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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 Nov 01. 2023

변해버린 건 마음이 아니야

믿었던 엄마 입맛의 배신

촤르르...     


빨간 양념국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하얀 떡이 쏟아진다. 하얀 설탕이 폭포수처럼 내리고 나면 다음엔 msg가 한 스푼. 물론 국자로 한 스푼이다. 길고 긴 시간을 버티고 나면 양념이 쏙 밴 매콤 달콤한 떡볶이가 된다. 재료가 많이 있지도 않은 그 심플한 떡볶이가 딱 내 취향이다. 무심한 듯 재료를 아끼지 않는 사장님의 마음 덕분인지 하굣길 그 앞을 그냥 지나가기는 어려웠다.

어릴 때 일요일이면 나의 아빠는 짜파게티 대신 너구리를 끓여냈다. 애주가였던, 지금도 애주가인 아빠에게 숙취를 해결하기에 그만한 음식이 없었던 이유였을까. 순한 맛 라면이 따로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아이들을 위한 상을 따로 차려낼 만한 자비로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식들은 그냥 차려진 밥상, 아니 라면상에 자연스럽게 착석하고 맛있게 먹으며 매운맛에 길들여지는 것이 당연했다. 너구리를 시작으로 매운맛세계에 입성했고 점점 매운 음식들을 좋아하게 됐다. 




입맛이 비슷한 반쪽을 만났다. 취미도, 성격도 맞는 게 하나 없었지만, 음식 취향만큼은 비슷했다. 주말 데이트를 할 때면 주변의 매운 음식들을 찾아다녔다. 신혼의 달콤함은 체중과 비례하는 걸까. 우리의 매운 음식 사랑은 끊이질 않아 떡볶이, 매운 족발... 등으로 신혼 생활을 채워나가며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게 사이좋게 지방도 쌓아갔다.

음식 취향이 비슷한 남녀가 만나 2세를 낳았으니 입맛이 어떨지는 뻔한 일. 두 돌이 갓 지난 아이는 어른 음식들에 관심을 보이더니 급기야 떡볶이를 탐내기 시작했다. 보드라운 아이 입속에 강한 음식을 넣어줄 수 없어 궁중떡볶이도 주고, 매운 떡볶이를 씻어서도 줬지만, 엄마, 아빠가 먹는 것과 다름을 금세 알아차렸다. 결국 남들보다 일찍 칼칼함에 매료된 나의 첫아기는 불닭볶음면도 무섭지 않은 어린이가 되어있었다.   

  

“밥 차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인터넷에 나오는 열혈 엄마가 되어 보고자 노력을 기울이면 아이는 시큰둥...    


“오늘은 엄마 힘드니까 대충 먹자!”

...

“밥 더 줘!”

자식들이 엄마에게 해주는 가장 반가운 말이 ‘밥 더 줘.’가 아닐까? 듣기 힘든 그 한마디가 대기업의 도움을 받아 10분 만에 뚝딱 차려지니 이렇게 듣기 쉬운 말이었던가.




초음파를 보고 “딸이네요.”라는 말을 듣기 전부터 로망이 하나 있었다. 딸과 오붓하게 카페에서 티타임을 갖는 것. 거기에 더 디테일해지자면 아이는 레이스가 나풀거리는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100미터 밖에서도 보일 법한 큰 리본을 머리에 하고 있다. 달콤한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나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는 것. 이루기 힘든 꿈이었고, 너무 큰 기대였나. 기대를 했던 만큼 거리가 멀어지면서 내 속도 더 쓰라렸다. 아이는 리본은커녕 추노 머리에 매일같이 트레이닝 차림이다. 케이크는 장식품일 뿐 매일 곱창볶음과 떡볶이를 외치는 딸을 얻었다. 

생일에는 곱창, 속상한 일에는 떡볶이, 오늘은 아무 일도 없으니까 얼큰한 주꾸미볶음. 인생 2회 차인가? 과연 11세 여아의 입맛이 맞는 걸까... 의심이 될 지경이다. 물론 장점도 있다. 아이에게 속상한 일이 있을 땐    

  

"오늘 저녁에 떡볶이?"     

@ pixabay

한없이 처졌던 입꼬리가 단번에 올라갔다. 기쁨을 참지 못하는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이러다 커서 남친과 다툰 후에도 음식 하나로 쉽게 풀릴까. 어미는 미래에 있을지 모를 딸의 연애사까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걸쭉한 40대 아저씨의 입맛을 가진 아이가 있는 우리 집 냉동실 한편엔 언제나 밀키트가 숨어있다. 냉동 주꾸미, 양념된 제육볶음, 그리고 매콤한 떡볶이 재료들까지. 대기업, 중소기업출신이든 상관없다. 빨간색이면 오케이. 특히 떡볶이 떡은 없으면 안 되는 그야말로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다

가끔 들르는 친정엄마가 우리 집 냉장고를 열어보실 때면 금세 표정이 흙빛으로 변한다.


‘난 널 이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어떡하니...’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서 드러난다. 결국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저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어? 너무 그런 것만 먹이지 마라.” 


아마 엄마에게 난 아이가 좋다는, 건강에 도움도 안 되는 자극적인 것만 먹이는 불량엄마로 보였겠지. 칠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아직도 자식 걱정을 하고 계신 엄마에게 손녀 건강이라는 또 다른 걱정을 더했다.



하지만 이제 문제는 나다. 나 닮아서 매운 것도 잘 먹는다고 좋아하더니, 이제 내 입맛이 변해버린 것이다. 평생 먹을 매운 것들을 아이의 취향 덕에 10 년 동안 다 먹어버린 기분이었다. 특히 내 뱃살의 주된 범인이 떡볶이라는 걸 알고 난 후 떡볶이와는 더 거리 두기를 하고 싶었고, 해야만 했다. 세상엔 빨간색 음식 빼고도 경험해 볼 맛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색 음식 말고, 이제는 알록달록 예쁘게 장식해 둔 예쁜 음식들도 경험해 볼 차례다.   

@pixabay

외식 메뉴를 고를 때마다 일단 나는 “떡볶이 빼고!”를 외쳤다. 딸바보 아빠 덕에 내 의견은 살포시 무시되었지만. 외식메뉴를 정하면서 식당에 떡볶이가 있는지 없는지, 없다면 매운 것은 있는지를 살펴본다. 치킨집을 갈 때도, 피자가게를 갈 때도.(신기하게 우리 동네에는 파스타와 떡볶이를 같이 파는 곳이 있었다.)     


어쩌면 딸에게는 내가 배신자일지도 모른다. 엄마 때문에 입덕했는데 엄마가 탈덕한다고? 


응, 난 이제 빨간, 아니 시뻘건 음식들을 떠나 달콤한 음식 세상으로 가고 싶다.


제일 좋아하는 라테도 맘껏 마시고, 폭신한 빵의 세계도 맛볼 것이다. 달콤함과 새콤함의 세계도 경험해보고 싶다. 너와 함께하고 싶은데 너도 나의 세상으로 와 주면 안 될까? 티타임을 함께하는 사이좋은 모녀는 드라마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변해버린 입맛과는 다르게 내 꿈은 아이가 더 크면 기차를 타고 전국 유명 맛집 투어를 하는 것이다. 유명 떡볶이집도 가보고, 이글이글 막창도 구워 보고 싶다. 서해안에 들르면 대기업 출신이 아닌 팔딱거리는 주꾸미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떡볶이를 향한 내 마음은 변했지만 아이를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니 오늘도 난 새로운 떡볶이집을 찾아보고, 더 맛있는 양념 레시피를 검색해 볼 것이다. 기막힌 걸 찾아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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