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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Jan 06. 2023

전복과 반전의 맥주, 버번 카운티

버번위스키와 임페리얼 스타우트의 치명적인 만남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오기를 바란다.

 
세계대전은 수 세기 동안 인류가 숭배했던 이성이라는 가치를 회의적으로 만들었다. 합리성과 효율성이 인류를 더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은 대량살상 무기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경험하며 무참히 무너졌다. 비이성과 폭력으로 얼룩진 20세기, 사람들은 신을 죽인 니체의 사상에서 새로운 해답을 찾았다.

19세기 후반 니체는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진정한 가치는 신이나 이성이 아닌 자신이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기존의 틀을 깨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어야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주창한 것이다. 그의 이런 사상은 20세기 후반 이성과 전통이 억압하고 있던 것들을 해체하고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진화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획일적인 것에 대한 반대, 다양한 문화에 대한 관용, 절대불변에 대한 저항 그리고 개별성에 대한 인정을 핵심으로 담고 있는 사조다. 다원성, 상대성, 탈전통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는 이종 간 결합과 탈장르화를 통해 문학, 예술, 음악, 건축에 영향을 끼쳤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파동은 맥주 세계에도 전파됐다. 1960~70년대 프랑스 68 혁명과 보헤미안 운동의 영향을 받은 양조사에게 세계를 뒤덮고 있던 황금색 라거는 대량생산을 통해 천편일률적으로 생산되는 기득권 맥주였다.


1980년 미국, 시에라 네바다, 스톤, 앵커 같은 작은 양조장들 위주로 다채로운 향미와 독특한 개성을 가진 맥주들이 출시된다. 맥주가 청량하고 깔끔한 황금색 액체라는 절대적 진리를 깨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전통에서 벗어나 사람, 지역재료, 지속가능성 같은 이야기를 맥주에 담았다. 여성의 권리와 인종차별 문제 심지어 정치 이슈를 말하는 맥주도 있었다. 사람들은 대량생산을 거부하고 다양성과 도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런 맥주를 크래프트 맥주라고 불렀다.

 
크래프트 브루어리들은 맥주 간 경계를 뛰어넘고 장르를 혼합하는 대범한 실험도 서슴지 않았다. 이 분야의 선구자는 구스 아일랜드였다. 구스 아일랜드는 버번위스키를 숙성했던 배럴에 맥주를 넣는 발칙한 시도를 하며 맥주 역사에 마일스톤을 남겼다. 맥주와 위스키가 창조하는 포스트 모던한 세계의 시작이었다.

 


시카고 크래프트 맥주의 시작, 구스 아일랜드

 
1988년 존 홀(John hall)은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구스 아일랜드라는 작은 브루펍을 오픈한다. 런던에서 경험한 펍 문화는 그에게 맥주 문화와 사업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영국에서 펍은 지역 사람들의 커뮤니티였고 맥주는 이들을 연결하는 수단이었다. 존은 자신이 직접 양조한 맥주를 통해 시카고에 영국 펍과 같은 문화를 만들고자 했다.

존 홀(John hall)

구스 아일랜드는 지역 사람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맥주를 선보였다. 그중 구스 IPA는 구스 아일랜드를 시카고의 간판 브루어리로 격상시킨 시그니쳐 맥주다. 5.9% 알코올과 향긋하지만 과하지 않은 홉 향은 시카고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구스 아일랜드를 전설의 반열에 올린 건 구스 IPA가 아닌 다른 맥주였다. 이전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충만한 도전정신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맥주, 버번 카운티(Bourbon County)였다.



버번위스키와 맥주의 치명적인 만남 
 

버번 카운티는 원래 미국 중동부에 있는 켄터키 주의 지역명이다. 우리에게는 켄터키프라이드치킨(KFC)의 고향으로 유명하지만 애주가들에게는 버번위스키로 더 알려져 있다. 버번위스키는 미국의 정체성이 그득한 술이다. 1960년대 미의회는 버번위스키를 ‘미국의 것‘으로 규정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르면 버번위스키는 크게 세 가지 기준을 따라야 한다.

버번위스키, 짐빔

먼저 위스키를 만드는 곡물에 적어도 51%의 옥수수를 넣어야 한다. 옥수수는 개척시대부터 미국에서 가장 풍부한 곡물 중 하나였다. 위스키 또한 과거 남아도는 옥수수를 소진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


위스키 숙성에 사용되는 배럴도 반드시 미국 오크나무로 만들어야 한다. 완성된 오크 배럴의 내부는 강한 불로 태워 향을 입힌다. 투명한 증류주 원액은 최소 2년에서 십여 년 동안 오크배럴 속에 머물며 색과 향을 얻어 버번위스키로 다시 태어난다.


미국산(Made in USA) 또한 버번위스키를 규정하는 중요한 테제다. 꼭 켄터키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위의 기준을 충족하고 미국 내에서 증류된 위스키라면 모두 버번위스키라는 명칭이 허락된다.


특별한 연결점이 없던 맥주와 버번의 만남은 2대 구스 아일랜드 브루마스터였던 그렉 홀에 의해 성사된다. 1000번째 양조를 앞두고 있던 그렉은 특별한 맥주를 만들고 싶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독특한 맥주를 고심하던 중, ‘맥주, 버번, 시가’라는 모임에서 우연히 전설적인 디스틸러이자 짐빔의 손자 부커 노를 만나 버번 배럴에 맥주를 숙성시키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한 번 사용된 버번 배럴은 버번위스키에 재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폐기되거나 스카치위스키를 숙성하는 목적으로 수출되곤 했다. 그렉과 부커는 이 부분에 착안했다. 다른 술에 향미를 입힐 수 있다면 맥주도 가능하지 않을까? 문제는 어떤 맥주가 버번의 짝으로 어울릴 것 인가였다.   


사실 이종 간 만남은 투쟁이다. 맥주가 버번을 담았던 통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맞서 싸울 힘이 필요하다. 버번의 강력한 알코올과 불에 그을린 오크 향은 맥주에게 가혹한 환경이다. 이 투쟁에서 진다면 맥주의 존재는 버번에 먹혀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맥주가 이를 극복한다면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모습이 될 수도 있다.

내부를 불로 태우는 오크 배럴

그렉은 직감적으로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떠올렸다. 버번의 높은 알코올에 맞서기 위해서는 맥주 또한 강한 알코올과 짙은 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버번 특유의 바닐라 향과 궁합도 맞아야 한다. 10% 알코올, 짙은 다크 초콜릿 향, 묵직한 바디감을 가지고 있는 임페리얼 스타우트야 말로 가장 적합한 맥주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구스 아일랜드는 1992년 세계 최초로 버번 배럴에 숙성된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출시한다. 그렉은 이 역사적인 맥주의 이름으로 버번위스키의 고향 버번 카운티를 헌정했다. 한정판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가능성을 본 구스 아일랜드는 1995년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맥주 대회인 GABF(Great American Beer Festival)에 버번 카운티를 출품했다. 결과는 탈락, 압도적인 향미를 가졌지만 익숙하지 않은 스타일과 풍미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였다. 세상은 아직 혁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던 것이다.

버번 카운티 2014 빈티지 @윤한샘

구스 아일랜드는 버번 카운티가 창조한 가치를 흘려보내지 않았다. 양조장을 분리해 독립된 장소를 마련한 후 본격적인 도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실패 속에서 마침내 버번 카운티는 ‘버번 배럴 숙성 맥주‘라는 정체성을 완성했다. 버번 카운티가 던진 작은 돌은 점점 큰 떨림이 되어 커져갔다. 많은 크래프트 브루어리들 또한 자신만의 버번배럴 숙성 맥주를 시도했고 현재는 가장 프리미엄 맥주로 인정받고 있다.
 


아름다운 투쟁의 결과물

 

오크 배럴과 버번 카운티 2015  @윤한샘

버번 카운티는 브랜디 잔이 적합하다. 반 정도 채운 후, 체온으로 온도를 올리며 즐겨야 한다. 잔 속에 담긴 버번 카운티는 고혹적인 흑색이다. 빛이 적절히 분산되는 투명도는 암흑의 우주 그 자체다.


진득한 다크 초콜릿과 섬세한 검은 과일의 향 그리고 중간부터 이어지는 구운 견과류, 쿠키 같은 향은 압도적이다. 이런 진한 몰트향은 맥즙을 4시간 이상 끓이며 나온 결과물이다. 우아한 바닐라와 오크향, 그리고 직선적이고 강건한 버번위스키 향도 밀려온다. 위스키의 알코올이 더해진 14%의 알코올은 뜨겁지만 불편하지 않다.


맥주의 쓴맛을 표현하는 IBU(International Bitterness Unit)는 무려 60이 넘는다. 보통 40이면 꽤 자극적인 쓴맛인데, 60이니 혀를 짜르르 울릴 정도로 쓰다. 그러나 묵직한 단맛이 이런 쓴맛의 날카로움을 다듬어 이내 균형을 맞춘다. 입 안을 꽉 채우며 비단과 같이 흐르니 한 모금씩 머금고 그 아름다움을 누리기에 충분하다.

버번 카운티 2015  @윤한샘

버번 카운티는 소리 없는 투쟁의 결과다. 배럴 켜켜이 배어있는 버번은 맥주와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온도에 따라 변하는 미세한 배럴의 틈으로 들어오는 산소와 습기도 버거운 존재다. 하지만 이 속에 대립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수용하고 때로는 인정하며 결합한다. 이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아름다운 화학적 결합을 바라며 그저 기다릴 뿐이다. 버번 카운티에 와인과 같은 빈티지가 붙는 이유다. 8~15개월 동안 치열한 투쟁을 잘 버텼다면 맥주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견고한 모습으로 진화한다.

 

니체의 관점으로 보면 스스로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버번 카운티는 초인의 맥주와 같다. 인간이 하지 못한 일을 맥주가 해내다니. 버번 카운티에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그래서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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