 장비도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 장비로 말할 거 같으면 도심 속 양조장 중 가장 작은 사이즈라 단언할 수 있다. 양조 편의성은커녕 좁은 공간에 밀도 있게 여러 장비를 밀어 넣어 자칫하면 폐쇄 공포증을 경험할 수도 있다. 게다가 모든 제어는 수동이라 양조자가 직접 레버들을 개폐하고 적당한 타이밍에 스위치를 온오프 해야 한다. 말 그대로 진짜 '수제'인 것이다.
맥주 양조는 온수 탱크, 당화조, 끓임조, 냉각장치 그리고 발효조까지 타이밍에 맞춰 맥즙의 방향과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다. 독립맥주공장에서 이 모든 것은 양조자가 조작하는 레버들의 상관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것이 수동이기 때문에 세심한 온도 컨트롤이나 물 조절이 쉽지 않다. 즉, 매 단계마다 양조사의 용의주도함은 필연적이다. 독립맥주공장 장비에 '디지털'이란 분에 넘치는 단어다.
일련의 데이터가 없다면 맨 땅에 헤딩을, 그것도 수 차례 해야 한다. 오랜 상업 양조 경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 아니겠으나, 장비의 이름과 레버의 용도를 완벽하게 익히지 않은 나에게는 꽤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모든 것에 익숙하고 데이터를 축적한 지금이야 휘파람을 불며 여유를 부릴 수 있지만, 그때는 10개가 넘는 레버들을 보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물론 본 양조 전에 물을 이용해 시험 운용도 했고 여러 번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어느 정도 순서는 외워놨지만 막상 레버를 손에 잡자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왜 항상 불안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 걸까? 역시 처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맥아에서 당을 추출하는 당화 단계는 일정한 온도 유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온도계 숫자가 설정 온도보다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물의 온도가 더 높았어야 했던 것이다. 곡물 찌꺼기를 걸러내는 여과 단계에서는 펌프 속도를 못 맞춰 시간이 두 배 이상 걸렸다. 당이 알맞게 추출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당도계를 켰을 때는 배터리가 없었고 곡물 찌꺼기를 치울 때는 온 사방이 찌꺼기와 당물로 끈적이고 질척거렸다. 간만에 100킬로 넘는 곡물 찌꺼기를 치우느라 땀범벅이 된 얼굴과 아픈 허리는 덤이었다. 그래도 육체적 고통은 견딜만했다. 하지만 집 나간 멘탈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으며 당이 추출된 물, 즉 맥즙을 끓임조에 옮겼다. 이제 반이 끝났다. 지금부터 맥즙을 끓여야 한다. 맥주의 쓴맛과 향을 내기 위한 홉이라는 식물을 이 단계에 넣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흰 수증기와 함께 식혜와 콩에서 나는 야릇한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팔팔 끓는 맥즙에 홉을 넣자 아담한 양조장에 향긋한 향이 가득하다. 홉 아로마 테라피를 받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온몸은 땀에 젖어있고 장화 안은 축축했지만 멘탈이 돌아오면서 정신이 맑아지고 있었다. 여전히 비현실적이었으나 그래도 큰 사고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감이 마음 한 구석에 밀려왔다.
이 끓임이 끝난 후, 냉각기를 거쳐 맥즙을 발효조로 이송하면 총과정의 95%는 끝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만약 뭐 하나라도 잘못해 효모가 발효를 못하면 지금까지 모든 노력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는 이유다.
"삐빅, 삐빅, 삐빅"
60분을 맞추어놓은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끓임 버튼을 끄고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한 월풀을 시작했다. 이제 냉각기를 통해 맥즙을 발효조로 이송하기만 하면 된다. 사실 상 마지막 고비다. 발효조와 냉각기를 호스로 연결하고 이송 레버를 열었다. 큰 숨을 들이쉰 후, 펌프 스위치를 누르자 맥즙이 흐르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온도와 속도. 적절한 발효 온도를 위해 끊임없이 온도계를 체크해야 한다. 그리고 너무 늦게 옮겨지지 않도록 펌프 속도 조절도 필요하다.
호스에 연결한 사이드 글라스를 보자 약간 투박한 황금색 액체가 발효조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온도는 25도, 적당하다. 이송 속도는 살짝 느렸지만, 이는 나의 선택이었다. 장비가 고장 나지 않기를 바란 초보 양조사의 계획을 위한 마지노 선이랄까.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든 맥주가 나오게 하는 것이니까.
드디어 이송이 끝났다. 발효조 뚜껑을 열자 향긋한 홉향과 달큰한 맥아 향이 물씬 느껴졌다. 제발 문제없이 맥주만 나오게 해 주소서. 맥즙 위로 효모를 흩뿌리며 나도 모르게 기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효모를 향한 응원도 잊지 않았다. 힘을 내, 이 작은 친구들아.
효모 투입을 마치자 그제야 양조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호스들, 홉과 효모가 남아있는 계량 컵들, 무엇보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장비들은 전쟁터 같았다. 긴장이 풀린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이제 정리와 청소를 해야할 시간이다. 맥즙은 당물이기에 약간이라도 남아있으면 미생물의 좋은 먹이가 되기에 청소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양조 프로세스다. 한바탕 전쟁 같던 하루가 지나자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지, 원래 맥주는 이런 순간을 위한 음료였지.
때로는 나이 먹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불혹을 넘긴 세월은 불안과 짜증으로 범벅된 이 모든 과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했다. 바닥을 치는 경험과 고통스러운 배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이제는 이해하기 때문이리라. 분명한 건, 시간은 약이고 땀은 배신하지 않는 것. 이런 인생의 진리를 이 좁디좁은 양조장에서 다시 깨닫다니, 8000살 넘은 맥주 신의 가르침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