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 앞에서는 설명이 되고, 낯선 사람 앞에서는 이야기가 된다.
왜 사랑하는 사람은 내 글을 읽지 않는가
가까운 사람 앞에서 나는 종종 말을 설명으로 바꿉니다.
이미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문장이 없어도 충분히 전해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표정이나 맥락, 익숙한 말투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닿을 수 있으리라 믿게 됩니다.
하지만 낯선 사람 앞에서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문장으로 먼저 내보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문장으로 먼저 도착합니다.
이때 말은 비로소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가 됩니다.
설명은 관계 안에서 충분하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문장 위에서 시작됩니다.
텍스트는 생각보다 정직한 매체입니다.
관계가 얇을수록, 글은 오히려 공정해집니다.
호의도, 배려도, 선입견도 최소한으로 개입된 채
문장은 문장 자체로 읽히게 됩니다.
그래서 텍스트는 익명 속에서 가장 또렷해집니다.
사유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려 애씁니다.
사랑은 본래 이해를 전제로 움직이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잘 이해된 상태에서는 끝까지 읽어야 할 필요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문장은 조용히 뒤로 물러납니다.
수전 손택은 텍스트를 과도하게 이해하려 들수록
오히려 텍스트가 닫혀버린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글은 해석되기를 원하지만,
완전히 설명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려 하고,
사랑은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만
글은 다만 도달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 앞에서는
경험이 설명으로 남고,
낯선 사람 앞에서만 비로소 이야기가 됩니다.
설명은 관계 안에서 충분히 기능하지만,
이야기는 일정한 거리 위에서 더 오래 숨을 쉽니다.
사유는 때로, 관계가 얇을수록 더 멀리 갑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글을 읽지 않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이미 나를 알고 있고,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글은 이해 위에 놓이기보다
약간의 거리 위에 놓일 때 더 선명해집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모르는 사람을 향해 글을 씁니다.
그들이 나를 모르기 때문에,
문장이 먼저 도착할 수 있도록.
영화 아네트버닝의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에서는
사랑과 존중, 너와 나 사이의 간극이 글로 도달할수 있는가에 대해 사유하게 해줍니다
아네트는 남편이 자신의 글과 문학의 세계에
함께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에 단절감을 느낍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남편의 소극성 속에서 그녀는 점점 외로워지죠. 부인은 종종 거칠어집니다.
결국 남편은 자신의 사유의 세계로 돌아가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의 세계는 조용하지만, 그 안에서 그는 살아 있어요.
제 기억에 오래남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남편의 새로운 연인은 그의 사유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럽게 존중합니다.
그저 책상 위에 커피 한 잔을 올려놓고 말없이 자리를 비켜줍니다.
그 짧은 제스처 속에서, 사랑의 또 다른 방식이 드러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의 세계에 깊이 동참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함께 들어가는 것보다,
그 자리를 존중해주는 일이 더 가까운 사랑이 되기도 한다는 걸 보여줘요.
커피 한 잔처럼 가볍지만, 그만큼 충분한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