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오래 남는 거리
최근, 나는 한 편의 영화를 보았다. 솔직히 말해, 편안한 영화는 아니었다. 화면 속에는 때로는 구역질이 날 만큼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난 뒤 내 안에 오래 남은 것은 불쾌함이 아니라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여운이었다. 마치 거칠고 차가운 외피 속에 숨겨진 진심을 발견한 것처럼.
영화의 제목은 디태치먼트(Detachment)였다.
그리고 이 영화는, 앞서 내가 붙들고 있던 질문, 배움과 행복, 교육과 인간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다시 묻고 있었다.
주인공 헨리 바스는 대체로 무심한 교사다. 그는 학생들과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고,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지도 않는다. 다른 교사들이 아이들을 훈계하거나 변화시키려 애쓰는 동안, 혹은 아예 포기해 버리는 동안, 헨리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아이들을 대한다. 제목이 말해주듯, 그는 ‘디태치먼트’의 태도를 지닌 인물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거리감 때문에 아이들은 헨리를 신뢰하고, 좋아하게 된다.
헨리는 아이들을 ‘문제아’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존중한다. 강요하지 않고, 침범하지 않는다. 나는 이 태도를 ‘비침투적 존중(Non-intrusive Respect)’이라고 부르고 싶다. 누군가 나를 억지로 바꾸려 들기보다, 말없이 곁에 있어 줄 때 오히려 더 큰 신뢰를 느끼게 되는 순간들처럼, 아이들 역시 그 거리 안에서 안전함을 느꼈을 것이다.
헨리의 또 다른 특징은 감정적 절제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아이들에게 쏟아붓지 않는다. 사실 그는 결코 무감각한 인물이 아니다. 어머니의 자살이라는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이며, 스스로도 단단한 껍데기를 두르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너희들의 고통을 내가 다 안다”라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묵묵히 바라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 담백함이야말로 매일같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처받아온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깊은 어른의 모습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언어였다.
헨리는 문학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성적을 위한 문학도, 교양의 장식물로써의 문학도 아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려 한다. 강의실에서 그가 던진 한 외침은, 영화 속 학생들뿐 아니라 스크린 너머에 있던 나에게도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읽어야 한다.
그리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읽어야 한다.
우리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세상의 모든 잘못된 신념과 악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읽고, 쓰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타인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갇힌 채
조종당하게 될 뿐이다.”
이 장면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교육이 필요한 이유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배움은 우리를 더 편안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깨어 있게 만든다. 더 불편하게, 더 예민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더 자유롭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헨리는 스스로가 지켜온 디태치먼트를 내려놓는다. 한 학생의 죽음을 자신의 거리두기 때문이라고 여기며, 그는 마침내 보호막을 벗고 에리카에게 다가간다. 디태치먼트에서 어태치먼트로의 이동. 그것은 자신의 원칙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변화처럼 보였다.
부쩍 들어 엄마 아빠한테 잔소리가 늘어가는 나를 보면서 내 잔소리에 간혹 한숨을 쉬는 엄마 아빠를 보며,
순리대로라면 자식을 낳아 아이들에게 할법할 잔소리를 부모님에게 늘어놓는 나를 보며 나 또한 한숨이 나온다. 소파에 앉아서 주무시면 안 된다, 길을 건널 땐 반드시 좌우를 살피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추우니까 밖에 나가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기력이 없어 보이면 혈압계를 들고 나와 난리법석을 떨어댄다. 누가 보면 이런 효녀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결국엔 내 성에 못 이겨 오버하는 태도이다. 부모님이 설마 나보다 못하실까 봐... 디태치먼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극성맞은 참견을 멈추고 그냥 바라봐주고 필요한 것만 챙겨주는 그런 무심함을 좀 연습해야 할 것 같다.
아빠의 취미생활로 집이 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무료한 시간을 좀 달래 보라고 수채화그림 그리기 세트를 몇 점 사다 드렸더니 거의 직업처럼 변해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그림 앞으로 달려가신다. 너무 집중해서 어떤 날엔 괜히 사다 드렸나 할 정도로 건강을 또 염려하게 한다. 그런데 갈수록 늘어가는 그림솜씨와 완성하고 나면 너무 뿌듯해하시는 모습을 보니 새로운 그림을 계속 사다 드릴 수밖에 없다. 일단 행복해하시니까.
그리기가 가장 어려운 모네의 작품 세 점을 갖다 놓았다. 이제 이 그림을 그리다 질리시면 그만하시겠지... 다 완성해 놓고 내 방에 걸어놓았더니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이젠 내가 아빠의 완성된 그림을 즐기게 되었다. 엄마는 집에 걸어 놓을 데도 없는데 자꾸 사 오는 나를 욕하고, 나는 안방 주방 거실 내방, 심지어 욕실까지 빈 공간을 찾아다닌다. 더 이상 공간이 없어 화가들의 아뜰리에처럼 바닥에다 늘어놓는다. 그림도 좋지만 열심히 그리고 있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이것도 결국엔 나 좋으라고 하는 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