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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May 19. 2018

탐나는 공간

대현동 카페 '파스텔'과 익선동 루프탑 '낙원장'

어릴 적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혼자 방을 쓴다던 친구가 부러웠었다. 한 살 터울 언니가 있다 보니 '내 방'이라는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던 터. 그때 처음 '이 공간이 탐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공간은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어떤 곳에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불편하고 불안한 반면, 어떤 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계속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탐나는 공간을 몇 개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뻔질나게 그곳에 드나드는 것은 아니다. 딱 한번, 혹은 두 번쯤 가봤을 뿐이다. 욕심난다는 건 자꾸 가고 싶어 지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다. '여기가 좋아!'가 아닌, '여길 만든 사람은 누굴까,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일까'하는 의문이 드는 느낌이랄까.


그 공간의 주인은 누구일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일지. 그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이 곳을 만들었을지 궁금해지고, 그 궁금증에 끝엔 '배아픔'도 있다. "아 좋겠다. 이런 곳에 매일 오다니"

아마 배 아파서 자주 가진 않게 되나 보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조금 갖기로 결심한 요즘, 새로이 탐나는 공간이 생겼다.




1. 대현동 카페 파스텔


날씨가 궂은날이었다. 괜히 집에만 있기엔 아쉽고, 나간다 한들 그다지 생기가 돌지 않는 날. 만나게 된 지인이 조용히 데려간 곳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이다. 시집이 참 많다. 지인에게 들은 정보로는 주인 분께서 시인이라고 한다. 부담 없이 한 권 집어 들어 커피와 함께 계산하고 자리에 앉기에 좋다.

책장 군데군데 붙어있는 추천 시집에 대한 메모가 귀여워 웃음을 짓게 되고, 무엇이라도 집어 들어 당장 읽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예매해놓은 영화 탓에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프렌테라는 LP 상점이 있다. 뭔지 잘 몰라도, 유명할 것이 분명한 LP판 몇 개를 뒤적거리고 나서야 비로소 카페 파스텔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선물가게를 지나야 만날 수 있는 출구 같은 느낌. 뭐라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한 공간인 척 세 개의 공간이 어우러져 있다. 카페 파스텔을 중심으로 조화롭고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는 이 공간을 좋아하지 않기란 쉽지 않을 터. 테이블에 커피나 맥주를 올려두고 저마다의 세계에 취해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참 평화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그들의 모습은 평등하고 조화롭게 공간을 나눠 쓰고 있는 세 개의 상점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선물가게의 유혹을 뿌리칠 자신이 없다면, 좋아하는 책을 꼭 들고 오길 추천한다. '추천 시집은 무조건 10% 할인'이라는 매력적인 메모를 발견한다면, 뭐라도 냉큼 사지 않을 수 없을 테니




2. 익선동 루프탑 낙원장


익선동은 사람이 너무 많다. 평일이나 주말이나, 낮이나 밤이나. 골목이 좁아서 그런지 '바글바글'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뭐든 먹으려면 삼십 분 이상 줄을 서야 한다.

그래도 굳이 익선동에 가는 이유가 있다면, 그 바글바글한 느낌이 좋아서랄까. '줄 서서 뭐 먹는 거 싫어!'라고 우기면서도, '남들 하는 건 다 해볼래!'하는 이상한 심보를 갖고 있다. 사람으로 꽉 찬 그 골목 속에 있으면, 낯선 사람들로부터 동질감 같은 걸 느낀다. 그래 저 사람들도 다 사진 건지러 온 거야.


점심때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골목을 배회하다가 멀찍한 곳에서 꼬마전구와 하얀 천을 발견했다. '저긴 가야 돼!'

반전 있는 공간이었다. 사람으로 가득 찬 골목 위는 한적했고, 아래에서 올려다본 것보다 안 예뻤다. 친구와 허탈한 웃음을 짓고 캔 와인을 홀짝이다 보니, 하나 둘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멋진 도시의 야경은 없다. 종로와 광화문의 멋진 빌딩들이 보일만한 높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블록별로 잘 정리된 집들이 내려다 보이는 것도 아니다. 군데군데 몇 개의 호텔 간판과 가까운 거리의 건물 창문이 보였을 뿐. 애매한 높이였다.


이 애매함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구두를 벗어버렸고, 와인엔 얼음을 가득 담아 마셨다. 옆 테이블에선 안주가 너무 비싸다며 투덜대다 술을 엎질렀고, 그 탓에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다.

1층에서 술을 계산하고, 6층까지 걸어 올라와야 한다. 6층엔 직원이 없고, 뭔가 더 필요하다면 다시 또 1층까지 내려가야 한다. 우리는 얼음을 가지러 두 번 왔다 갔다 했다. 1층에는 카페 2층부터 5층까지는 호텔이 있으며, 화장실도 1층에만 있다. 불편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 공간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애매한 높이와 세련되지도 촌스럽지도 않은 애매한 분위기가 좋았다.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올라온 느낌.

'여기서 당신을 의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1층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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