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벼락같이 찾아온 손님 '림프종입니다.'
주도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누가 시키는 건 잘하는 편이다. 이번에도 선생님의 처방대로 2주 이상을 착실히 잘 버텨냈지만 나의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안 좋아지기만 할 뿐. 변함없이 긴 대기를 뚫고 선생님을 드디어 영접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표정이 예전과는 좀 다르다. 조직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다는 말에 더 확신이 실려 있었다. 결국 처방전이 아닌 조직검사 의뢰서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조직검사라니… 평생 해볼 거라고 상상도 해본 적 없던 것.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변에 갈 수 있는 대학병원에 전화를 해봤지만 역시 쉽지 않다. 대한민국에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다행히 2주 후에 오라는 곳이 있어 예약을 하고 남편과 심난한 2주를 보냈다.
역시 대학병원이라는 곳은 환자도 많고, 그만큼 대기도 길다. 영어에서 긴장된다는 표현은 butterflies in stomach 라던데 정말 뱃속에 수천 마리의 나비들이 퍼드덕 거리는 느낌이다. 현기증도 나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면 확답을 들을 수 있겠지 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버티고 있었지만. 젊디 젊은 훈남 선생님이 반긴다. 역시 갸우뚱… 너무 젊어서 잘 모르는 건지 내심 또 불안해진다. 아... 좀 더 연륜 있는 교수님으로 예약할걸... 모든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참.. 뉘 집 아들인지 잘 컸다... 우리 아들도 저렇게 컸으면..이라는 대한민국 맹모의 마음도 든다. 걱정은 하고 있으나 내 상태가 어떤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시답잖은 생각도 들었나 보다. 확답도 받지 못한 채 내 조직과 불안함만 남기고 결과가 나오기 2주를 또 기다렸다. 뭐만 하면 2주다. 빠르게 가던 시간이 결과만 기다리려고 하면 참으로 더디게 가는 건 어찌 보면 신기한 일.
2주가 지나 결과가 나오는 날, 그리고 내 생일. 병원 가는 길은 생일이고 뭐고 없다. 제발 생일 선물로 좋은 결과만 받았으면. 오 신이시여! 종교는 없으나 일단 급한 대로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에 알라신까지…온갖 신들을 다 모아 본다. 내 기도가 약했나. 아니면 한꺼번에 다들 소환해서 교통 혼란이 일어난 걸까.. 이번에도 확실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젊고 훈훈한 선생님은 다른 검사를 하나 더 해봐야겠다며 동의서를 들이민다. 유전자 검사. 드라마에서 나오는 잃어버린 자식을 찾을 때, 혹은 막장 드라마에서 나오던 그것 아닌가? 그런데 내 피부 때문에 유전자 검사라니.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이 검사를 해야 결과가 명확하다고 하니 사인을 했다. 덜컥 사인을 하고 보니 수백만 원짜리 검사는 아닌지.. 겁이 났다. 병원비가 없어 집에서 고통을 참아야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백만 원짜리 검사를 턱턱 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난 대한민국의 아줌마 아니던가. 미혼시절이면 못했을 그 질문… 바쁜 간호사 선생님들 중 눈이 마주친 한 선생님을 붙잡고 물어본다.
“이거 검사 비용이 얼마나 될까요?”
간호사선생님들도 이리저리 찾아보지만 알 수가 없단다. 기다리라는 말에 초조하게 앉아있으니 훈남 선생님이 진료실에서 나와서 직접 알려준다. 많이 바빠 보였는데 친절하기까지 하다.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는 아줌마가 비용을 물어보니, 돈에 궁해 진료를 그만둘 것 같이 처량해 보였을까? 측은지심이 가득한 그 선생님은 대략적인 비용을 알려주고는 다시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백만 원이 넘는 검사는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 비극적인 상황은 겪지 않아도 되겠구나... 안도했다.
이번엔 1주일만 기다리면 된다. 역시 비싼 검사라 그런가. 결과도 생각보다 빨리 나온다. 일주일 있으면 확실한 결과가 나오겠지. 나보다 더 예민해진 남편은 인터넷을 무수히 찾아봤고, 우린 서로 제일 좋은 상황을 예측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마 남편도, 나도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을 테니까.
검사 결과 나오기 하루 전. 오전 아이의 등원준비로 전쟁 중인데 결과가 미리 나왔는데 올 수 있냐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인터넷에서 검사 결과가 안 좋으면 나오자마자 급히 연락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예약된 날짜에 천천히 오라고 한다는데… 하루 전에 연락이 온 것이다. 하루 전에 연락이 오다니. 결과가 너무 안 좋았으면 더 일찍 연락을 했겠지? 안 좋아서 미리 연락한 것 치로 하루면.. 그냥 스케줄이 비어서겠지. 애써 긍정회로를 돌리며 아이를 서둘러 등원시키고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이면 드디어 끝이다. 좋든 아니든 결판이 나겠지.’
병원의자에 앉으면 현기증이 나는 건 놀랍지도 않은데 이번엔 유독 더 심했다. 그만큼 더 긴장해서였을까. 훈남 선생님이 이번엔 안타까운 표정으로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 본다. 혈액 속에 B세포가 정상범위를 넘어서서 피부의 문제가 아닌 혈액의 문제이니 전과를 해야 한다는 말. 그때까지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냥 그런 병인가 보다...... 설명을 계속 이어가던 선생님은 다시 말해 병명은 림프종이라 했다. 림프종이면… 인터넷에서 말하던 그것.. 혈액암 아닌가? 그럼 내가 암? 나에게 죄송할 이유가 하나도 없던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런 결과를 알려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 치료 잘 받으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친절하다. 선생님의 따뜻했던 말은 나에게 오기도 전에 차갑게 식어버려 마음이 답답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인생 계획에 암이라는 건 없었는데? 눈물이 났다. 대기 중인 환자들이 무수히 많은 것도, 보호자 없이 나 혼자였다는 것도 아무 상관없었다. 다음 진료 예약도 끝나고 수납도 끝나고… 더 이상 할 것은 없었지만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난 어떻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