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내가 중학생 때였나, 고등학생 때였나,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아. 그 당시 나는 '사랑해 파리'라는 영화 포스터를 보았고 그때부터 파리를 가보고 싶어 했던 거 같아. 그중에서도 가장 보고 싶었던 건 에펠탑이었지. 카페 콩스탕에서 식사를 하고 에펠탑까지 걸어가기로 했어. 이미 하늘은 깜깜해져 있었고, 차가운 바람은 더 차가운 느낌으로 뺨을 스치고 지나갔어. 에펠탑은 워낙에 커서 파리 시내 곳곳에서 그 모습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그곳까지 찾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엄청나게 재촉해. 가는 동안에도 얼른 닿고 싶어서 너무나 설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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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주하는 에펠탑이었어. 몇 번이나 보아도 감동적인 거. 나는 어느 순간 에펠탑을 어떤 생물 취급을 하고 있더라. '에펠아, 에펠아'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어떤 사람들은 에펠탑을 처음 봤을 때 너무 감동해서 가슴이 막 두근두근거렸대. 내가 2년 전에 피렌체에서 만났던 어떤 남자애도 그런 말을 했었거든. 에펠탑이 메트로를 나오면 바로 눈 앞에 떡, 하니 서있는데 게는 그걸 보는 순간 입이 다물어지질 않더래. 그리곤 너어무 좋아서 가슴이 두근두근, 심장이 벌렁벌렁.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안 그랬거든. 처음 에펠탑을 마주했을 때 말이야. 2년 전 파리에 처음 왔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갔던 곳은 몽마르뜨 언덕이었어. 왜 그랬을까?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 날 날씨가 흐렸는데 에펠탑을 아껴두고 싶었던 거였을지도 몰라. 에펠탑을 보러 간 건 그러고 나서도 하루나 더 지나서였지. 나도 마찬가지로 메트로를 내려서 눈 앞에 떡, 있는 에펠탑을 봤는데 이게 뭐랄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는 기분 알아?
'뭐지? 저거 에펠탑 맞나? 저거야? 겨우 저거야?'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친구들이 우와! 멋지다! 하니까 나도 덩달아 감탄하는 척을 했어. 처음엔 진짜로 그랬어. 너무 고철덩어리더라구. 왜 에펠탑이 처음 파리에 지어졌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반대를 했었다잖아. 파리의 경관을 해친다나 뭐라나 하면서.
근데 그 고철덩어리가 볼 때마다 사람을 빠져들게 만들대. 처음에는 밤에 빛나는 게 예뻐 보이더니 또 낮에 하늘에 걸려 있는 모습도 예쁘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보면 더 그리워지는 뭐 그런.. 이상한 마법을 부리는 거 같았어. 결국 나는 배낭여행에서 돌아온 후 꼬박 1년을 못 참고 다시 파리로 날아가서 에펠을 보았지. 그땐 이미 에펠보단 파리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 후였어. 지금도 그래.
밤이 되면 에펠탑 주변은 에펠탑뿐만 아니라 모두가 마법을 부리는 거 같아.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도, 싸구려 열쇠고리를 파는 흑형들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회전목마마저도 사람들을 불러들이지. 우리는 그 부름에 기꺼이 답을 하며 뛰어가고.
나도 얼마 전에야 알았는데, 회전목마 지붕을 자세히 보면 파리의 명소들이 다 그려져 있어.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마들렌성당, 콩코르드 광장.. 파리에 오면 한 번쯤 가볼만한, 아니 누구나 들릴만한 장소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 속 명소들을 보고 있으니 지나간 추억들이 상기되었어.
파리에서 좋았던 곳은 너무 많지만, 그중에서 하나 추천하라면 거긴 '시테섬'이야.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곳. 예전에 게르만 민족에게 침입을 당했을 때 이 섬 안에서 다시 파리를 일으켜 세웠대. 그래서 이 곳엔 왕의 주거나 법원 같은 게 세워졌고 파리의 중심이 되었지. 현재 파리 시청도 시테섬 가는 길목에 있거든. 뭐 이런 얘기보다는 내가 시테섬에 갔을 때 너무 좋았던 건 사람들의 자유로움이었어.
나는 그때까지 길에 앉아서 뭘 먹는다는 생각을 많이 못해봤거든. 한국에서야 잔디밭에 앉아서 샌드위치 먹는 거, 그것도 맘먹고 나들이 가서 돗자리 펴고 하는 일이었지, 그게 그렇게 일상적인 행동은 아니었거든. 근데 여기서는 그냥 인도에, 돌담 위에, 바닥에 막 앉아서 무언갈 먹고 있더라고 다들. 근데 그게 하나도 안 이상해 보이고 너무 따라 해보고 싶은 거야. 막 너무 멋져 보이고.
그래서 나도 동생이랑 커다란 바게트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성당 앞 길바닥에 앉아서 먹었어. 인력거 아저씨의 벗겨진 이마도 구경하고,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버들나무의 나뭇잎 그림자도 보면서. 진짜 별거 아니지? 근데 그게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네. 그 후로는 나 아무 곳에나 앉아서 뭐 잘 먹잖아.
에펠탑을 보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 샹드막스 공원에서 에펠탑을 가까이 보면서 즐기는 방법. 둘째, 건너편 사이요궁에서 에펠탑을 멀리서 보면서 즐기는 방법. 전자는 에펠탑이 가까이 있지만 사진을 찍을 경우 반 잘린 에펠탑을 담는 경우가 많고 후자는 멀리 있지만 전체적인 모습을 제대로 보면서 즐길 수 있어. 나는 전자의 경우를 더 좋아해. 에펠탑이 내 눈 앞에 큼지막히 있을 때 마음이 가장 벅차더라구.
그런데 가을의 샹드막스 공원은 좀 충격적이었어. 여기 여름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거든.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근데 추워지니까 앉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항상 잔디로 덮여 있다고 생각했던 바닥도 흙이 되어 있었고. 너무 다른 모습에 솔직히 좀 놀랬지. 일 년 내내 그런 왁자지껄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휑할 줄은 몰랐거든.
한 시간쯤 지나고 사이요궁으로 건너왔어. 원래는 더 위에까지 올라가서 에펠탑을 내려다보는데, 별로 그럴 마음이 안 들어서 올라가다 말고 잔디밭에 풀썩 누워버렸어. 바람이 차가워서 후드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워서 에펠탑을 보고 있는데, 뭐라고 해야 될까, 이게 꼭 꿈을 꾸는 기분이 들더라고.
"있잖아. 나 지금 꿈꾸는 거 같아."
공기는 매섭고, 눈 앞에 커다란 고철덩어리는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고, 풀잎은 이슬이 맺히는 시간도 아닌데 찹찹하고, 그리고 내 옆엔.. 너가 있고.
파리에 몇 번이나 와봤지만 이렇게 꿈처럼 느껴졌던 밤은 아마 드물 거야. 그리고 또 한 번, '내가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졌어. 늘 하는 말이야. 여행을 할 때마다. 하지만 한 번도 하지 않은 적이 없어. 다음을 예측할 수 없기에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 그게 여행이잖아.
저녁을 카페콩스탕에서 그렇게 먹었는데도 숙소에 오니 배가 고파서 주전부리를 사러 밖으로 나갔어. 호텔 앞은 저녁 늦게까지 시끌벅쩍했어. 레스토랑도 많고, 슈퍼마켓도 두 개는 있었던 거 같아. 그중 한 곳에서 씨 없는 포도와 맥주를 사서 호텔로 다시 들어갔어.
나는 한국에서 야심 차게 플라스틱 와인잔까지 챙겨 갔었거든. 파리지앵 흉내 좀 내볼 거라고. 근데.. 캐리어를 열어 보니까.. 와장창, 부서져 있더라고.. 휴. 그러게 이걸 왜 들고 왔냐, 그래도 하나는 멀쩡하니 번갈아 부어 마시자, 그러다 캔 채로 꿀꺽꿀꺽.. 그렇게 우리의 꿈같은 밤은 저물어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