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를 뜨는 시간
내가 퀼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 스무 살을 막 넘긴 무렵이었다. 집 근처 아파트 외벽에 걸린 큼지막한 현수막 하나가 나를 붙잡았다. 7층인지 8층인지, 정확한 층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퀼트’라는 단어 하나만큼은 또렷했다. 그렇게 시작된 개인 강습이 나의 첫 퀼트였다.
바느질과 실을 거의 접해본 적 없던 나에게 퀼트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조각천을 재단하고, 패턴을 정하고, 한 땀 한 땀 정확히 이어 붙여야만 비로소 하나의 면이 완성되는 작업. 퀼트는 시작부터 끝까지 목적이 분명한 노동이었다. 무엇을 만들지 미리 정해야 했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그 집중은 나를 옥죄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산만하던 생각을 한 지점으로 모아주는, 정돈된 집중이었다.
그래서 퀼트는 언제나 하나의 이야기를 닮아 있다. 처음의 조각들이 있고, 중간의 연결이 있으며, 마지막에 이르러 비로소 전체의 문양이 드러난다. 일주일에 한 번, 그 교실에 가는 날은 나의 삶에 찍힌 분명한 쉼표였다. 직장과 집을 오가며 반복되던 일상, 그리고 스스로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던 스무 살 중반의 막연한 불안과 갑갑함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그 퀼트 교실이었다.
퀼트는 결과보다 과정이 먼저인 세계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정은 언제나 결과를 향해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괜찮다는 허락 속에서도, 다음 장면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퀼트는 나에게 집중하는 사유를 가르쳐 주었다. 흩어진 마음을 한 점으로 모으는 법, 서두르지 않되 멈추지 않는 법을.
그러나 삶이 바빠질수록, 나는 점점 다른 종류의 사유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공부와 일로 시간이 빠듯해지면서, 예전처럼 정해진 시간에 어딘가를 찾아가 배우는 일이 어려워졌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퀼트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뜨개질을 시작했다.
뜨개질은 퀼트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작업이었다. 재단이 없고, 반드시 도안을 따를 필요도 없으며, 시작할 때부터 끝을 정하지 않아도 된다. 유튜브로 기초를 배우고, 책으로 다듬으며 천천히 손에 익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도안조차 필요 없어졌다. 웬만한 작품은 보고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실의 흐름을 따라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깨달은 것은 기술의 숙련이 아니었다. 뜨개질의 진짜 묘미는 ‘무엇을 만들겠다’는 목적을 내려놓는 데 있었다. 실과 바늘 하나만 손에 쥐고, 그저 떠가는 대로 몇 단쯤 지나고 나면,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의도가 옅어질수록, 형태는 오히려 더 솔직해진다.
그래서 때로는 한두 달은 걸릴 것 같은 큰 작품을 열흘 만에 완성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완성의 순간이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간은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생각이 조용해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해내고 있었다기보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최근에 본 일본 영화 ‘안경’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뜨개질은 공기를 함께 뜨는 거예요.”
이 문장은 뜨개질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사유에 대한 정의처럼 들린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말들,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때로는 중요한 일이에요.”
그 말이 흐른 뒤, 영화는 바다를 보여준다. 모래사장 위에 놓인 의자, 그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여자 주인공. 그녀의 손에는 빨간 실과 코바늘이 쥐어져 있다. 파도는 규칙 없이 밀려오고, 바람은 말을 걸지 않는다.
“뭘 뜨고 있어요?”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마치 그 질문이 처음이라는 듯 대답한다.
“글쎄요? 생각 안 해봤는데요.”
그 대답은 가볍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사유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문장처럼 들린다. 그녀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뜨고 있지 않았다. 목적 없이 실과 바늘을 들었을 뿐이고, 그 행위는 그녀의 사유를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와 함께, 침묵과 함께,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녀 안을 드나들고 있었다. 뜨개질은 생각을 붙잡지 않았고,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빨간 실은 그저 손끝에서 이어지며, 공기와 시간을 함께 엮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끝내 자신이 무엇을 뜨고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뜨개질이 결국 하나의 완성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까칠하고 예민했던 그녀는 어느새 그 실을 다 떠서, 영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팥빙수를 만들던 여자에게 머플러를 선물한다. 그것은 계산된 친절도, 의도된 화해도 아니다. 생각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자연스럽게 타인에게로 건너간 순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떠난다. 팥빙수 여자도, 그녀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영화는 ‘끝’을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바다에 안경을 빠뜨리는 장면이 그렇다. 마치 일부러 남겨둔 흔적처럼. 그 안경을 펜션의 남자가 낚싯대로 건져 올리는 순간, 관객은 직감한다. 그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다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더 이상 낯선 방문자가 아니라,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의 일부였던 사람처럼. 멀리서 비행기가 내려오고, 팥빙수를 만들던 여자가 그녀가 떠준 머플러를 휘날리며 걸어온다. 혼자였던 사유는 이렇게 타인과 연결되고, 뜨개질은 하나의 완성된 관계로 남는다.
그 장면은 말해준다.
뜨개질은 결과보다 먼저 시간을 만들고,
사유는 혼자서 시작되지만 혼자서 끝나지 않는다고.
공기를 함께 뜬다는 것은, 결국 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 말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사유란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소음을 잠시 낮추는 일이라는 것.
뜨개질은 바로 그 상태를 가능하게 한다. 실을 뜨면서 나는 생각을 붙잡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워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생각은 오다가, 가고, 실 사이 어딘가에 잠시 걸렸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뜨개질은 실만 뜨는 일이 아니다. 그 사이에 흐르는 공기, 방 안의 온도, 침묵의 밀도, 그리고 나 자신의 호흡까지 함께 엮는 일이다.
퀼트가 한자리에 앉아 시간을 쌓아가는 사유라면, 뜨개질은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는 사유다. 비행기 안에서도, 카페에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하는 차 안에서도, 바늘과 실만 있으면 바로 이어진다. 그것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늘 곁에 있으며, 특별히 준비하지 않아도 가능한 행위다.
그래서 나는 뜨개질을 명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눈을 감고 호흡을 세는 명상이 아니라, 손끝의 반복을 통해 생각의 결을 느슨하게 푸는 명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오히려 무언가를 부드럽게 계속하는 행위.
퀼트와 뜨개질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진 사유이지만, 나는 둘 다 사랑한다. 언젠가 다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기꺼이 퀼트 앞에 앉을 것이다. 재단을 하고, 패턴을 정하고, 이야기를 이어 붙이는 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뜨개질은 삶의 어디든 스며들 수 있는 사유의 매개다.
오늘도 나는 실을 들고 앉는다. 무엇을 만들지 정해두지 않은 채, 그저 공기를 뜨기 위해서. 그 시간이 쌓여 어느 날 조끼가 되고, 스카프가 되고, 혹은 이름 없는 조각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내가 나로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뜨개질은 공기를 함께 뜬다.
그리고 그 공기 속에서, 나는 다시 나 자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