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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fore Anyone Else Dec 02. 2021

나는 31년 차 인테리어 디자이너이다.

내 생애 최초 전용 아지트 만들기 프로젝트


나는 31년 차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내가 만든 디자인을 통해 누군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이 일이 좋다. 특히 새로운 경험일수록 그 과정은 더 쫄깃하고 짜릿하다. 누군가는 내게 질문한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거냐고 말이다.


내 대답은 바로

”할 수 있는 한 죽을 때까지 때까지 해야죠’



밖에서는 회사를 위해 일하고 집에서는 가족을 위해 일하는


나는 방 네 개가 있는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가족도 네 명이 함께 산다. 숫자상으로만 보면 가족 인원수만큼 N분의 1로 나눌 수 있는 규모여서 1인당 하나씩의 방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방 1은 남편과 내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고 방 2는 아들 1호, 방 3은 아들 2호, 방 4는 서재 및 공부방(공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두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까지는 2층 침대를 써서 둘이 한방을 사용하는 게 가능했으나 서로 한방에 지내기를 거부하는 나이가 된 이후부터는 각자 따로 방을 쓰고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각방을 쓰면 법을 어기는 것처럼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부터 내 방이 필요하다.


내 방을 갖고자 하는 것은 남편과 별거를 하겠다는 게 아니다. 나를 돌보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나를 돌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라! 아~ 상상만 해도 행복해진다. 마치 강아지풀이 내 얼굴을 간지럽게 하는 보드라운 느낌이 든다. 과연 나는 그토록 원하는 내 방을 가질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나보다 누군가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최우선인 삶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내 집에서도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겠다. 직장에서의 퇴근뿐 아니라 가사에서도 퇴근을 가능하게 해 주는 공간 말이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지금 보니 우리 집에서 내가 사용 중인 공간은 안방, 주방, 거실, 서재 등인데 모두 공유 공간들 뿐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내가? 말이 안 된다! 결혼 23년 차가 되도록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문제다. 지금까지 나와 남편은 공용공간에서 살고 있었다. 두 아들들은 자기만의 방을 사용하지만 나와 남편은 자기만의 방이 없이 살고 있다. 아들들보다 못했던 건가?


만약 우리 집에서 내방을 갖게 된다면, 가능하면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이었으면 좋겠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아지트 라야 한다.


그나마 직장은 퇴근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가사는 퇴근시간이 없다. 눈에 띄는 일마다 손이 간다. 멈추지 않으면 끝이 없다. 퇴근 후에는 가사를 하다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다반사다. 출근과 퇴근, 그리고 가사로 이어지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보내는 동안 한편으로는 여유로운 주말을 간절히 기다린다. 돌아오는 주말은 나를 돌보는 것에 시간을 쓸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막상 기다리던 주말이 와도 정작 밀린 가사를 해내느라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갖은 건 쉽지 않다.


우리 집은 그나마도 남편과 아이들이 어느 정도 가사를 분담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절대적으로 내가 하는 집안일이 가장 많다. 소위 말하는 불가침 영역이 있다. 남자들이 잘 못하는, 아니, 하기 싫어하는 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결혼 후 줄곧 맞벌이를 하면서도 남편과 나의 가사분담은 아직도 N분의 1로 나누지 못했다.



왜 이제야 내 방이 필요한 건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100세 시대를 대비해 나의 행복하고 윤택한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8인의 세계 석학들의 인터뷰로 작성된 도서 『초예측』에서 『100세 인생』의 저자 린다 그래튼은 기대 수명 100세 시대에 ‘교육-일-은퇴’라는 3단계 생애 공식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학습과 휴식을 유연하게 배치하며 돈이나 집 같은 유형 자산보다 건강, 적응력, 인맥 등의 무형 자산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사람만이 늘어난 수명만큼 더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조언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노후에 대비하라는 메시지가 필요보다 적었다. 최근 들어 여러 매체를 통해 노후대비의 중요성을 조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젊을 때부터 준비하는 게 베스트라고 조언한다. 정년을 가까이 앞두고 있지만 더 늦지 않게 필요성을 알게 돼서 다행이다. 그 덕분에 마음이 바빠졌다. 막연한 준비가 아닌 구체적인 대비를 해야겠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 윤택한 노후를 준비하게 위해 나는 지금부터 많은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


린다 그래튼의 조언대로 학습과 휴식을 유연하게 배치하여 건강, 적응력, 인맥 등의 무형자산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며 늘어난 수명만큼 더 행복한 삶을 누리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40여 년 전 중학교 사회시간에 평생교육의 중요성을 배웠다. 사회의 변화 속도가 지금보다 한참 느렸던 그 시절조차 평생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1년의 평생교육은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차원이 다르다.


점차 많은 영역에서 사용자에게 편리함을 주는 방향으로 사회 인프라가 변하고 있다. 아마 그 기술을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히도 도태될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핀테크를 예를 들 수 있다. 핀테크로  현금 사용이 줄었고, 스마트폰 간편 인증과 함께 금융거래는 은행을 가지 않아도 모바일로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스마트폰이 없거나 스마트폰으로 은행거래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주류 인프라는 메가트렌드의 방향으로 변화하고 투자가 확대된다. 사용성이 낮아지는 시스템은 점차 비중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 휴대폰에서 011이 사라진 이유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핀테크가 보편화되었듯이 혁신적인 시스템의 출현은  일상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학습을 요구한다. 앞으로도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학습하는 객체일수록 유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기술이 급변하고 있다. 그 속도도 가중치가 있을 정도여서 40년 전에 정의한 평생 공부와는 방법이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인터넷, 스마트폰의 등장과 자율주행, 인공지능, 의학 기술 등의 현격한 발달은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 기술의 발달 속도는 공교육과 시간 차이가 일어나고 있어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들은 필요한 기술과 대학교육의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대학 전공에 의존하지 않고 해당 기술의 나노 학위를 이수한 인재를 채용할 정도이다. 실시간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위해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기술의 변화는 인재를 육성하는 시스템인 학교와도 격차가 있어 졸업 후에도 끊임없이 공부를 하며 세상의 변화의 속도에 적응해야 한다. 그야말로 평생학습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시대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그 변화는 더 가속화되었다. 급속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학습이 더욱더 필요한 시대다.


『초예측』에서 이런 말도 한다.

자기 몸이나 감각이 눈앞에 있는 현실과 만나지 못한다면 정신은 방황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어려워진다.

미래의 나는 눈앞의 현실과 당당하게 마주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다. 당당한 미래의 내가 되기 위해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아지트 공간’이 바로 내 방이다.     


세상의 변화와 함께 하기 위해 적절한 휴식 및 학습과 더불어 꾸준한 글쓰기로 출간 작가가 될 것이다.. 작가 및 디자이너로서 30여 년간 내가 걸어온 분야의 전문가로서 강연자가 되어 나의 경험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고 싶다.


우리 집에서 내가 주로 사용하는 공간은 대부분 가사를 위한 공간이다. 그 공간 안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내 성격상 정리할 게 눈에 띄면 그걸 먼저 해야 한다. 자기 계발에 관한 목표를 정해 놓았다 해도 정리를 먼저 해치우고 싶은 유혹이 생기고 어느새 자기 계발이 옆길로 새는 것이다. 그런 나의 성격을 극복할 수 있는 나만의 아지트 공간은 확실한 대안이 될 것 같다. 나만의 아지트는 끊임없는 가사 노동의 유혹을 차단해 줄 수 있는 장치면서도 약간의 사치를 더해 감정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 그런 아지트라면 내 꿈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동안 수차례 자기 계발 목표를 실패했다. 지금까지 실패 이유를 나 자신에게서만 찾고 있었다. 작심삼일이 될 수밖에 없다면 이제는 물리적인 환경을 개선해서라도 자기 계발에 몰입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찾아낸 해결책이 바로 나만의 아지트 공간이다. 뜻밖에도 이런 결심을 뒷받침해 주는 책을 읽게 되면서 나만의 아지트 공간 욕구에 긍정적인 이유가 생겼다.


스탠퍼드대학교 행동설계 연구소장인 BJ 포그는 그의 최근 저서인 『습관의 디테일(Tiny Habits)』 에서는 변화에 실패하는 원인은 ‘내'가 아니라 ‘접근방식'에 있고 성격상 결함이 아니라 설계상 결함이 원인이라고 한다. 또한 동기와 의지는 신뢰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며 행동은 동기, 능력, 자극이 동시에 작용할 때 일어난다고 한다

BJ 포그 말대로 그동안 자기 계발을 위한 나의 목표를 번번이 실패하던 이유는 내 성격상 결함이 아니라 설계상 결함이었다. 목표가 이루어질 해결책, 바로 나의 아지트 공간은 새로운 설계에 포함되어 새로운 자극이 될 것이다.



뜻밖의 아지트 체험이 준 기회  


2019년 8월 말에 아들 2호가 교환학생 10개월 예정으로 미국으로 출국하고 난 뒤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 2호의 방을 나의 공간으로 점령했다. 아들의 책상은 나의 책상이 되었고 아들의 책장은 내가 읽고 싶은 책들로 채웠으며 방문을 닫으면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나만의 아지트 공간이 되었다.    


책상에는 맥북과 책 두권, 몇 권의 노트 등 을 펼쳐 놓았고 나의 관심사를 위한 독서와 인터넷 서치 및 노트 정리 등을 언제든지 할 수 있게 된 나만의 아지트는 매일 밤 나를 설레게 했다. 이후 나만의 아지트는 직장 퇴근 후 가사로부터 2차 퇴근이 가능하게 유도해 주는 공간이 되었으며 매일 아지트 모드로 빠르게 전환하고 싶어 지는 자극제가 되고 있었다.



아지트는 Play & Pause의 공간


재생(Play) , 일시정지(Pause) , 다시 재생(Play) 버튼을 누르면서 음악을 이어서 듣게 되듯이 아지트에서 24시간 연속으로 머물지 않으나 아지트에서의 활동은 재생과 일시정지의 반복이 가능하다. 나의 하루는 ‘출근, 퇴근, 가사, 2차 퇴근 후 아지트 생활’의 순이며 그중 아지트 생활은 재생과 일시정지의 반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아지트에서의 일시정지는 늘 펼쳐져 있는 책과, 늘 켜져 있는 맥북의 모니터이고 언제든지 다시 이어 재생이 가능했다. 게릴라 아지트였지만 나만의 안식처가 되었고 어느덧 아들 2호의 방이 아니라 나의 아지트가 되고 있었다.


퇴근 후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가 원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서로를 방해하지도 않게 되었다. 남편은 가끔 나의 아지트 방문을 열어 보며 새로운 아지트 전경에 신기해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들 2호가 귀국할 때까지. 그렇게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코로나 19가 선택한 ‘Stay at home’     


2020년 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 19로 인해 전 세계는 팬더믹 상황이 되었고 외부에서의 일상은 모두 차단되거나 제한되었다. 비즈니스, 교육, 운동, 강연, 여행, 쇼핑, 예술, 엔터테인먼트, 외식 등 집 밖에서 가능했던 모든 일상은 바이러스의 감염원 접촉을 피해야 했다. 가급적 집안에 머물러야 했고 원하던 원하지 않던 Stay at home(스테이 앳 홈)은 일상이 되었다.


코로나 19 이전에 가능했던 여러 가지 일정들은 취소되거나 연기되어야 했고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팬더믹의 확산과 장기화는 새로운 현상을 야기했다. 오프라인에 맞춰져 있던 모든 패러다임은 급격히 온라인 패러다임으로 서서히 대체되었고 언제 끝날지 예측불가로 장기화됨에 따라 더 이상 팬더믹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언젠가 팬더믹이 지나가더라도 온전히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비대면을 위한 재택근무의 증가와  강제적인 ‘Stay at home’ 은 집이라는 공간의 재정의가 필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사 정도는 해야 집안의 구석구석 쓰임새를 정리하곤 하는데, 이번 팬더믹으로 인해 이사를 하지 않고도 강제적이고 빠르게  집의 기능을 재정의하게 한다.


집은 의식주 기능의 대명사로 입고, 먹고, 자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달라졌다. 당연히 외부에서 해 왔던 수많은 경험들이 이제는 집안에서 소화를 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 19 팬더믹은 일상의 변화가 필요한 지 묻지도 않은 채 단숨에 모든 것의 변화를 가져왔다.     


나 역시도 수강 중이던 오프라인 강좌는 온라인 동영상과 웨비나 형식으로 대체되었다. 강연자를 직접 만나서 청강했던 때를 비교하면 온라인 수강의 실효성에 의심이 가기도 했으나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이상 온라인 수강을 효과적으로 참여할 방법이 필요했다. 다행히 일시적이나마 나의 아지트 공간에 마련된 책상과 맥북이 유용했다. 다른 가족에게 방해가 되지도 않았다. 자기 계발을 위한 나만의 아지트가 필요하게 된 새로운 이유가 바로 ‘Stay at home’이다      



교환학생을 마친 아들 2호의 빠른 귀국으로 사라진 ‘나의 아지트’


비록 아들 2호가 오기 전까지 한시적 경험이었지만 아지트에서 새로운 나를 채워가는 게 즐거웠고 아지트가 주는 자극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나의 아지트였던 아들 2호의 방은 처음부터 유효기간이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기에 다음 아지트를 준비할 생각도 못했다. 아들 2호가 귀국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누려 볼 생각뿐이었다.


아들 2호는 출국 시 계획한 일정보다 4주 앞당겨서 귀국했다. 미국 내 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한 락다운으로 학교는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었고 필수 일정만을 소화한 채 예정보다 빨리 귀국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나의 아지트도 별다른 대안이 없이 행사 일정이 끝난 팝업스토어처럼 흔적 없이 해체되었다.


10여 개월 만의 아들 2호의 귀국은 당연히 반갑고 기다려온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풍선이 터지듯 아지트가 사라지는 건 분명 아쉬운 일이었다. 아들 2호의 방으로 복원되면서 나의 아지트에 쌓아 두었던 나의 일상과 아이템들은 마땅한 대체 공간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집안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었고 그날 이후 나의 아지트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내 아지트 생활이 정지되었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아지트를 만들 생각도 못했지만 있었다가 사라지는 상실감이 더욱 컸다. 그동안 차올랐던 자기 계발 의욕조차도 사라지고 멍하니 시간은 흘렀다. 나의 꿈과 희망도 사용정지상태가 되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글쓰기를 재개하면서 아지트가 필요해졌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하듯이 나의 새로운 아지트는 식탁에서였다. 다만 식사 시간을 피해서만 사용이 가능했다. 식탁에서는 2호 아들방 아지트에서 처럼 맥북과 노트 등을 항상 펼쳐 놓을 수는 없었다.  



식탁에서 글쓰기는 Play & Pause 가 안 되잖아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지정석 없이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식탁에서의 글쓰기는 메뚜기처럼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글쓰기 몰입이 되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노트북을 치워야 했고, 글쓰기에 사용하는 모든 도구들은 Play & Pause 상태가 아니라 Play & Stop 상태가 되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글쓰기도 Play & Stop을 반복했다. 직장과 가사를 제외한 잉여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에 식탁에서 글쓰기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앞으로 글쓰기를 계속 이어 나갈 계획이다. 그렇기 때문에 Play & Pause에 최적화된 아지트가 절실하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 나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길 때
남도 나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긴다     

몇 해 전 강남의 유명 건강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상담실장은 제품의 탁월한 효능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누가 가장 먹을지 나에게 물었다. 아이들 때문에 갔지만 선문답 같은 그 질문에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몸에 좋다는 제품을 누구부터 먹게 하지? 당초 목적과 무관하게 시부모님과 남편을 두고 고민했다 또는 한창 성장기에 있는 자식들을 먼저 챙길 건지 혼란스러웠다. 고민 끝에 내 대답은 목적과는 달리 시험지 답을 내듯이 착한 며느리 되기를 선택했다. ‘시어머니 먼저 챙겨 드려야죠’라고 했더니 상담실장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어머니!"

"바로 어머니부터 드셔야 합니다"


나는 당황했다. 나의 선택지 중에 ‘나’는 없었다. 내가 건강해야 그다음으로 부모님, 남편, 자식을 즐겁게 챙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아프면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못한다며 내가 가장 건강하고 기분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살면서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나부터 챙기라는 건 부모님도 안 가르쳐 주었으며 학교에서도 배우지 않았는데 설득력이 꽤 있었고 요즘 말로 뼈를 때리는 말이었다. 나부터 챙겨야 한다는 상담실장의 조언은 그날 이후 스스로 나를 존중할 수 있는 가준이 되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이제부터 누구보다 나를 먼저 사랑하고

나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겠다. 


아지트가 없이 글 쓰는 동안 지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BJ 포그의 말대로 글 쓰는 행동을 지속하기 좋은 설계가 되기 위해 아지트를 포함시켰다.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집에서 새롭게 내 아지트를 만들기 위해 가족과 의논했다. 나의 꿈과 희망을 위해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아지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족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기 위해 당당하게 외쳤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가족과 협상하기


나는 30년 차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이 집으로 10년 전 이사 왔으나 지금까지 정작 내 방 또는 내 아지트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분양 아파트를 20여 년 디자인해 왔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도 내가 디자인했지만 나만을 위한 디자인은 없었다.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해왔던 거다. 이제 내가 주인공인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어야겠다. 시대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이제는 나만의 아지트를 당당히 요구한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나만의 아지트 공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진지하게 나누었다. 아들들에게는 각자의 방이 있지만 엄마에게는 엄마방이 없다는 설명에 대해 아들 2호는 충격을 받았다. 한 번도 물음을 가져본 적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나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해 본 적도 없었다. 내방이나 나만의 아지트가 필요하다는 나의 요구에 대해 가족들은 동의를 했고 남편과 함께 구체적인 해결 방법에 대해 의논했다. 당장 집 전체를 바꿀 수 없으니 가장 빠르게 아지트를 만드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남편

“어떤 아지트를 원하지?”


가장 쉽게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생각으로 대답했다.

“음~ 일단, 집 전체를 리모델링할 수는 없으니 우선 책상 하나와 책장 하나면 되겠어.”


남편

거실 한쪽 피아노가 있던 빈 벽을 가리키며 “ 여기에 놓으면 될까?”


“음~ 여긴 책상을 놓게 되면 통로가 복잡해지고, 가족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으면 서로 불편하지”


남편

“책상과 책장만 가져다 놓기만 하면 된다며”      


결혼 전  남편은 ‘신혼집은 어디가 좋아’라고 물었고 나는 ‘나는 당신만 있으면 돼’라고 말했었다. 결혼 전 잠실에 살면서 강남으로 출퇴근했던 나는 결혼 전까지 서울에서의 장거리 출퇴근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 신혼집이 있는 곳은 오래전부터 남편이 점찍어 둔 동네로 남편 직장과 30분 거리였고 내 직장과는 2시간 거리였다.


결혼 이후 시작된 지옥철 출근으로 한동안 오전 내내 쓰러져 지냈다. 남편 왈 그때는 결혼 후 곧바로 퇴직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20년 넘게 맞벌이하고 있다. 갑자기 그 시절이 오마쥬 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번에는 절대 안 돼’를 외치고 있었다.     


“물론, 책상, 책장이면 되긴 하지! 그런데 아무 데나 놓길 바라는 게 아니야.”

남편과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어디가 좋을 지에 대해 의논했다. 그렇게 적당한 해결책을 찾아가던 중 남편은 방 4로 나를 안내했다.     


남편

“아! 저기면 어때?”      


“어디?”

궁금하고 솔깃한 기대로 그 방에 따라 들어갔다.


남편은 구석 한쪽에 있는 수납장을 가리켰다. 아이들 어릴 때 기저귀 등 잡동사니 수납용으로 사용했었고 지금은 제 용도를 못하지만 아직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그 가구를 빼내고 책상 하나를 끼워 놓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사실, 나도 어떤 공간을 원하는 건지 모호했다. 점점 내가 원하는 아지트의 구체적인 모습들이 상세히 떠올랐다. 처음에는 책상과 책장 하나면 된다고 대답했지만, 내가 필요한 아지트는 단지 기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어떤 느낌을 주는 공간인가도 중요했다. 점차 머릿속에 떠오르는 필요조건들을 남편에게 다시 말할 수 있었다.   


나만 전용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어야 하고 나의 아이템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서포트 수납이 필요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석에 박혀 있는 공간이 아니라 여유로운 분위기와 아늑한 느낌의 공간을 원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방은 이사 와서 10년 동안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네.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 보던 책 들도 그대로 있고. 더 이상 필요 없는 책과 물건들을 정리하면 공간의 여유가 생길 거 같아. 불필요해진 물건도 없애고 책장도 바꿔서 이 방을 새롭게 활용하면 어떨까? 아, 이 왼쪽 벽에 있는 책장은 모두 치우고 긴 책상을 놓고 벽에는 선반 책장을 달아볼까? 그리고 책상은 반반 나눠서 당신과 내가 각자의 영역을 구분해서 사용하면 어때? 그러고 보니 당신도 당신만의 공간이 필요하잖아? “    


우리 집 방 4는 서재 겸 공부방이다. 그런데 우리 가족들은 이 방을 PC방으로 부른다. 우리 집 처음으로 PC를 설치한 방이기 때문이다. 디자인 업무를 하면서 사용하던 '서재'라는 명칭은 실생활에서는 왠지 낯 간지러운 표현처럼 느껴졌고 '공부방'이라는 명칭은 왠지 방의 온전한 성격과 어울리지 않아 언제부터인가 장난처럼 부르던 'PC방'으로 부르는 게 익숙해졌다.     


그 PC방은 15년째 사용하고 있는 책장과 책상,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집에 10년 전에 이사 온 뒤로 사용하고 있는 가구 배치가 그대로였다. 오랫동안 충분이 사용했으니 이제 변화를 줘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꽂아 둔 책들도 그대로 있고 세월이 지났으니 불필요한 책과 물건들을 정리해 보면서 그 PC 방을 개조해 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PC방을 새로운 아지트 공간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레었다.


이쯤 얘기하다 보니 내 직업이 뭐였더라 싶었다. 주변 사람들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나의 공간은 늘 모델하우스 같은 집에서 살고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인테리어 디자인 경력 30년, 국내 최고 브랜드 아파트에서 23년 동안 디자이너로 지낸 나였기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호텔 주방장도 자기 집에서는 요리 안 하다고 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요즘 텔레비전에 많이 나오는 백종원 대표는 집에서도 요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세상이 바뀐 건가? 아니면 내가 바뀌지 않은 건가? 아마 백종원 대표가 집에서 요리를 하는 것은 방송과 소셜미디어 때문일 것이다. 콘텐츠로 보여 줄 게 있어야 하니 말이다.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나의 직업과 모순되는 나의 평범한 듯한 일상은 일과 일상의 차이 정도로 이해해 보면 좋겠다. 10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했고, 처음 입주하는 새 집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살던 집에 비해  업그레이드된 공간이자 당시 최고의 아파트였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새로운 변화가 없을 뿐이다.


집이라는 공간은 쇼케이스가 아니라 삶을 담고 있는 곳이므로 디자이너의 집이라 할지라도 드라마틱하게 짖은 변신을 하지는 못한다.


이사 올 당시 새 아파트로써 새로운 인테리어 연출이 필요 없었다. 10년간 소장하고 모아 오던  가족사진 액자, 조명, 가구 등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수준으로도 충분했다. 조명이나 가구를 새로 구입할 경우 기존의 인테리어 스타일을 고려하여 어울릴 수 있는 품목을 선택해 왔다.


말 나온 김에 큰돈 쓰지 않는 효과적인 인테리어 연출 방법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집을 꾸미기 위해 큰 비용을 한 번에 지출하기는 쉬운 결정이 아니다. 큰 비용으로 인테리어 공사를 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취향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 길이 전혀 다르다. 습관처럼 자신만의 인테리어 취향을 연출하는 방법에 조금씩 관심을 가져 보면 좋겠다.


소품, 가구, 그릇, 가전을 선택하더라도 자신만의 일관된 콘셉트와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하는 동안 조금씩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해 가는 걸 추천한다. 물론 한 번에 큰돈을 지불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평소에 인테리어 스타일에 관심을 갖는 다면 효과적인 결정에 도움이 된다.  


자신만의 베이스 스타일 인테리어를 바탕으로 계절이나 공간 사용자의 감정, 이벤트 성격에 따라 포인트 요소에 변화를 주며 전혀 다른 공간처럼 변신을 해볼 수 있다. 이때 포인트로는 가급적 변신을 쉽게 해 줄 수 있는 소품, 그림, 조명, 포인트 의자 등을 적절히 활용하면 자신만의 인테리어 스타일을 드러낼 수 있다.


디자이너니까 쉽겠지라고 반문하겠지만 어렵지 않다. 평소에 관심을 갖느냐의 차이고 요즘은 누구나 셀프 인테리어를 쉽게 할 수 있을 만큼 정보가 넘쳐 난다. 꾸준한 관심이 감각을 높이는 게 도움이 되니 그것만 명심하면 된다.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스타일리시하게 옷 잘 입는 패셔니스타가 많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고 패션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기에 결국 옷 잘 입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관심이 시작이다. 집을 꾸미기 위해 큰돈을 한 번에 지출하기보다 먼저 관심을 기울이면 된다.



나의 아지트 공간이 기대가 된다고?


나의 아지트가 될 나의 방은 어떻게 꾸밀까? 방 네 개, 네 명이 살고 있는 집에서 완전히 독립된 나만의 아지트를 만드는 것은 당장은 불가능하다. 언젠가 두 아들이 독립한 이후라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거주 구성원의 변화 없이 방 하나를 통째로 아지트로 확보하기 어려우니 당장에는 어느 정도의 절충이 필요하다.    


남편에게도 아지트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나의 아지트 만들기로 시작했지만 이 참에 남편의 아지트도 함께 만들면 좋겠다. 남편은 워낙 검소한 편이라 새로운 것에 욕심이 없지만 독서를 좋아하는 남편에게도 아지트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언젠가 EBS 건축 탐구 ‘집’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봤던 프리랜서 부부의 재택근무형 오피스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전망 좋은 기다란 창 앞에 놓인 일자형 책상에서 부부는 절반 씩 나누어 사용하며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처음부터 남편과 함께 쓰는 아지트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지만 이참에 남편도 활용할 수 있는 기다란 책상을 놓고 반반 나눠서 사용하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온전한 내 방의 형태를 갖춘 나만의 아지트는 일단 보류하고 지금 당장 실행 가능한 절충안이 있다는 것과 나만의 아지트 생활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래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이 광고 카피는 가끔씩 나의 기준이 된다.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이후 실행을 계획한다면 영원히 시작도 못할 것이다. 일단 작게 시작하고,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발전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진짜로 내가 원하는 아지트를 갖게 될 것이다.


마스크 앱을 개발한 대학생의 강연을 들으면서 나의 뇌리를 관통하는 말이 있었다. 그들이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민을 했지만 막상 프로그램을 만들고 보니 대부분 쓸데없었다고 한다. 준비가 부족하더라도 일단 실행하기를 조언했다. 실행한 이후에 직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아직은 나의 아지트 취향도 완벽하지 않다. 게다가 끊임없이 바뀌고 업그레이드될 것이므로 계속 보완할 것이다. 나는 아지트가 필요하다는 나의 욕구를 표현했고 가족과 공감하며 집안 한편 에라도 나만을 위한 공간이 생길 수 있음에 감사하고 싶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나의 시작은 나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이제 한발 나아간 것이다. 완전한 나만의 아지트가 현실이 될 그날을 위해 집안 한쪽에서라도 아지트 생활을 당장 시작해야겠다.


나는 31년 차 인테리어 디자이너이다.

나는 곧 나만을 위한 디자인으로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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