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구텐베르크의 인쇄술

by Beetwo

표준 독일어가 정립되는 데에는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루터가 유럽에서 가장 널리 읽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며 독일어권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통해 같은 언어를 읽고 공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십 개의 방언으로 나뉘어져있던 독일어는 루터 성경에 사용된 문법과 문장구조 등을 중심으로 표준화되며 독일어권역의 사람들에게 언어적 동질감을 들게 해주었다.

그러나 루터의 성경이 단지 성경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널리 빠르게 퍼질 수는 없었다. 루터 성경의 이면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있었다. 루터의 성경이 세상에 나왔을 무렵, 이미 독일 전역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바탕으로 한 인쇄소와 출판소가 퍼져 있었고, 덕분에 성경도 빠르게 복제되어 전파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표준 독일어 정립의 숨은 공로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텐베르크의 기술이 기존 인쇄술과 차별화되는 세 가지 큰 특징은 금속 활자와 유성 잉크, 그리고 인쇄기이다. 가장 먼저 인쇄기부터 알아보자.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구텐베르크 이전에 사용하던 목판 인쇄 방식은 사람이 목판을 일일이 손으로 눌러야했기에 작업량이 많고 비효율적이였다. 그에 반해 구텐베르크는 포도즙을 짜던 나사식 프레스를 개조하여 힘을 고르게 전달하고 반복적으로 찍어낼 수 있는 기계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쇄기에 사용되었던 구텐베르크의 활자와 잉크였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만 개발한 선에서 그쳤다면 빠르고 정확하게 많은 인쇄물들을 찍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존에는 인쇄에 쓰이던 나무 활자는 너무 빠르게 닳고 제조하기도 까다로워서 금속 활자를 사용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있었으나 여러 문제들로 인해 금속 활자가 상용화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동안 상용화 될 수 있는 금속 활자를 만들기 위해 납, 청동, 철 등 여러 재료들이 시도되었다.

납의 전자배치

우선, 납부터 살펴보자. 납은 전자 구조상 바깥쪽 전자들이 결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좀 더 심화적으로 들어가보면, 원자에는 주위를 도는 전자가 있고, 이 전자들은 오비탈이라는 특정한 공간에 배치된다. 이 오비탈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납의 경우 최외곽 s오비탈에 존재하는 2개의 전자는 화학적 결합에 참여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 비활성 전자쌍 효과(Inert pair effect)라고 한다.

이 비활성 전자쌍 효과의 원인은 납의 원자핵이 무겁고 내부 전자가 많아 s오비탈 전자가 핵에 강하게 묶여 결합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s오비탈의 특성을 알아야한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구형 대칭을 가지는 s오비탈의 형태, 다른 오비탈과 비교해보면 유일하게 핵과 겹친다. 이때문에 핵 근처에서 전자밀도가 높다.

s오비탈의 전자는 다른 오비탈에 비해 핵에 더 가까운 위치에 전자밀도(전자가 있을 확률)가 높다. 그래서 핵의 인력을 상대적으로 더 받게 되는 구조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내부의 s오비탈 전자는 이미 내부껍질에 있고 애초부터 결합에 잘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최외곽 s오비탈 전자의 경우에는 다르게 작용한다. 원자핵은 양성자를 가지고 있고 전자는 음전하를 띄기 때문에 서로 끌어당기지만 내부의 다른 전자들이 중간에 있으면 이 전자들이 보호하는 효과를 내게 되어서 최외곽 전자가 느끼는 핵의 인력이 낮아져 s오비탈의 전자여도 결합에 참여할 수 있는 에너지 준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납처럼 무거운 원소에서는 또 상황이 달라진다. 납은 원자번호 82번, 원자핵의 양성자수가 많아 크고 무거워서 최외곽의 s전자여도 원자핵이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하여 원자핵에 묶여버리게 된다. 그래서 납에서 이러한 비활성 전자쌍 효과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활성된 최외곽 s오비탈의 전자 2개는 결합력에 영향을 주게 된다.

금속결합에서 원자의 배열

납과 같은 금속은 일반적으로 금속 결합이라는 방식으로 원자 간 결합을 한다. 금속 결합은 마치 전자가 바다에 떠다니는 것처럼 자유롭게 원자들 사이에서 전자가 공유되어 결합되어있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납은 앞서 말한 비활성 전자쌍 효과로 인해 s오비탈의 전자가 결합에 참여하지 않고 남게 된다. 그 결과 결합에 쓸 수 있는 전자가 부족해지고 금속 결합이 이루어질 때, 부족한 전자로 인해 결합이 느슨하게 형성된다.

결국 납은 인쇄를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활자의 모양이 변형되고 활자가 찌그러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금속 활자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해보였다.

다음으로 청동을 살펴보자.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구리의 비율이 7~80%정도로 구리에 주석이 섞여들어간 형태이다.

구리 원자들만 있는 왼쪽은 안정적이지만 주석 원자가 끼어든 오른쪽은 크기 차이로 인해 주변 원자들이 비틀리며 격자 결함이 일어났다. 이 경우에는 점결함 중 치환형 결함이라 한다

청동의 원재료가 되는 구리와 주석 모두 전자들이 결합에 잘 참여한다. 그렇기에 납과 달리 원자간의 결합이 치밀하고 강해서 단단하고 형태 유지력이 뛰어났다. 다만 청동에도 문제는 있었다. 외부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깨져버린다는 것이였다.

이 문제는 청동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주석의 원자 반지름이 구리의 원자 반지름 크기보다 커서 주석의 비율이 높아지면 격자 결함을 일으킨다.

당시의 기술로서는 주석의 비율을 맞추기가 어려워서 주석의 비율이 뒤죽박죽이였다. 이렇게 주석의 비율이 높아지자 격자 결함이 생기며 미세한 틈과 응력 집중 지점이 형성되고 평소엔 단단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이 가해지면 깨져버리는 것이다.

철의 전자배치

그렇다면 철은 괜찮을까? 마지막으로 철을 살펴보자. 철은 전자 구조상 d오비탈에 전자를 6개 지니고 있으며 이 d오비탈은 전자가 서로 다른 5가지 공간 방향성을 가진 궤도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방향의 다양성은 전자들이 여러 방향으로 공유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특히 철과 같은 전이금속은 d오비탈이 완전히 채워지지 않아서 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결합에 활발히 참여하고 더 강한 결합력을 갖게 한다.

철 또한 금속이기 때문에 위에서 본 것처럼 금속결합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여러 방향으로 퍼져있는 전자들이 다양한 방향성으로 공유되며 더욱 강하게 연결되는 구조를 이룬다.

d오비탈이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특징 덕분에 철은 단단하면서 질기고 외부 충격에도 잘 끊어지지 않는 높은 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철의 높은 인성은 인쇄 과정에서 활자가 종이에 찍힐 때 활자가 눌리면서 다시 원래 형태로 되돌아가려는 탄성력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그 결과 활자가 살짝 튕겨오르면서 잉크가 종이에 제대로 묻지 않고 흐릿하게 인쇄되버리는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철은 녹는 점이 높아 당시 기술로는 정밀하게 가공하기가 어려워 가공 난이도가 높았고 이것 또한 상용화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납은 너무 쉽게 뭉개졌고 청동은 쉽게 깨져버렸다. 철은 가공이 어렵고 질겨서 잉크가 제대로 종이에 찍히지 않았다. 여러 재료들을 검토해본 결과 구텐베르크는 납과 주석, 안티몬을 혼합하여 합금을 만들어냈다. 납은 녹는 점이 낮아 가공이 용이했고 주석은 납이 지나치게 물러져서 쉽게 뭉개지는 것을 방지했다. 또한 안티몬은 냉각 시에 타 금속과 달리 팽창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활자의 모서리와 글자 선이 좀 더 선명하게 가공될 수 있었다.

안티몬이 고체화되며 형성되는 삼방정계 구조(좌측)는 원자들이 느슨한 층상 형태로 배열되어 있어, 냉각 시 간격이 넓어지며 팽창하게 된다. 이 덕분에 활자의 글자 선이 선명해진다.

안티몬이 냉각 시에 팽창하는 이유는 안티몬이 삼방정계 결정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삼방정계 결정구조는 원자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구조로 층상구조인데 액체 상태에서는 이 층이 어느 정도 붕괴되어 더 조밀한 배열을 갖지만 고체화할 때 다시 느슨한 삼방정계 구조로 재조직되며 원자 간 간격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납과 주석, 안티몬의 조합으로 구텐베르크는 단단하면서 쉽게 깨지지 않고 형태 유지를 할 수 있으면서 선명하게 인쇄까지 가능한 활자를 만들었다. 납과 주석, 안티몬의 조합으로 구텐베르크는 단단하면서 쉽게 깨지지 않고 형태 유지를 할 수 있으면서 선명하게 인쇄까지 가능한 활자를 만들었다.

금속활자의 모습, 아쉽게도 구텐베르크의 원본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아직 한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기존의 수성 잉크를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에 사용하면 활자에 잉크에 제대로 부착되지 않고 인쇄 시에는 글자가 제대로 찍히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구텐베르크는 유화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유성 잉크를 개발했다. 수성 잉크와 유성 잉크의 가장 큰 차이는 용매의 성질, 즉 물과 기름의 극성 여부이다. 극성과 비극성이란 분자 내의 전자 분포가 균일한지 아닌지를 말한다.

극성인 물(좌측)은 전기음성도가 높은 산소쪽에 음전하를 띄지만 기름(우측)은 전기음성도 차이가 없어서 극성을 띄지 않는다.

산소 1개, 수소 2개로 구성된 물은 산소의 전기음성도(원자가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가 강해서 전자가 산소쪽으로 몰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물은 산소쪽이 부분적으로 음전하를 띄게 되고 수소쪽이 부분적인 양전하를 띄는 극성 용매가 된다.

반면에 탄소와 수소로 구성된 기름은 탄소와 수소의 전기음성도가 거의 같아서 전자의 쏠림 없이 고루 분포하게 된다. 그렇기에 기름은 비극성 용매가 된다.

또한, 극성 물질은 극성끼리, 비극성 물질은 비극성끼리 잘 섞인다. 극성 분자는 이미 분자 자체에 영구적인 +극과 -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전기적 인력으로 서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순간적으로 전자가 몰려 쌍극자가 형성되며 다른 나머지 비극성 분자에게도 영향을 주어 극성을 갖게 한다

비극성 물질 간에는 서로 극이 없어서 끌어당기지 않을 것 같지만 분자 속의 전자들은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 전자가 한쪽에 몰리는 상황이 오게 되어 순간적으로 극성을 갖게 된다(이렇게 순간적으로 극성을 갖는 것을 순간 쌍극자라고 한다). 이 상황이 발생하면 옆에 있던 다른 비극성 분자도 전자의 분포에 영향을 받게 되어 일시적으로 극성을 갖게 되며 순간적으로 +와 -가 생겨 약하게 끌어당기게 된다(이 힘을 런던분산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비극성 물질과 극성 물질 간에도 반응이 나름 잘 일어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극성 분자는 이미 자신들간에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하여 상대적으로 인력이 약한 비극성 분자가 중간에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그렇기에 극성-극성, 비극성-비극성 간의 반응은 잘 일어나지만 극성-비극성 간의 반응은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금속 활자는 비극성에 가까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고 극성인 수성 잉크가 표면에 제대로 붙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였다.(극성 비극성이 이해가 어렵다면 일상생활에서 보기 쉬운 예시로 극성인 물과 비극성인 기름이 잘섞이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유성 잉크라는 아이디어로 금속 활자에 어울리는 잉크를 찾아냈지만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었다. 가장 중요한 종이에 어울리는 재료를 찾아야했다.

기존의 수성 잉크는 극성인 종이와 궁합이 좋아 쉽게 스며들었지만 유성 잉크는 점도가 높고 비극성이어서 그냥 기름만으로는 종이에 제대로 달라붙지 않았다. 그리고 잉크의 건조시간도 문제였다. 수성 잉크는 표면이 금방 말랐지만 유성 잉크는 그렇지 않았다. 구텐베르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마인유와 송진을 사용했다.

아마인유는 아마씨를 압축하여 만든 기름, 송진은 소나무 등 침엽수에서 얻은 액상 수지를 가열, 증발시켜 얻는다. 이 과정에서 증발하는 휘발성 액체 타르펜을 모아 타르펜틴을 만든다.

아마인유는 인쇄 후 잉크가 빠르게 굳도록 했다. 건성유인 아마인유는 불포화지방산, 특히 다중불포화지방산의 함량이 높다. 이 다중불포화지방산은 많은 이중결합(두 개 원자의 결합에 4개의 전자가 참여하여 반응성이 높음)을 가지고 있다.

아마인유가 굳는 과정

많은 이중결합을 가진 다중불포화지방산이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면 산화반응이 일어난다. 이 산화반응 과정에서 지방산 내의 C-H결합이 반응하여 라디칼(C•)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라디칼이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하여 과산화된 라디칼(C-OO•)이 된다.

과산화 라디칼은 또다시 다른 C-H구조와 반응하여 새로운 라디칼(C•)을 만들어낸다. 생성된 라디칼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C-C 결합을 만들고, 망상 구조가 형성되어 잉크가 굳는다. 이렇게 아마인유는 잉크가 굳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서 번지지 않고 빠른 인쇄가 가능하게 했다.

송진은 테르펜계 수지로 여러 테르펜 단위가 길게 연결된 고분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분자 구조는 분자가 길고 반복 단위가 많아서 분자끼리 쉽게 엉키는 성질을 말한다.

이렇게 분자 길이가 길고 분자 간에 맞닿는 면적이 넓어지면 순간 쌍극자가 많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고 앞서 설명한 런던분산력이 분자 전체에 누적된다. 그 결과, 눈에 띄는 끈적임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송진은 이렇게 끈적임과 접착력을 더해 유성 잉크가 종이 표면에 단단히 고정되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여기에 타르펜틴(송진에서 추출한 휘발성 용제)을 첨가하였다. 타르펜틴은 비극성을 띄고 있어서 유성 잉크와 잘 혼합되었고 잉크의 점도를 낮춰주었다. 또한 휘발성 물질답게 공기 중에서 빠르게 증발하면서 아마인유가 굳는 과정을 보조하여 잉크가 아마인유만 사용했을 때보다 더욱 빠르게 건조되게 하였다.

구텐베르크는 이처럼 혁신적인 인쇄 시스템을 만들어냄으로서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발간되었을 때 빠르게 인쇄되어 독일 전역으로 퍼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표준 독일어가 성립되는 과정의 숨은 공로자였던 셈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의 성경도,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말하는 표준 독일어의 형태도 훨씬 더디게 정립되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독일 통합의 시작점은 마인츠의 포도즙 기계와 작은 활자, 잉크에서 이미 찍혀져 나오고 있었을지 모른다.





p.s-인쇄술을 주로 하되 과학적 내용을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쉬운 수준으로 곁들이려다보니 전공자나 관련 업계 종사자분들이 보시기에 몇가지 생략되거나 어설프게 보이는 부분들이 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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