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을 살린 오르발 트라피스트 맥주 <1부>
문득 구글 지도를 들여다보니 어느덧 프랑스 국경이 가까웠다. 오늘 방문하는 수도원은 벨기에 남쪽 지역 왈로니아에 있다. 벨기에는 크게 두 개의 언어권으로 구분된다. 네덜란드어 권 플란더스(Flanders)와 프랑스어 권 왈로니아(Wallonia)다. 두 지역 사이에 있는 수도 브뤼셀에서는 두 언어가 통용된다.
여러 언어가 공용어인 나라는 종종 있지만, 지역이 완전히 나뉜 채,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나라는 흔치 않다. 벨기에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 점이 흥미로웠다. 언어의 다름이 혹시 심각한 내부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근까지 두 지역이 미묘한 갈등을 빚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소수지만 독립을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큰 충돌은 없으며 반목이 생길 때마다 토론과 합의를 통해 극복하고 있다고 했다.
언어가 다르면 생각이 나뉘고, 결국 정체성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이 나라는 어떻게 극복하는 것일까. 하긴,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서로 70년 넘게 으르렁 거리는 남북을 보면 언어가 꼭 정체성과 동질감을 위한 필요충분 요건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네덜란드 언어권인 안트베르펜에서 순식간에 프랑스 언어권인 오르발로 넘어가는 이 여정은 단일 민족 역사로 범벅된 나에게 생소한 경험인 건 분명했다.
오르발은 벨기에 왈로니아 지방에서도 프랑스와 맞닿아 있는 플로렌빌 남쪽 지역에 있다. 정식 명칭은 빌레-드방-오르발(Villers-devant-Orval)이다. 지금 향하고 있는 오르발 수도원도 프랑스어로 오르발의 성모 수도원을 의미하는 ‘애비 노르트 담 도르발’(Abbaye Notre-Dame d'Orval)이 본명이다.
이 수도원은 이름과 터에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을 갖고 있다. 11세기 초 한 귀족 여인이 이곳을 지나가다 청혼 반지를 샘물에 빠트렸다. 슬픔에 빠진 여인은 반지를 되찾으며 보답으로 훌륭한 수도원을 짓겠다고 신에게 기도했다. 놀랍게도 그때 송어가 반지를 물고 올라왔고 그녀는 기뻐하며 이곳은 ‘Val d’Or’, 즉 황금의 계곡이라 외쳤다. 그리고 오르발 수도원 설립을 후원했다.
반지를 빠트린 여인은 투스카니의 마틸다, 그녀는 중세 유럽을 뒤흔든 ‘카노사의 굴욕’의 중심에 있었던 여장부였다. 두 번의 결혼식을 올렸던 마틸다가 누구의 반지를 잃어버렸던 건지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오르발 수도원이 자신들의 초기 흔적을 1070년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반지의 주인공은 첫 결혼 상대였던 고드프리트가 아니었을까? 마틸다는 1069년 어머니와 재혼한 고드프리트 3세의 아들 고드프리트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 작은 역사가 1077년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토스카나 카노사 성 앞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눈 위에서 맨발로 용서를 구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이어졌다.
마틸다의 아버지 보니파초 4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영주들을 꺾은 인물이었다. 황제 콘라트 2세는 보답으로 이탈리아 토스카나 백국 등 다수의 영지를 하사했고 가문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그러나 1052년 사냥을 하던 보니파초 4세가 암살을 당하고 만다. 배경에 보니파초 4세의 권세를 견제하려 했던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장남 페데리코가 보니파초 4세의 뒤를 이었으나 너무 어렸다. 베아트릭스는 섭정을 맡으려 했지만 하인리히 3세는 이유 없이 허락을 미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호시탐탐 영지를 노리는 세력들도 생겼다. 베아트릭스의 선택은 결혼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그녀는 사촌이자 하 로렌의 영주 고드프리트 3세와 재혼을 통해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려고 했다.
문제는 고드프리트 3세가 하인리히 3세에 지속적으로 반기를 든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격분한 하인리히 3세는 토스카나로 쳐들어갔으나 고드프리트 3세는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도망쳤다. 1055년 황제는 보복으로 베아트릭스와 마틸다를 독일로 데려갔다. 불행히도 혼자 남겨진 페데리코는 얼마 뒤 특별한 이유 없이 사망했다. 마틸다는 이 죽음 뒤에 하인리히 3세가 있다고 확신했다.
아내를 빼앗긴 고드프리트 3세는 황제에 대한 반란을 준비했다. 하인리히 3세 또한 이에 대응하여 군대를 집결시켰다. 격동의 순간에 쉼표가 필요했던 것일까. 1056년 10월 황제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는 겨우 6살이었기에 아그네스 황후가 섭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사태를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베아트릭스와 마틸다를 석방하고 토스카나 변경백의 지위를 허락했다. 조건은 고드프리트 3세의 충성이었다.
1075년 어린 황제의 권한이 약해진 틈을 타고 교황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 황제는 성직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에 붙은 성직자들은 부패하고 세속화되었다. 성직을 매매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런 움직임에 반대하며 클뤼니 수도원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진행되었다. 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후에 그레고리우스 7세가 된 힐데브란트였다. 올바른 교권을 위해서 교황권이 황제 권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독자적으로 교황을 옹립했다. 황제의 힘이 약했던 시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76년 스무 살이 된 하인리히 4세는 교황권을 다시 황제권 밑에 두고자 했다. 낌새를 챈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의 서임권을 박탈하고 교황 권위에 복종하라고 명했다. 당연히 가만히 있을 하인리히 4세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를 선포했다. 하지만 교황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결정을 한다. 파문이었다. 황제뿐만 아니라 그를 돕는 모든 사람도 파문을 당했다. 중세 시대 파문은 존재의 상실을 의미했다.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격을 박탈하고 기독교 세계에서 추방을 뜻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신의 뜻을 거역하는 최악의 죄인이 되어 버렸다.
하인리히 4세는 반항하려고 했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이미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황제는 교황이 머무르고 있던 북이탈리아 토스카니에 있는 카노사 성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이때 교황과 함께 있던 사람이 마틸다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오랜, 그리고 열렬한 후원자였던 그녀는 교황을 보좌하며 이 사태를 주도했다. 카노사 성은 바로 마틸다가 살고 있는 성이었다.
마틸다는 교황과 함께 3일 동안 카노사 성 앞에서 눈 위에 맨 발로 서있었던 하인리히 4세를 내려 보았다. 아마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실현되는 순간이었을 테다. 오르발은 중세를 호령했던 여장부, 마틸다의 이런 흔적이 서려있는 곳이었다. 나는 지금 황제와 교황의 패권 투쟁의 역사가 시작된 그곳으로 가는 중이다.
버스가 산 중턱으로 들어서자 드문드문 보이던 집들은 사라지고 초록색 나무와 들판만 가득했다. 프랑스 국경으로 다가갈수록 풍경은 확실히 플랜더스와 다르게 지나갔다. 벽돌보다 돌로 지어진 집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왔다. 돌들은 옅은 황색을 띠고 있었다. 오르발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황색으로 물든 수도원을 보고 나는 이 돌들이 심상치 않은 녀석들인 것을 알았다.
흰 구름이 실타래처럼 풀어져있는 파란 하늘은 수도원의 노란빛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오르발 수도원은 생각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원시 수도원 공동체의 아우라도 발산했다. 거대함과 날 것이 내뿜는 거친 감성이 오감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틸다의 전설이 사실인지 확실치 않지만, 오르발 수도원의 역사는 10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칼리브리아에서 온 베네딕도회 수도사들이 이곳에 정착하며 수도원을 건립했다. 1124년 각고 끝에 수도원을 완성했지만 제정 문제는 꾸준한 운영을 어렵게 했다.
이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시토회였다. 1098년 베네딕도회에서 분리된 시토회는 12세기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시토회를 이끌던 성 베르나르는 오르발 수도원의 요청을 받고 곧바로 시토 수도사들을 파견했다. 1132년 7명의 수도사가 오르발에 도착했고 시토회 규칙에 맞춰 수도원을 재정비했다. 오르발 수도원이 1132년을 공식적인 원년으로 삼고 있는 이유다.
오르발 수도원은 세 번의 큰 위기를 맞이한다. 첫 번째 시련은 1252년 발생한 대화재였다. 수도원을 전소시킨 이 불은 큰 상흔을 남겼다. 100년 간 복구가 진행됐고 다행히 그 뒤 5세기 동안 오르발 수도원은 큰 탈 없이 존속했다. 17세기 초에는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수십 명의 수도사를 품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 대륙을 초토화시킨 30년 전쟁을 비껴갈 수 없었다. 1637년 프랑스 용병들의 약탈은 수도원을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했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후, 1668년 수도원장으로 새로 부임한 샤를 드 벤제라드는 오르발 수도원을 시토회에서 트라피스트회로 바꾸며 개혁을 이끌었다. 이때 오르발 수도원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건 대장간 때문이었다. 수도원 내 허가된 대장간이 지역 철강 산업을 견인하며 수도원 공동체를 경제적으로 안정시켰다.
오르발 수도원에게 가장 큰 시련을 준 사건은 프랑스혁명이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다른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오르발의 재산도 몰수당했다. 재기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꺼진 건, 1793년이었다. 프랑스 혁명군은 수도사들이 오스트리아군에게 환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수도원의 시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잿더미만 남긴 채, 1000년의 역사는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수도원의 아우라에 눌려 잠시 멍해 있던 나는 입구로 발길을 재촉했다. 오르발 수도원도 다른 트라피스트처럼 봉쇄 수도원이다. 특별한 허가가 없으면 입장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수도사들 공간 밖에 있는 유적지는 유료로 방문할 수 있었다. 화재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을 공개하고 있었다. 입장료는 6유로였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둘러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수도원 내부로 들어서자 세상과 단절된, 지난 1000년의 역사가 온몸을 엄습했다. 여러 개의 기둥으로 된 통로로 된 바실리카가 눈에 들어왔다. 안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넝쿨식물로 뒤덮인 담장을 따라 걸어야 했다. 담장 너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된 웅장한 수도원의 모습이 보였다. 나처럼 속세에 찌든 몸은 감히 들어갈 염두도 나지 않는 거룩함이 가득했다.
유적지로 들어가기 전, 오르발과 트라피스트회를 소개하는 작은 방에 들렀다. 수도원 외관과 달리 완벽하게 디지털로 무장한 디스플레이가 사뭇 생경했다. 벽에는 수도원 역사를 말해주는 여러 자료가 걸려있었다. 모두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지만, 내 손에는 모든 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있었다. 중세와 21세기를 들락날락하는 뇌를 부여잡느라 고생하던 찰나,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수도원 역사를 안내하는 문구를 보던 중 황색 돌의 비밀이 풀린 것이다.
‘피에르 드 프랑스’라고 불리는 이 돌은 1억 6천만 년 전, 이곳이 바다였을 때 생성된 석회암이었다. 견고하고 고른 성질로 오래전부터 성과 교회를 짓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문득 ‘피에르 드 프랑스’의 존재가 수도원 부활을 가능하게 한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지역에 돌이 없었다면 수도원 재건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1000년 전 황금 계곡을 외친 마틸다는 이 황색 돌이 진정한 금이었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2층으로 올라가니 흥미로운 건물 모형이 눈길을 끌었다. 오르발 수도원의 변천사를 시대 순으로 보여주는 모형이었다. 1132년 초창기부터 1782년 프랑스혁명 직전, 그리고 1948년 완공된 지금의 모습까지 수도원은 형태와 배치, 규모가 모두 달랐다. 유일하게 비슷한 건, 외관의 누리끼리한 색이었다.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을 둘러본 후, 밖으로 향하는 문을 나서니 옛 수도원 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공원처럼 꾸며 놓은 곳곳에 과거 시설을 복원한 공간이 있었다. 특히 약을 조제하던 도구를 모아놓은 곳이 흥미로웠다. 약초를 담았던 병과 무게를 재던 저울을 보니 수도원이 지역 공동체에 어떤 존재였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약국에서 나와 정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면으로 폐허가 된 옛 수도원 터가 보였고 옆에는 옛 양조 장비를 전시한 작은 건물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이에 마틸다의 전설을 재현한 작은 연못이 있었다. 솔직히 연못을 보는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설마 이런 신성한 곳에 관광지에나 볼 수 있는 시설을 만들 줄이야. 연못 안에는 사람들이 던져 놓은 동전이 수북했다. 그걸 보는 순간 꽁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동전 하나로 소원을 빌게 만든 것이 뭐가 그리 잘못이랴. 이왕이면 마틸다의 기적이 이뤄진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어느덧 나의 소원을 담은 1유로 동전도 연못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서둘러 양조 장비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맥주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마련한 공간 같았다. 외관과 달리 인테리어는 모던했다. 입구에는 초창기 양조장에서 사용했던 당화조가 있었다. 오른쪽에는 구리케틀이 입을 벌린 채 앉아 있었다. 옆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최첨단 디지털이 장착된 디스플레이가 오르발 맥주 양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정작 흥미로운 건, 그다음 방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르발 트라피스트 맥주의 역사를 한 번에 볼 수 있었다. 오르발의 심볼인 반지를 물고 있는 송어의 변천사부터 시대 별 오르발 맥주잔의 모습, 맥주를 담던 오래된 나무 상자와 양조에 사용했던 비중계까지 다채로운 맥주 유물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오르발 수도원에게 맥주는 어떤 의미일까? 분명 폐허 입구에 오르발 맥주 역사를 담은 공간을 준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답은 우거진 잡초 속 검게 그을린 기둥과 벽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가면 알 수 있을 테다. 마치 앨리스가 흰 토끼를 따라 구멍으로 내려가듯, 나는 간신히 형태만 남은 작은 문으로 들어섰다. 폐허가 된 담장 뒤로 반듯한 수도원 첨탑이 보였다. 때마침 첨탑 속 종소리가 흐릿해진 하늘 위로 낭랑하게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