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by 밤호랑이

나에게 제일 순수했던 때가,

순진하고 순정파였던 적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스무 살 넘은 봄날 어느 때였는데, 친구들이 부러워할만한 미인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산신령 같은 내 친구는 아주 오랫동안(15년 이상) 그 여성의 외모와 더불어 같이 만나서 얘기 나눴던 예전 장면을 떠올리며 자기가 더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했을 정도였다.


굳이 어떤 외모였냐고 물어보면 이 두 여성의 외모를 반씩 섞으면 정확할 것 같다.

그 친구는 둘째였고 친언니와 자취를 했던가 아님 본가였던가 아무튼 같이 사는데, 둘의 머리카락으로 화장실 하수구가 자주 막힌다는 거였다. 나는 그 말을 두고두고 간직하고 있다가, 내 책 제일 소중한 페이지에 넣어두었다가 지하철 객실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아저씨로부터 배수구에 집어넣었다가 빼내면 머리카락이 술술 빠져나온다는 플라스틱 꼬챙이를, 아니 내게는 요술막대를 구입했다 두 개나. 하나는 내가 쓰고 또 하나는 그 친구에게 선물해야지. 만약 그 작업이 곤욕스럽고 힘들다면 내가 기꺼이 얼마든지 하수구를 뒤져서라도 불편하지 않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를 영영 가지고 싶다는 이상한, 설익은 생각으로 관계를 망쳐버리고, 결국 그 요술막대는 선물하지 못했다.


그때가 그리운 건 아니지만,

만약 다시 마주칠 기회가 있다면,

미안했노라고 얘기하며 핫초코 한잔과 요술막대 두 개를 건넬 것이고, 지난날을 견디느라 살아내느라 수고 많았다고, 좀 더 힘내보자고 한번 호탕하게 웃어볼 것이다.

나는 어딘가 어색한 풋사과였고,

아마도 그 친구는 정말 인기 좋은 복숭아 혹은 자두였지만,

여전히 풋사과가 어딘가 애틋하고 정이 간다.

떫어서 다시 입에 넣기도 뭐 하고 손도 안 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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