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아이슬란드로
이른 아침의 파리는 고요했어. 어쩌면 밤보다 더 고요한 시간이 이 시간일 거야. 먼 곳에서는 동이 트고 있었고 잠들었던 도시에도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더래. 응, 내가 직접 본건 아니야. 나는 자고 있었지. 어쩐 일로 일찍 일어난 그가 카메라를 들고 아침이 오는 파리를 찍고 있었어.
내가 잠에서 깬 건 아침 8시나 되어서였어. 침대가 창문 바로 옆에 있어서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눈을 뜨자마자 에펠이 눈에 들어왔어.
'그래, 너 거기 있구나. 거기 여전히 있구나.'
아침 햇살은 붉기보단 분홍빛에 가까워 보였어. 진달래 꽃에서 색을 빼낸듯한 색. 눈에는 눈곱이 그대로 있었고, 어쩌면 얼굴엔 침 흘린 자국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마냥 좋아서 눈을 비비면서 창문을 바라보았지. 아침 햇살에 걸려있는 에펠탑은 어젯밤에 본 것보다 더 좋았지만 왜인지 멀게 느껴졌어. 마지막이라 그랬던 거 같아.
'쿵'
한참 창문에 붙어 정신을 팔고 있을 때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어.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에 불길함 예감이 들어 우린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어.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았어.
"악!!!"
내가 그걸 처음 보고 한 행동은 악! 그 한마디가 다였어. 그거 이상은 표현도 안될뿐더러 뭐라고 말할 힘도 없어질 만큼 헉, 하는 동시에 기운이 빠지는 광경이었거든. 깨져버린 렌즈를 본 순간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어. 아이슬란드 땅은 아직 밟지도 못했는데 어떡하지? 앞으로 사진은 뭘로 찍지? 렌즈를 사야 하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벼르고 있던 풀프레임을 사버려? 캐논 매장은 어디 있지?...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나에게 카메라 없는 여행은 상상도 못 할 재난 수준의 일이었거든.
생각해보면 내 여행은 여태껏 참 평화롭게 흘러갔었던 거 같아. 크게 위험한 일을 겪은 적도 없고 소매치기를 당한다거나 물건을 잃어버린다거나 하는 일도 전혀 없었어. 그저 음식 먹다가 생긴 우스운 일, 사람 만나는 일, 어디를 가는 길에 이렇고 저런 일이 생겼다는.. 우리끼리의 에피소드만이 내 여행을 채우고 있었지. 이렇게 물건이, 그것도 내 여행의 전부와 다를 거 없는 카메라가 박살이 나버린 건 처음이라서 나 너무 당황스러웠어. 어떻게 해야 하지. 십 분 동안 멍 때리고 그 생각만 했던 거 같아.
해답은 찾지도 못했는데 야속하게 해는 떠오르더라. 우리는 오후 1시 비행기를 타러 샤를드골 공항으로 가야 했고, 탑승 수속을 하려면 10시에는 리무진 버스를 타야 했어.
나는 특이한 게 다른 때는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당황스러울 땐 사람이 차분해진다. 예전에 산지 얼마 안 된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어. 누가 내 지갑을 훔쳐갔는데, '아.. 잃어버렸구나..' 이러고 말았어. 막 화를 내거나 그러지도 않고. 이 날도 나는 계속 멍 한 상태였어. 얘기를 할수록 속상함만 가중될 뿐 별 다른 방법은 없었거든.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어. 에펠과의 감동적인 작별인사, 뭐 그런 것도 없이 창문 한번 쓱 보고 캐리어를 챙겨 들고나갔어. 일단의 대책은 공항 면세점에서 캐논 렌즈를 사자는 거였지. 그것만이 나의 희망이었어.
문제는 여기부터였어. 일단 공항에 캐논 매장 같은 건 없었어. 비슷한 다른 카메라 매장도 보이질 않았지. 카메라는 말썽이고 시간은 없고, 뭐 어떡해, 비행기까지 놓치면 큰일이잖아. 저가항공은 수속하는 것도 오래 걸려서 우린 서둘러 탑승동으로 이동해야 했어. 내 희망의 끈은 파리 공항 면세점에서 아이슬란드 공항 면세점으로 옮겨 갔지.
공항은 크지도 않으면서 여기서 저기까지 가려고 하면 시간이 엄청 걸렸어. 트레인을 갈아타니 마니 하면서. 체크인 구역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었고, 서양인들의 땀냄새가 오묘하게 섞여 쾌적하지 못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어. 더군다나 아이슬란드인들은 키도 무시무시하게 커서 공간은 더욱 비좁게 느껴지더라.
나는 한참을 캐리어에 기대어 있다가, 배가 고파서 폴에 가서 에끌레어 하나를 샀어. 근데 그것도 기분 탓인지 더럽게 맛이 없데. 내내 불만 덩어리였던 거 같아. 그리고 이 불만 덩어리는 결국 체크인 데스크 앞에서 터지고야 말았어.
파리에서 아이슬란드까지는 와우에어(wow air)를 이용했거든. 체크인 줄이 정말 길었는데, 그래도 우리는 온라인 체크인을 하고 와서 30분 정도 기다렸다 수화물을 맡길 수 있었어. 그것도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무튼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고 짐을 올렸는데, 캐리어 무게를 맞추라는 거야.
저가항공이 수화물 무게에 엄청나게 까다로운 거 알고 있지? 나도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그래서 티켓을 발권할 때 이미 수화물 무게를 늘려 놓은 상태였거든. 문제는 우리가 맡기려던 캐리어 각각의 무게였어.
잠깐만 들어봐. 예전에 내가 이지젯을 탔을 때 얘기야. 예를 들어 1인당 20kg씩 무게가 허용돼. 근데 A랑 B가 일행이야. 그러면 A 꺼 20kg, B 꺼 20kg 해서 총 40kg가 허용 되잖아. 이럴 때 이지젯은 융통성을 발휘해서 A 캐리어든 B 캐리어든 두 명의 캐리어 무게를 총 합해서 40kg만 넘지 않으면 통과시켜주었어. A 캐리어가 25kg, B 캐리어가 5kg 이어도 받아주었단 얘기야.
나는 이걸 철석같이 믿고 짐을 쌌다. 하나는 29인치, 하나는 21인치 캐리어였거든. 거기에 어떻게 똑같이 20kg씩 분배해서 넣겠어. 당연히 하나는 엄청 무겁고, 하나는 가벼울 수밖에. 근데 와우에어는 얄짤없데. 데스크 직원은 그저 'heavy'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어. 후..
그래서 뭐 어쨌게. 공항 한가운데서 캐리어 다 풀고 짐 분배한다고 난리도 아니었지. 무거운 것들은 전부 21인치에 넣고, 가벼운 것들은 전부 29인치에 넣고, 등산화는 발에 신고, 기념품들은 들고, 기내용 가방에도 꾸역꾸역 옷가지를 넣으면서 캐리어 무게를 줄여 나갔어.
그렇게 두 번 정도 무게를 더 재고 나서야 'OK'라는 싸인을 받을 수 있었어. 와.. 그때의 기분은 정말.. 우리가 잘못 알고 대처한 건 맞는데, 그래도 너무한다 싶더라고.
아주 험난한 오전이었어. 캐리어 무게와의 싸움이 이런 거구나. 한 번도 이 정도로 무거워본 적이 없어서 몰랐지 나는. 렌즈 박살 나고, 캐리어 때문에 곤욕 치르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아이슬란드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
비행기 좌석에 앉으니까, 그제야 숨을 좀 돌릴 수 있겠더라.
마음이 좀 안정될 때쯤 창 밖을 보니까 비행기는 이미 파리 상공을 떠나고 있었어. 떠나는 일이 너무 정신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
'Bye..'
파리에서 아이슬란드까지는 3시간 정도 걸렸던 거 같아. 시차는 1시간, 아이슬란드가 느려. 3시간은 아주 짧게 느껴졌어. 그와 난 아까의 피곤함은 까맣게 잊고 이야기 꽃을 피우며 비행시간을 보냈거든.
저가항공은 우리가 앉아 있는 좌석 값 말고는 모든 게 유료야. 기내식은 당연하고, 비스킷 같은 간식이나 음료수, 심지어 물 한 잔도 말이야. 그런데 얘네는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잘 사 먹더라. 우리 건너 옆에 할아버지는 샌드위치를 두 개나 드시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어떤 사람은 누들 컵을 시켜 먹더라고. 그건 눈으로 본 게 아니라 후각으로 알게 된 거였어. 라면 스프 향은 없던 배고픔도 생기게 만들 만큼 강렬하잖아.
우린 이 광경을 두고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지.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자기네 물가가 비싸니까 다른 유럽 국가의 물가는 저렴해 보이는가 보다. 그래서 기내에서 비싼 돈을 지불하고도 많이들 사 먹는가 보다. 그런데 잠깐만, 와우에어는 아이슬란드 항공사인데? 그럼 게네 물가에 맞춰져 있는 거 아닐까? 뭐 이런 상상을 근거로 하는 토론.
아이슬란드 상공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창 밖은 희미해지기 시작했어. 하얀 구름이 엄청나게 낀 거야. 근데 자세히 보니까 그건 하얀 구름이 아니라 우리가 먹구름이라 부르는 아이였어. 먹구름도 하늘에서 만나니까 그냥 허연 연기일 뿐이데. 얘는 머금고 있던 비를 동그란 비행기 창문에 물지렁이처럼 뿌려댔어.
"여보! 아이슬란든가 봐!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나 봐!"
나는 하늘 아래서 춤추고 있는 짙은 초록색 물결을 보고 직감적으로 여기가 아이슬란드라는 것을 느꼈어. 일단은 파랗거나 푸른 종류의 색을 가지고 있는 다른 동네 바다와는 색부터가 달랐고, 그 바다를 검게 탄 듯한 땅인지 돌인지 모를 대지가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 너무 신선했거든.
제일 신기했던 건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는 모습이었는데, 모래사장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파도는 하나의 덩어리로 밀려오잖아. 파도가 조각조각 나뉘어서 밀려오지는 않잖아. 근데 아이슬란드 상공에서 본 파도는 각각의 작은 몸집을 가지고 꼭 바다 위에 흩어진 생선처럼 따로따로 춤을 추고 있더라구. 그게 마치 파도가 아닌 지구의 또 다른 활동 같아 보였어.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까 옆에서 가만히 듣던 그는 이렇게 말했어.
"다른 바다는 비행기에서 파도의 움직임이 저렇게까지 잘 보이지는 않잖아? 여기서 우리 눈에 저만큼 보인다는 건, 파도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거야."
이러다 착륙을 못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세한 비바람이 불 때, 우리는 도착했어. 그 시각 오후 4시. 우리가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에 처음 발을 들인 시각이었어.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어.
바람도 심하게 불었지.
아이슬란드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얇은 야상과 맨투맨 따위를 입고 있었어. 주위를 둘러보니 이런 종류의 옷을 입은 사람은 우리 둘 뿐이더라고. 아마 게네는 우릴 보고 미쳤다고 생각했었겠지. 자신들은 두꺼운 패딩에 방한 부츠에 난리부르스였거든. 그런데 조금 지나고 보니 그런 난리부르스를 안 추면 이 날씨에 못 견디겠더라.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 그곳으로 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아이슬란드의 제 1 공항은 케플라비크 공항이야. 나는 왜 케플라비크 공항이 작고 시골스러울 거라 생각했을까?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슬란드는 그저 모든 것을 자연에 의존하며 최소한의 필요함만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놨을 줄 알았는데, 그런 나의 원시적인 발상을 산산조각 내주는 최첨단 공항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스러웠어.
실제로 케플라비크 공항은 말이지.. 굉장히 세련되고 멋있고 또 스타일리쉬했어. 아이슬란드가 북유럽이라는 것을 잠깐 잊고 있었지 뭐야. 디자인 강국 북유럽, 아이슬란드는 어마어마한 강국이었어.
몇 달 전에 꽃보다 청춘이라는 예능 프로에서 아이슬란드에 갔던 얘기가 방영되었잖아. 거기서 조정석이 핫도그를 먹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어 보이더라고. 핫도그 3개가 핫도그 월드로 변하는 번역과 함께 그 프로는 대박이 났지. 그 뒤로 아이슬란드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꽤 늘었을 거 같아. 우리도 그 수치를 높게 한 관광객들 중 하나일 테고.
파리에서 출발할 때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배가 고파 죽을 거 같았는데 마침 공항 슈퍼마켓에 핫도그 간판이 보였어. 이거다! 우리는 핫도그와 콜라 세트를 주문했어. 우리는 배가 무척 고팠고, 또 공항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핫도그는 굉장히 맛있는 편이었어.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동안 핫도그를 굉장히 자주 먹었는데 얘네 핫도그엔 특징이 있었어. 그건 잘게 썬 양파와 바삭바삭한 무언가가 들어간다는 것. 그게 우리가 먹던 핫도그랑 달라서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거 같았어. 우린 이 자리에서만 핫도그를 2개씩이나 먹었지.
케플라비크 공항은 샤를드골 공항보다 넓고 좋았어. 물론 캐논 매장도 있었지. 그런데 살 수 있는 렌즈가 없더라구. 뭐든 사서 바꿀 수는 있었지만 그걸 사기엔 우리 여행 경비가 다 깨질 거 같았어.
어떡하지? 우리는 다시 고민에 빠졌어. 그러면서 박살난 카메라 렌즈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한참을 째려봤지. 근데, 자세히 보니까 이게 렌즈 자체가 깨진 게 아니라 렌즈에 씌워 둔 필터가 깨진 거더라고. 그럼 그 필터만 빼버리고 쓰면 되잖아! 우리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어.
레이캬비크로 가는 플라이버스 안에서 깨진 필터를 빼기 위해 안감힘을 썼어. 근데 이게 바닥으로 툭 떨어지면서 필터가 렌즈에 빡빡하게 끼여서 빠지질 않더라고. 결국 카메라 렌즈는 다음날이 되도록 해결하지 못했어. 나는 체념 반, 시내에서 캐논 매장을 찾아갈 희망 반,으로 카메라를 그에게 줘버렸어.
1시간 정도 달렸나?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레이캬비크에 도착했다는 버스 기사님 목소리가 들렸고, 이미 몇몇 사람들은 내려서 캐리어를 챙기고 있었어.
처음 마주하는 레이캬비크는 빗물로 가득했어. 하늘은 너무 어두웠고, 바람은 미친 듯이 부는데 신기한 건 우산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여기 사람들이 왜 우산을 안 쓰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지. 우산으로 막아질 비와 바람이 아니더라고 여기는.
폭우 경보가 뜰만큼 비가 세차게 내려서 우리는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서 몸을 피했어. 거긴 'Gray Line'이라는 버스 회사 사무실이었어. 아이슬란드를 떠날 때까지 그레이라인이라는 버스는 한 번도 이용하질 않았지만, 직원들은 친절했어. 우리는 숙소 위치를 물어보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어.
잠시 후 비가 잦아질 기세가 보이길래 건물 밖으로 나왔어. 우리 몸에는 커다란 판초가 덮여 있었고 그 판초는 비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었어. 아이슬란드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면 판초 우비 하나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비나 눈이 자주 오는 나 라인만큼 꽤나 유용하게 쓰이거든.
그 와중에 집들의 생김새는 왜 그렇게 멋스럽던지. 일단 뾰쪽한 지붕 자체가 우리에겐 이국적이잖아. 빨갛고 노랗고 이런 색을 건물 외관에 입히는 것도 우리나라에선 흔치 않고. 나는 빗 속을 걷는 와중에도 시선은 거리의 집들에게 뺏겨 있었어.
숙소까지는 아까 그레이라인 건물에서 15분 정도를 더 갔던 거 같아. 레스토랑과 상점이 모여있는 중심가를 지나 해안가 쪽으로도 꽤 걸어갔었거든. 궂은 날씨와 무거운 캐리어 때문에 그 거리가 더 길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지.
우릴 반겨준 건 하얀 머리칼과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나이 지긋한 할머니 'Thorunn'이었어. 그녀는 아주 인자한 표정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릴 맞이해 주었지. 그녀의 집은 해안가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는데 집 안엔 커다란 창이 여러 군데 나있었어. 그 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다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거처럼 느껴졌어.
그녀의 집은 아주 멋스럽고 아늑했어. 1층에는 거실과 주방, 그녀가 생활하는 룸이 있었고, 2층에는 손님용 룸 두 개와 화장실 하나, 그리고 티테이블이 있었어. 집은 사방에 창문이 있고 멋진 조명과 선반, 의자들이 군데군데 있었어. 집을 구경하면서 이런 게 진정한 북유럽일까, 싶더라고. 억지스러운 간결함 같은 거 말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따뜻함 같은 거. 실제로 북유럽에 있는 집들을 가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하얗고 심플한 느낌의 집은 잘 없대. 저번에 방송에서 북유럽의 어떤 나라에 사는 한국말 잘하는 여자가 나와서 그렇게 말하더라구.
2층도 온전하게 독립되어 있지 않고 난간에 서서 보면 아래층이 훤하게 다 보였어.
이렇게.
1층 거실에 크게 걸려있는 액자는 아이슬란드 북쪽에 있는 데티포스를 그린 거라고 했어. 그녀는 우리에게 저 그림을 굉장히 뿌듯한 표정으로 소개해주더라.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저 그림을 설명하는 그녀의 눈빛에서 자부심이 느껴지더라고.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창 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는데 아까 비행기 위에서 봤던 거센 파도가 저 바다에도 치고 있을까, 상상이 되는 거 있지. 이 정도 비바람이면 하늘에서 보았던 파도의 크기가 이해가 되더라구.
그녀는 오는 길에 추웠을 우리를 위해 따뜻한 차를 대접해줬어. 차를 마시면서도 나는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어댔어. 가만히 있기엔 이 집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었거든. 그 모습을 보고 그는 Thorunn에게 "걸어가면서도 3초에 한 번씩 사진을 찍는 여자예요."라고 나를 놀렸어.
나는 외국인이랑 얘기하는걸 아직도 많이 두려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어. 덕분에 Thorunn에게 다양한 이야기도 전해 들을 수 있었지. 여기서 가까운 마트는 어딘지, 레이캬비크에 카메라 매장은 있는지, 오로라를 보려면 어디로 가면 좋을지.. 그중에서도 제일은 지금 이 날씨는 얌전한 편에 속한다는 이야기였어..
아침식사는 오전 8시에 이루어진다고 Thorunn이 말했어. 우리는 아이슬란드에서 먹는 첫 식사가 당신이 대접하는 거라 기쁘다고 했지. 그녀는 활짝 웃었어. 아침식사를 약속하고 방으로 올라오니까 아까보다 온기가 차있더라. 창 밖은 여전히 비와의 전쟁이었어. 커튼 뒤로 레이캬비크의 레고 같은 집들이 보이는데, 유리창에 흐르는 빗물 때문에 창 밖 풍경도 흐릿해져서 꼭 그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
이런 풍경들을 보고 있자니 보지도 못한 레이캬비크가 상상되기 시작했어. 왜인지.. 이 도시는 멋스러움이 가득할 거라는 상상. 오늘 우리가 본건 비바람 부는 레이캬비크가 전부인데도, 나는 내일이 더 기대되었어.
폭신한 수면양말을 신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어. 오늘 하루 정말 길었지.. 생각하며 그를 쳐다보자 그는 벌써 잠이 들어 있었어.
'오늘, 아침에 눈을 떠서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았고, 카메라를 깨 먹었다. 공항으로 갔고, 캐리어와 싸움을 했고, 늦지 않게 비행기를 탔다. 그 와중에 날씨는 내 맘도 모르고 빛났고, 아이슬란드는 그와 정 반대의 날씨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에 함께 누워있다.'
마음 쓰이고 신경 날카로워지는 일들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해피엔딩'이라서 다행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