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의 문화를 품고 있는 짠맛 나는 맥주
한국에서 왔다고요? 고제 때문에 왔다니, 당신도 맥주에 제대로 미친 사람이군요
검은 옷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맥주잔을 건네며 황당한 듯 쳐다봤다. 관광객은 잘 찾지 않는, 게다가 동양인은 거의 오지 않는 작은 맥줏집에 온 내가 신기했나 보다. 하지만 이곳을 찾은 목적과 그간의 노고를 설명하자 이내 밝은 얼굴로 짙은 황금색 맥주를 건넸다. 이 맥주의 이름은 리터구츠 고제(Ritterguts Gose), 그리고 이곳은 오네 베덴켄(Ohne Bedenken), 마지막 남은 라이프치히의 고젠쉔케(Gosenshenke)다.
고제는 짠맛이 나는 독일 라이프치히 전통 맥주다. 아니, 이온음료도 아니고 맥주에서 짠맛이 난다고?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대답은 ‘그렇다’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라이프치히 맥주의 고향이 약 150km나 떨어진 고슬라(Goslar)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나의 맥주가 아무 관련도 없는 두 도시의 맥주가 된 것일까?
고슬라는 독일 중북부 로월 섹소니에 위치한 도시다. 이 도시 중심에는 암염과 미네랄이 풍부한 하르츠 산맥에서 내려오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다. 양조사들은 소금기를 머금은 이 강물로 맥주를 만들었고 고슬라의 맥주는 자연스럽게 짠맛이 났다. 이 강의 이름은 고제, 사람들은 고제 강물로 만든 이 독특한 맥주도 역시 고제라고 불렀다.
18세기 초 지역 사람들만 마시던 이 맥주에 한 외지인이 매료된다. 안할트 공국의 공작 레오폴트 1세는 100km나 떨어진 고슬라에서 이 맥주를 마신 후 사랑에 빠졌다. 고제와의 장거리 연애는 꾸준히 지속됐지만 점점 비용과 시간의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결국 레오폴트 1세는 1712년 직접 양조장을 짓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고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품질이 안정된 1738년, 근처 도시인 라이프치히에 고제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라이프치히는 예술과 철학의 도시였다. 라이프치히에서 생애를 마감 한 바흐는 지금도 성 토마스 성당에 잠들어 있으며 라이프치히를 ‘작은 파리’라 불렀던 괴테는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 다녔던 술집, 아우어바흐를 파우스트에 묘사했다.
평범한 맥주가 아니었음에도 고제는 라이프치히에 정착했고 조금씩 인기를 얻었다. 고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 도시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예술적 다양성을 포용하고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는 문화 아니었을까? 이런 라이프치히 문화가 고제를 당시 힙한 맥주로 만들었을 것이다.
고제는 곧 라이프치히의 최고 맥주로 등극한다. 여러 양조장이 생겼고 고제만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맥줏집, 고젠쉔케도 곳곳에 등장했다. 한때 80여 곳에 달하는 고젠쉔케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들어서도 이 흐름은 지속되었다. 본진인 고슬라는 벌써 라거에 의해 정복된 반면 라이프치히 고제는 끄떡없었다. 심지어 나폴레옹도 인정하고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이 견고한 고제 성벽 뒤에는 1824년 라이프치히 북서쪽 될니츠에서 태어난 리터구츠 고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리터구츠 고제를 만든 요한 고틀립 괴테케는 고제에 대한 거대한 꿈을 품은 사업가였다. 고슬라의 고제 장인 필립 레데만을 영입해 만든 이 고제는 맛과 품질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다. 순식간에 라이프치히 시장을 장악한 리터구츠는 프리미엄 맥주로 판매되었고 한때 100만 병의 판매고를 올릴 만큼 독점적 지위를 차지했다. 영국 에일도, 황금색 라거도 리터구츠의 명성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총탄은 달랐다. 전쟁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라이프치히 고제 성벽을 허물어뜨렸다.
20세기를 휩쓴 세계대전은 수많은 양조장을 짓밟았다. 리터구츠도 이 화마를 피해 갈 수 없었다. 1930년까지 마지막 고제로 남아있던 리터구츠는 1945년 독일의 2차 대전 패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고제를 더 큰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것은 독일 분단이었다.
1949년 독일은 유럽 열강과 소련에 의해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졌다. 곧 동독 정부는 양조장을 비롯한 사유재산을 금지하고 국유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은 생산의 효율화를 크게 떨어뜨렸다. 더 큰 문제는 획일화였다. 큰 브랜드 맥주는 생존했지만 작은 양조장은 합병되거나 없어졌다. 동독의 맥주는 단순해졌고 맛과 품질도 크게 하락했다.
자유와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자 라이프치히의 문화는 크게 추락했다. 맥주 순수령조차 건드릴 수 없었던 이곳의 맥주 문화도 빛을 잃었다. 1949년 한 때 리터구츠에서 근무했던 프레드릭 부즐러가 고제의 부활을 시도했지만 1966년 3월 13일 프롤리흐 호텔에서 판매됐다는 마지막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다. 자유에 대한 억압은 곧 맥주에 대한 억압이었다.
고제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는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은 맥주 세계에서 반드시 고제에 적용되어야 한다. 1985년 맥주 책 한 페이지에 전설처럼 전해지던 고제에 부활의 숨결이 스몄다. 동독 교수였던 로타 고드한이라는 사람이 불 타 폐허로 남겨진 고젠쉔케를 발견한다. 이 고젠쉔케의 이름은 ‘오네 베덴켄’, ‘주저하지 말고’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가진 곳이었다.
고젠쉔케 문화에 빠져 든 고드한은 고제를 부활시키기로 결심한다. 30년 동안 사라진 맥주의 정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우연히 프레드릭 부즐러에서 근무했던 사람을 만나 고제 레시피를 얻는 행운을 얻었다. ‘주저하지 않고’ 시작한 프로젝트가 ‘의심할 바 없는’ 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길은 험난했다. 1986년 고제와 오네 베덴켄은 부활했지만 동독 사회에서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동독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졌고 다양성이 사라진 라이프치히에서 고제는 이상한 맥주였다. 수년간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고드한은 사업을 접었다. 그가 고제를 만들기 위해 인수한 양조장도 문을 닫았고 오네 베덴켄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1990년대 중반 한 청년이 창고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이 만든 맥주를 시음하고 있었다. 한쪽 손에는 오래된 고제 레시피가 들려있었다. 그의 이름은 ‘틸로 야니헨’, 오네 베덴켄에서 고드한이 만든 마지막 고제를 마시고 겁도 없이 이 세계에 발을 들인 홈브루어였다.
1989년 동서독은 다시 하나가 된다. 라이프치히는 이 통일의 중심에 있었다. 동독 정부의 개혁과 자유를 위한 평화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 이를 바탕으로 독일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잿빛 도시’라 불리던 라이프치히도 서서히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틸로 야니헨 또한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으리라.
홈브루잉으로 고제를 만든 틸로 야니헨은 성공을 짐작했다. 하지만 상업 양조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행운이었을까. 고제의 흔적을 탐구하던 그에게 리터구츠 고제 양조장의 후손인 아돌프 괴테케가 나타났다. 이 둘은 리터구츠 고제의 부활에 뜻을 함께 하고 이 프로젝트를 위한 양조장을 물색한다. 그리고 독일 재통일 10주년이 되던 1999년, 사라졌던 고제가 오리지널 리터구츠 고제로 다시 세상에 돌아왔다.
리터구츠 고제는 오리지널 레시피에 따라 양조되지만 현대적인 재해석도 가미됐다. 고제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젖산 발효를 통한 신맛, 향신료에 의한 스파이시 그리고 옅은 짠맛이다. 과거에는 야생 발효를 통해 젖산균이 자연스럽게 관여했지만 지금은 상면발효와 젖산 발효가 함께 진행되는 혼합발효를 진행한다. 남부 바이에른과 달린 작센 지역은 전통적으로 고수 씨앗이나 허브 혼합물을 맥주에 넣었는데, 리터구츠 또한 이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핵심적인 요소인 소금은 암염을 사용한다. 하지만 상상과 달리 짠맛이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혀끝을 살짝 스치는 섬세한 짠맛이 있을 뿐이다.
재료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양조방식도 과거의 것을 이어가고 있다. 리터구츠 고제는 전통 양조 방식에 따라 오픈 발효를 하고 있다. 리터구츠 양조사는 오픈 발효 중 발생하는 거품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걷어내며 향미와 품질을 유지한다. 일반 양조장에서는 이 방식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틸로 야니헨은 6세대에 걸쳐 독일 전통 양조방식을 고수하는 라이첸브란트 양조장과 함께 리터구츠를 만들고 있다.
독일이 재통일 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오네 베덴켄으로 가는 길목은 옛 동독의 흔적이 남아있다. 육중한 검은색 아치형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한 때 라이프치히 맥주 시장을 지배했던 고제의 자취가 느껴졌다. 벽에는 오래된 고제 광고와 판매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오네 베덴켄에서 리터구츠 고제를 마시며 한 때 찬란했던 라이프치히를 떠올렸다. 동독의 일원이 되기 전, 이 도시는 예술가들의 영혼과 철학가들의 담론이 흐르던 곳이었을 것이다. 다른 도시였으면 짠맛 나는 리터구츠 고제를 이렇게 환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이프치히였기에 고제의 다름을 수용하고 자신의 문화로 체화시킬 수 있었으리라.
분단과 함께 사라졌던 고제는 독일 재통일과 함께 부활했다. 잿빛 도시 라이프치히는 현재 ‘힙지히’(Hypezig)로 재탄생하며 독일 문화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고제 또한 크래프트 맥주 문화에서 중요한 스타일로 떠올랐다. 라이프치히 오리지널리티를 간직한 리터구츠 고제는 이 모든 문화와 역사의 중심에 있다.
맥주가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품을 수 있을까? 의심하는 자여. 고제를 들고 외쳐보라. Goseanna(고제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