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면 떠나라!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떨어지면 떠나라!     

드디어 우리 가족은 영국으로 떠나는 국제선 비행기에 탑승했다.

안주머니에는 런던으로 가는 4장의 비행기 티켓이 들어 있다.

아내와 두 아이들이 옆에서 기내식을 먹으며 웃고 나는 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을 바라본다.

오랜 시간 준비한 가족 유럽 여행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가족과 함께 떠나는 유럽여행’ 예전부터 내가 가슴에 품어 온 첫 번째 소원 목록(버킷 리스트)이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대학시절 흔한 배낭여행이나 어학연수는 고사하고 비행기도 타 보지 못했던 나는 배낭을 메고 해외로 떠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나는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백화점 판매원, 택배 기사, 분식점 배달, 공사장 인부 등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용돈을 벌고 학비를 보탰다. 졸업 후 어렵게 구한 첫 직장에서 받은 가벼운 월급봉투는 생활비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 나는 내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유럽여행의 목돈을 단기간에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여행경비 마련을 위한 모래시계 전략을 세웠다. 모래시계는 모래가루가 한 줌씩 떨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북이 쌓인다. 적은 액수의 돈이라도 긴 기간 꾸준히 모으면 목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통장 3개를 만들고 각각 3만 원씩 적금을 부었다. 자동이체로 매달 돈을 꾸준히 모았다. 친구들이 주식을 하거나 부동산에 투자하면 한 번에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유혹했지만 나는 여유자금도 없었고 그런 방식은 나에게 맞지 않았다. 나에게 저금은 단순히 돈을 모은다는 의미를 넘어 나의 꿈을 향해 걸어가는 작은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다 보니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목돈이 필요한 순간들이 찾아왔다. 결혼을 하고 집을 구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살림은 더욱 빠듯해졌다. 적금을 해약하는 것이 아닌지 갈등하는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돈을 쓰는 것은 쉽지만 작은 돈이라도 모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씀씀이를 줄여서 위기를 넘겼다. 우리 가족의 평생 추억을 만들어줄 통장이라고 생각하고 무던하게 적금을 부었다. 아내는 당장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중간에 적금을 해약하기를 바랐지만 나는 인내심을 갖고 버티자고 설득했다. 마침내 직장생활 20년 동안 모은 적금으로 결혼 15주년 기념 가족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인 나는 인생에서 가장 긴 휴가를 내고 한 달 동안 유럽으로 가족과 함께 떠났다. 저렴한 숙소에서 머물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불편한 여행이었지만 여행기간 내내 마음은 풍요로웠다. 우리 가족은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함께 여행했다. 현지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함께 걸었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지하철을 잘못 타고,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을 지나쳤지만 우리는 웃을 수 있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한 아이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냈고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실컷 들었다. 여행을 하면서 아내와 많은 대화를 했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유럽 여행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은 함께 한 시간이 더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여행을 통해 알았다. 우리 가족은 함께 만든 특별한 추억을 간직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4개의 통장을 만든 것이다. 이번에는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와 나 모두 통장을 만들었다. 20년 후 내가 정년퇴직을 하면 우리 가족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 여행을 가기로 약속한 것이다. 아이들은 용돈을 아껴서 매달 5천 원씩 저축을 시작했고 나와 아내도 생활비를 아껴서 각자 매달 3만 원씩 작은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혼자 어렵게 시작했던 나의 여행 계획은 이제 가족 모두가 함께 떠나는 세계일주의 꿈으로 커졌다. 지금 당장은 경제적으로 부족하지만 우리 가족은 지금 행복하다. 가족 모두 함께 떠나는 세계 일주의 모래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있고 미래를 기대하는 시간에도 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