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 너머의 진실, 당신이 몰랐던 골뱅이의 진짜 얼굴

통조림 너머 숨겨진 집념과 압력솥이 빚어낸 미식의 기술

by 김동건

금요일 밤, 퇴근길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시원한 맥주 한 잔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안주는 단연 골뱅이무침이다. 매콤달콤한 양념에 아삭한 채소와 소면을 풍성하게 비벼 먹는 골뱅이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국민 안주'다. 하지만 우리가 젓가락으로 집어 든 그 쫄깃한 살점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골뱅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우리가 평생 즐겨온 골뱅이 통조림 속에는 우리 바다의 이야기보다 머나먼 북대서양의 거친 파도가 더 깊게 배어 있다.


우리가 통조림으로 만나는 골뱅이의 80% 이상은 영국이나 아일랜드 등에서 건너온 외래종이다. 한국인의 유별난 골뱅이 사랑 덕분에 전 세계 물량을 흡수하다 보니 생긴 글로벌 유통의 결과물이다. 실제로 우리의 이러한 편애는 지구 반대편 영국의 식탁 풍경까지 바꿔놓았다. 오랫동안 골뱅이를 미끼로나 쓰던 영국 어민들은 한국으로 향하는 엄청난 수출량을 보며 호기심을 느꼈고, 이제는 유럽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골뱅이 요리를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수출한 것은 자본만이 아니라, 버려지던 식재료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미식의 안목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수입산이 시장을 점유하기 전, 우리 곁에는 훨씬 더 투박하고 현실적인 ‘골뱅이’가 있었다. 수산물 경매시장을 서성이다 보면 가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하곤 한다. 껍데기가 두껍고 매끈한 ‘큰구슬우렁이’가 10kg에 단돈 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낙찰되는 장면이다. 시장에서 흔히 ‘배꼽골뱅이’라 불리는 이 녀석은 서해와 남해 갯벌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가성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리가 식당에서 마주하는 골뱅이 소면 속 국내산 살점의 상당 부분은 사실 이 큰구슬우렁이일 확률이 높다.


문제는 이 저렴하고 흔한 식재료가 가진 까다로운 성질이다. 큰구슬우렁이는 이름처럼 뻘을 가득 머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육질이 흡사 근육 덩어리처럼 단단하다. 한때 이 녀석의 가성비에 반해 덜컥 10kg을 구매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무턱대고 일반 냄비에 삶았다가는 고무보다 질긴 식감에 낭패를 보기 일쑤다. 이대로라면 일반 고객이 생물을 직접 구입했을 때 “질겨서 도저히 못 먹겠다”며 클레임이 터져 나올 것이 자명했다.

여기서 식재료를 다루는 ‘업자’의 노하우와 미식의 기술이 발휘된다. 뻘을 완벽히 해감한 상태로 일반 냄비가 아닌 ‘압력밥솥’에 넣고 푹 삶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고압의 증기로 단단한 조직을 강제로 해체하고 나면, 비로소 우리가 아는 통조림 골뱅이와 흡사한 부드럽고 탄력 있는 식감이 살아난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이러한 클레임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큰구슬우렁이를 압력솥에 삶아 부드럽게 만든 뒤 먹기 좋게 슬라이스하여 판매하는 방식으로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일화가 있다. 조리법 하나가 버려질 뻔한 식재료를 훌륭한 안주로 부활시킨 셈이다.


물론, 이러한 가성비의 미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진짜’ 주인공도 존재한다. 미식가들이 격을 논할 때 등장하는 동해안의 귀물, ‘백골뱅이(물레고둥)’다. 백골뱅이는 그 이름처럼 껍질이 희고 우아하며, 수입산이나 큰구슬우렁이의 질깃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깊은 단맛을 자랑한다. 특히 독소가 없어 내장까지 통째로 즐길 수 있는 백골뱅이 숙회는 동해의 찬물만이 빚어낼 수 있는 고귀한 미감의 정점이다. 하지만 최근 기후 변화로 어획량이 급감하며 이제는 산지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는 프리미엄 수산물이 되었다.


미식은 단순히 맛있는 것을 먹는 행위를 넘어, 식재료가 가진 한계를 조리 기술로 극복하고 그 이면의 가치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무심코 먹던 골뱅이가 영국의 어부들을 놀라게 한 한국인의 집념을 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고무처럼 질긴 큰구슬우렁이가 압력솥이라는 인내의 시간을 거쳐 부드러운 안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식탁은 풍성해진다. 대중적인 통조림 골뱅이부터 조리의 묘미가 담긴 큰구슬우렁이, 그리고 동해의 보물 백골뱅이까지. 우리가 골뱅이라 부르는 그 이름 안에는 이토록 다양한 계급과 사연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제는 골뱅이를 단순히 흔한 술안주로만 치부하지 말자. 매콤한 양념 뒤에 숨겨진 조리의 디테일에 집중해 보자. 영국인들이 뒤늦게 깨달은 쫄깃한 매력, 압력솥으로 길들인 큰구슬우렁이의 투박한 가성비, 그리고 동해안 백골뱅이의 우아한 단맛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우리의 밤을 위로하는 거대한 바다의 서사가 완성된다.


미식은 결국 이름에 속지 않고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골뱅이는 그 여정에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친숙하면서도 놀라운 반전의 주인공이다. 오늘 밤, 당신의 소주잔 옆에 놓인 골뱅이 한 점에는 당신이 미처 몰랐던 치열한 현장의 노하우와 드넓은 바다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10kg에 만 원이라는 저렴한 낙찰가 속에 숨겨진 어민의 노고와, 질긴 속살을 부드럽게 깎아낸 조리사의 안목을 떠올리며 이 한 점을 음미해 보길 권한다. 그 속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거대한 바다의 서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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