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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Jan 12. 2023

미국 건국 정신이 담긴, 사무엘 아담스 보스턴 라거

짐코흐는 20세기 부활한 사무앨 아담스와 같다.

만약 당신이 자유보다 부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보다 노예상태의 안온을 사랑한다면 조용히 우리를 떠나시오. 우리는 당신의 조언도 무기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무릎 꿇고 먹이를 주는 손이나 핥고 있으세요. 쇠사슬에 묶여 그렇게 살길 바랍니다. 후대는 당신을 우리 국민으로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1773년 5월, 인디언 분장을 한 60명의 남자들이 보스턴 항에 정박해있는 세 척의 배로 오른다. 이내 큰 함성과 함께 갑판에 있던 상자들이 바다로 떨어졌고 항구는 곧 검붉은 물질로 뒤덮였다. 이날 ‘자유의 아들’ 소속으로 밝혀진 무리들이 바다 위에 버린 것은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수입된 홍차 342상자, 지금 가치로 무려 20억 원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보스턴 차사건

‘보스턴 차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태는 영국의회가 동인도회사의 ’차 독점권‘을 승인하는 ’차세법‘(tea act)을 통과시키면서 발생했다. 차세법은 파산 위기에 있었던 동인도회사를 돕기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로 수출하는 차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를 부여한 법이었다. 당연히 식민지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기존에 차 무역을 하고 있던 사업가는 물론 영국의 일방통행을 반대하던 정치인들도 목소리를 냈다. 보스턴 차사건은 응축된 저항의 기운을 폭발시킨 기폭제가 되었다.


영국 정부도 이런 움직임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곧바로 ‘탄압법’을 제정해 식민지 메사추세츠에 대한 응징을 시작했다. ‘탄압법’은 메사추세츠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법이었다. 국왕이 직접 식민지 상원의원과 공무원을 임명했고 총독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정치 미팅을 제한했다. 식민지에서 범죄를 저지른 영국인들의 재판을 본토에서 받게 했고 심지어 영국 군인의 주둔을 위해 식량과 재산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도 있었다.


식민지민들은 더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774년 9월, 55명의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영국 정부에 대응을 논의하는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다. 미국 독립의 신호탄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이벤트의 뒤에는 사무엘 애덤스(Samuel Adams)라는 인물이 있었다.


미국 혁명의 아버지, 사무엘 애덤스

사무엘 애덤스

미국 독립을 이끈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새무얼 아담스는 1722년 메사추세츠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정치가였다. 맥아 공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사업보다 정치에 재능이 있었다. 특히 하버드 재학 시절에는 국가권력을 사회계약, 즉 법으로 제한하고 개인의 자유와 천부적 권리를 주장하는 존 로크의 사상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게다가 1743년 석사 학위 논문으로 영국 권위에 저항하는 합법성에 대해 쓰기도 했다. 졸업 후, 가업을 이어받지만 파산하자 사업을 모두 정리한 후 본격적인 정치가의 길을 걷는다.


1765년 꾸준히 영국 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던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일이 발생한다. 1756년부터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발한 7년 전쟁을 치룬 영국이 세수를 채우기 위해 설탕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설탕법은 아메리카 식민지로 들어오는 설탕, 와인, 커피 등에 관세를 부과하는 법이었다. 전쟁 후 마찬가지로 불황을 겪고 있던 식민지인들은 이 법이 가혹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오히려 영국 의회는 인지세법(1765년)과 타운센트법(1767년)을 잇달아 의결하며 식민지인들을 압박했다.


인지세법은 식민지에서 발행되는 모든 인쇄물에 인지를 붙여 그 수익을 본토가 가져간다는 법이었고 타운센트법은 차(tea), 납, 유리, 페인트 같은 공산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법이었다. 식민지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표자 없는 곳에 세금 없다‘라는 이론을 근거로 영국상품수입금지협회를 만들어 불매운동을 전개했고 시위대까지 조직해 물리적으로 항거했다.  


사무엘 아담스는 이런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시위대 ‘자유의 아들’을 이끌며 인지세법과 타운센트법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과 시위를 펼쳤고 보스턴은 점점 저항의 핵심지가 되어갔다. 결국 영국 정부는 인지세법과 타운센트법을 철폐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무거웠다. 1770년 영국 군대는 보스턴을 점령했고 주민은 물론 의회를 감시했다. 우연한 충돌로 보스턴 주민 5명이 군인에 의해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영국에 대한 적개심이 임계점에 달한 1773년, 결국 보스턴 차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오른쪽 위가 사무엘 애덤스다.

보스턴 차사건 이후 제정된 탄압법은 영국이 식민지의 자유와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무엘 애덤스는 식민지 정보 교환을 위해 조직된 통신위원회를 통해 영국에 저항하기 위한 모임을 주도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차 대륙회의는 식민지 의회가 아닌 식민지협의회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이 모인 자리였다. 이들은 조직적이고 강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공안위원회를 만들었고 이는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임시정부로 발전했다.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1775년 4월 9일 새벽, 마침내 영국군과 아메리카 민병대 사이에 첫 총소리가 울렸다.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곧이어 열린 2차 대륙회의에서는 조지 워싱턴을 수장으로 하는 대륙군이 창설되었다. 1776년 7월 4일에는 사무엘 애덤스를 포함한 12명의 대표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미국의 독립을 공표했다. 전쟁은 화력이 우세한 영국군이 쉽게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지속됐다. 대륙군은 끈질기게 버티고 버텼다. 이후 영국과 적대관계였던 프랑스가 개입하며 군수물자를 지원했고 결국 1781년 대륙군이 승리하며 미국은 주권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된 사무엘 애덤스

사무엘 애덤스는 독립 전쟁은 물론 미국 헌법 제정에 많은 기여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화주의는 익숙한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초기 미국 정부의 틀을 잡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설득과 노력이 필요했다. 독립을 쟁취한 미국이 헌법에 기초한 공화정을 완성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주지사를 역임한다. 그리고 1803년 10월 81세의 나이로 흙으로 돌아갔다.



보스턴,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또 다른 발상지


1984년 보스턴, 누군가 부엌에서 맥주 양조에 골몰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손으로 쓴 빛바랜 레시피가 놓여있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컨설팅 컴퍼니에 다니던 34살의 전도유망한 청년은 커리어를 포기하고 맥주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화려한 현재를 버리고 불투명한 미래를 선택한 이 남자의 이름은 짐 코흐(Jim Koch)였다.

짐코흐

짐 코흐가 맥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독일계 이민자였던 증조부부터 그의 집안은 대대로 양조자 집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당시 연봉 25만 달러를 포기하고 맥주 양조장을 한다고 하자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일’이라고 한탄했다. 양조사 출신이었던 그는 소규모 양조장이 사업적으로 얼마나 위험하고 도전적인 일인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미국 맥주 시장은 안호이저 부쉬, 밀러와 같은 몇몇 대기업으로 재편되고 있어 작은 독립 양조장의 생존은 요원해 보였다.


하지만 짐 코흐는 돈보다 가슴이 원하는 길을 따랐다. 그의 꿈은 작지만 가치 있는 맥주를 세상에 내놓는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소규모 양조장이 겨우 12개에 불과한 불모지였지만 맥주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첫 맥주에 대한 고민은 크지 않았다. 증조부 루이스 코흐가 남긴 레시피가 다락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짐 코흐는 그 레시피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맥주를 디자인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다. 버드와이져와 다르고 밀러와 구분되는 가치, 바로 짐 코흐 맥주가 가져야할 정체성이었다.  



사무엘 애덤스 그리고 보스턴 라거


짐 코흐는 그 해답을 보스턴에서 찾았다. 미국 독립의 발화점이자 건국의 아버지 사무엘 애덤스의 흔적이 남아있는 보스턴은 대기업 라거가 가지고 있지 않은, 크래프트 맥주만의 스토리를 녹여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맥아 사업을 운영했던 사무엘 애덤스는 맥주 혁명을 준비하고 있던 20세기 짐 코흐와 다름없었다.


1985년 보스턴 비어 컴퍼니(Boston Beer Company)는 애국자의 날(Patriots’ Day)에 맞춰 첫 맥주를 출시한다. 라벨에는 맥주잔을 들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사무엘 애덤스의 모습과 ‘사무엘 애덤스 보스턴 라거’라는 폰트가 뚜렷하게 박혀있었다.

사무엘 애덤스 보스턴 라거 라벨

증조부 레시피에 따라 만든 이 맥주 스타일은 비엔나 라거(Vienna lager)였다. 비엔나 라거는 19세기 중반 안톤 드레허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한 맥주로 5~5.5% 알코올, 투명한 앰버색, 옅은 캬라멜, 뭉근한 바디감이 매력인 라거 맥주다. 그러나 비엔나 라거는 황금색 라거 열풍에 밀려 20세기에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짐 코흐는 비엔나 라거를 부활시키며 보스턴 라거를 완성했다. 5%의 알코올과 아름다운 앰버색을 담고 있는 사무엘 애덤스 보스턴 라거는 우아하다. 과하지 않은 단맛은 섬세한 쓴맛과 만나 좋은 균형감을 이루고 옅은 캬라멜과 견과류 향은 매끈한 바디감과 함께 복합적인 풍미를 발산한다. 이 맥주는 꽃병처럼 유려한 전용 잔에 마셔야 한다. 잔속에 담긴 보스턴 라거는 그 어떤 맥주보다 기품이 넘친다.


사업 초기만 해도 짐 코흐는 일일이 펍을 방문하며 맥주를 판매했다. 당시 흔하게 볼 수 없는 앰버색 라거도 주목을 끌었지만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진 건, 라벨 속 사무엘 애덤스였다. 맥주잔을 들고 있는 미국 건국 아버지의 모습은 친근함과 자부심을 전달했다. 사람들은 맥주가 아닌 미국의 정신과 보스턴의 역사를 마신 것이다.

사무엘 애덤스 보스턴 라거

사무엘 애덤스는 출시된 지 1년 만에 전미맥주대회(Great America Beer Festival)에서 수상하며 신데렐라로 떠오른다. 보스턴 비어 컴퍼니의 성장세는 놀라웠다. 1990년에는 2000만 달러, 약 250억 원의 매출을 달성하며 짐 코흐가 세운 목표를 훌쩍 뛰어 넘었고 1995년에는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에도 성공했다. 2009년에는 5천억 원이 넘는 규모로 성장했다.


이런 사무엘 아담스의 성공은 198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또 다른 전설 시에라 네바다와 곧잘 비교되곤 한다. 두 회사는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심장으로 산업을 동인했지만 추구하는 가치는 다소 달랐다. 시에라 네바다가 미국 홉을 통해 자유롭고 실험적인 맥주로 크래프트 맥주 혁명을 이끌었다면 사무엘 애덤스는 정체성과 로컬문화를 통해 크래프트 맥주 정신을 실현했다.


40년 동안 크래프트 씬을 선도한 두 브랜드는 전체 미국 맥주 시장에서 탑10 안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 버드와이저, 밀러, 쿠어스 같은 브랜드가 해외 다국적 자본에 매각되었기 때문에 순수 미국 자본으로 구성된 맥주 브랜드로는 1, 2위라고 해도 무방하다.


“행복과 부자 중 후자를 선택하면 당신은 소시오패스일 지도 모릅니다. 저는 소시오패스가 아니었습니다. 행복을 선택했거든요. 당신을 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닌 행복하게 하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누군가는 이런 짐 코흐의 철학을 낭만적이라고 치부하겠지만 수십억의 연봉을 마다하고 열정을 선택한 그를 감히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온한 길을 박차고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한 짐 코흐, 어쩌면 그는 크래프트 맥주 혁명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환생한 사무엘 애덤스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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