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차 엔지니어가 복기하는 악인전 1편
악인전의 첫 포문을 열 주인공은 나의 사회생활 첫 직위자,
즉 팀장이었던 해외 화공플랜트 건설현장의 공사팀장이다.
사회생활의 첫 단추는 모든 게 생소하고 어리숙했다.
어렵게 입사한 나의 첫 직장인 대기업 종합건설사 A건설은 신입사원 의무 현장 파견 장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었고, 나를 포함한 동기들은 그 야심 찬 교육의 희생양이 되어 국내외 현장으로 떠나갔다.
하필이면 출국일이 나의 생일이라 기분은 더없이 우울했지만, 공항까지 배웅 나와준 소중한 친구들 덕에 큰 위로를 얻고 미지의 땅으로 향하게 되었다.
출국 후 비행기에 몸을 실어 경유지에 도착,
환승 후 두 번째 비행 끝에 차량으로 또 한 번 환승 후 2시간을 더 이동해야 했다.
차를 타고 현장으로 향하는 길, 창밖 너머 끝이 없는 지평선을 볼 수 있었다.
영하 28도의 혹한보다 나를 더 얼어붙게 만든 건 그 황량한 풍경이었다.
비행기 2회와 차량 이동을 포함하여 인천공항을 출발한 이후 현장까지 10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드디어 그와 대면하게 되었다.
첫 개인면담 시간. 그는 본인을 예전에 '한 기업의 CEO의 자리'에 있었다며 소개했다.
(영세한 전기공사업체를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기 밑에서 1년 있으면 다른 부서 동기들이 3년 배우는 것 이상 배울 것이라고 호기롭게 장담했다.
어리고 미숙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앞으로의 현장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당시 같은 현장에 근무했던 동갑내기 동기 도형(가명)은 말했다.
"사람 첫인상만 보고 모른다. 두고 봐야 알아."
그 말이 복선이 되었다.
이튿날 팀장은 본인의 '비법 수첩'을 나에게 건네주며 공부하라고 했다.
현장에서 쓰는 기술용어들과, 일부 현지 단어들의 한국어 발음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크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없어 실망스러웠다.
진정한 '교육'은 따로 있었다.
나에게 수첩을 열심히 보고 있으라고 말한 그는 현장을 보러 나간다며 차량을 배차한 뒤 같은 팀 소속의 행정사무 담당 현지인 여직원과 함께 장시간 자리를 비웠다.
'현장을 나갈 거면 나를 데려가야지, 왜 사무를 담당하는 여직원을 데리고 나가는 걸까?'
께름칙한 기분은 곧 소름 끼치는 현실로 다가왔다.
나이가 50대였던 그는 한국에 처자식이 있었고, 그의 업무용 노트북 배경화면은 가족사진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늘 현장에 근무하는 현지인 여직원들의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현장에는 각 공종별 공사팀과 공무팀, 관리팀, 품질관리팀, 안전관리팀 등 다수의 팀이 있었다.
각 부서별로 행정사무와 통번역 등을 위해 현지인 여직원을 1~2명 현장채용하였고,
청소 등 사무실 미화를 전담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근무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이른 아침, 내 옆에 앉아있던 팀장이 우리 팀 주변을 청소하고 있는 어린 여직원을 가까이로 불렀다.
그리고 직접 핸드크림을 손수 발라주는 장면을 목격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소름 돋는 장면이다.
애써 못 본 척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 그가 말했다.
"내가 저 아이 아빠나 다름없다. 내가 용돈도 준 적 있고, 나중에 대학에도 보내줄 거야."
나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후로도 나는 '전기직 엔지니어'라는 직무 정체성이 무색하게 현채직 여직원보다 못한 잡부로 전락했다.
하루는 또 나를 남겨두고 여직원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들어와서는, 급한 일이라며 캠프의 본인 방에 있는 열쇠를 가져 다 달라고 하였다.
현장 사무실에서 캠프까지는 차량으로 20분 정도 거리였다.
식사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미안하다며 본인도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잡일도 업무 중 하나지.' 하고 다녀왔는데,
나중에 도형이 알려주길 내가 자리를 뜨기 무섭게 밥을 먹으러 갔다고 한다.
당시 나는 영어를 사용하며 외국인들과 일하는 게 재미있었고, 영어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느껴서 다른 부서의 현지인 직원들이나 인도, 필리핀, 파키스탄 등 다국적의 글로벌 스태프들과 교류하며 가깝게 지냈다.
어느 날 IT를 담당하는 현지인 직원이 나에게 귀띔하길, 팀장의 외장하드에 야동이 2 테라나 있다고 말했다.
건설업계가 지저분하다는 이야기는 파견 전부터 직간접적으로 들었지만, 내 직속상사로 이런 '진성 여미새'를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더군다나 비교적 건전하게 유흥업소나 다니던 소문 속의 사람들과 다르게 이 사람은 내 눈앞에서 직접 나이 어린 여자를 만지고, 현채직원과 드라이브를 즐기며 어떻게 해 보려는 게 빤히 보여서 서서히 혐오의 감정이 싹 틔우게 되었다.
어느 날은 퇴근 후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 지금 캠프냐? XXX호 방으로 와라."
'설마...?' 하면서 간 그 방은 같은 팀의 그 현지인 여직원의 숙소였다.
그 여직원은 옆 팀의 다른 로컬 여직원과 한 방에 머물고 있었는데, 여성 둘과 팀장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혼자서 둘을 감당하기가 부담되었던 걸까? 아니면 외부의 시선이 두려웠던 걸까?'
이유가 무엇이건 나는 그의 계집질에 이용당하고 있었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며 힘겹게 자리를 지키던 중 듣기 거북한 말을 들었다.
"A양 참 괜찮지 않냐? 할 수 있으면 내가 만나는 여자라고 하고 싶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첫 현장에서 인고의 시간이 흘러가며 여미새 팀장과 함께 지낸 지도 수개월이 지났다.
크고 작은 해프닝은 꾸준히 일어났지만, 여전히 기술적으로 배우는 건 없었고 볼 꼴 못 볼꼴 다 보면서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 무렵 팀장이 나를 불렀다.
" A양의 방에 마실 물이 다 떨어졌다고 하니, 캠프에 가면 네 방에 있는 물을 가져다줘라."
기분 나쁜 업무 외 지시였지만, 나는 캠프로 돌아가 묵묵히 생수를 들고 여직원의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현지인 숙소로 이동 중에 조금 늦게 퇴근 후 돌아오는 팀장과 마주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좋지 않은 표정으로 걸어오던 그는 다짜고짜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가냐?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니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라! 알겠냐?"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인간이 나에게 저런 말을 한다고? 당신의 심부름을 하는 건데?'
생각해 보면 왠지 모를 이유로 기분이 상한 팀장이 화풀이를 한 것이고, 개구리가 돌에 맞은 꼴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모욕감을 견디며 현장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고,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결론 내렸다.
팀장이 휴가를 떠난 사이, 현장소장실을 찾아가 개인면담을 청했다.
"저 도저히 팀장이랑 같이 일 못 하겠습니다."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 생각으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소장님으로부터 예상외의 반응이 나왔다.
"그래. 네가 힘 들만 하다. 그 사람, 팀장 급이 안 되는 사람이야."
팀장의 평판은 이미 윗 분들 사이에서 좋지 않았고, 내가 방문을 두드렸을 때 소장님은 직감적으로 예견하셨던 것 같다.
소장님은 나의 부서를 옮겨주기로 하셨다.
팀장은 휴가 복귀 후 회의실로 나를 불렀다.
"이야기는 알고 있다. 다른 부서로 간다며?"
팀장은 첫 대면 당시와 같이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나는 완강히 옮기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그 간 팀장 밑에서 느낀 감정들을 털어놓았다.
"내가 너한테 너무하긴 했지..."
체념한 팀장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없니?"
마지막으로 주제넘게 그를 위해 뼈 있는 조언을 남겼다.
"현장에서 팀장님을 보는 시선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한테 여자 꽁무니 쫓아다니지 말라고 하셨죠?
팀장님께서도 주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첫 팀장과의 부서생활은 종결되었다.
수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임팩트를 주었던 그 팀장은 이후 계약연장 문제로 공사를 마무리하지 않고 중간에 복귀를 하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조차 좋지 않았다.
후임으로 오신 팀장님이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현장 사안에 대해 문의했는데,
"제가 이제 실무를 안 합니다."
선을 긋고는 복귀하는 날까지 현장 어딘가에 숨어서 조용히 지내다가 돌아갔다.
끝까지 책임감이 없는 모습이었다.
비로소 팀장의 얼굴을 보지 않게 된 나는 이전보다 마음을 놓고 새로운 팀원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이후 여러 소문으로 그를 접하게 되었다.
캠프에 있는 그의 방에서 여자속옷이 나왔다거나,
여자와 얽힌 다른 문제가 불거져서 현장에서 급하게 복귀하게 되었다는 등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럴듯한 소문들이었다.
얼마 뒤 본사 인사팀으로부터 한 메일을 받게 되었다.
전기팀장의 계약연장을 앞두고 현장에 같이 근무한 직원들에게 평가를 묻는 메일이었다.
당초 후임으로 오신 새 전기공사팀장님이 먼저 그 메일을 받았는데, 본인은 그에 대해 잘 모른다면서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비밀메일'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받아봤다.
메일을 확인하기 전에 보안유지 서약과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나는 개인적인 복수심에 회사를 위하는 애사심과, 사명감을 더해 긴 답장을 보냈다.
내 메일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복귀 이후 연장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은 파견 종료 후 한국에서 가진 같은 현장에 근무했던 선배들과의 술자리였다.
먼저 본사로 복귀한 한 선배가 근무 중에 그 팀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회사 근처에서 만났는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찌른 것 같은데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런 거 아닌데.."
아직도 자신이 왜 퇴출당했는지 모르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당신을 찌른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남긴 추한 흔적들이라고.
비로소 나의 첫 악인전은 통쾌한 마침표를 찍었다.
여러분도 직장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선을 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그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셨는지, 혹은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댓글로 들려주세요.
나는 내가 야근하는데 아랫것들이 없으면 기분이 나빠.
다음 2편에서는 1편의 팀장을 잊게 만들 정도의 역대급 빌런, '국내현장 LE'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짐이 곧 회사"라 믿으며 책상 밑으로 정강이를 걷어차던 그와의 지옥 같았던 국내 현장생활의 기록. 대기업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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