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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며늘희 Sep 22. 2020

초대여정

격식없는 시모ㅣ뒷담화 하는 글

12. 초대여정



신혼집으로 처음 이사한 날 우리는 박스 한 개와 이불 하나를 들고 왔었다.

각자 살고 있던 집이 빠져야 했기에 결혼식 후에 천천히 집을 합치기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님은 아무리 그래도 결혼식 다음날부터는 꼭 같이 살아야 한다고 계속 말씀하셨다. 집이 나가야 돈이 들어오고 그 돈으로 신혼집을 구할 수 있건만 그냥 무조건 먼저 집을 계약하라고 하셨다. 나는 한두 달 떨어져 사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우리 둘이 각자 살아가던 집이 일찍 처리되었다면 아마 먼저 같이 살고 있다가 식을 치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1월부터 내놓은 집은 연말이 다가올 때까지 나가지 않고 있었으며 결혼식을 올렸다고 해서 꼭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언제 계약자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큰돈을 들여 신혼집을 계약해 놓을 순 없었다. 여러 번의 자취생활을 겪으면서 다음 이사를 위해 미리 계약을 해 놓았다가 이전 집에 들어올 사람이 없던 경우 보증금을 몇 개월 뒤에나 받은 적도 있었다. 결혼 준비로 안 그래도 빠듯한 지출에 신혼집을 위한 무거운 대출을 하나 더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집이라는 것은 일찍 나서서 둘러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다리가 맞아야 되는 것이다. 그것만 맞으면 원하는 집을 계약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시모는 나에게 욕심내지 말고 저렴한 집에서 시작하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 직장이 가까운 곳으로 알아보라고 하신다. 여기서 저렴한 집은 남편 직장과 멀고 남편 직장이 가까운 지역은 시세가 높다고 말씀드리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시모의 말처럼 아이러니하게 앞뒤가 맞지 않는 그런 집을 찾는 건 더욱 어려웠고, 무엇보다 각자 살던 집이 나가지 않고 있으니 나는 결혼식 준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다 해결될 것이고 우리를 위한 집이라면 생각지도 않게 언젠간 구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 부부에겐 운이 좀 따랐다. 결혼식을 앞둔 전날 내가 살던 집은 정말로 따단! 하고 구세주가 등장하여 계약해 주었고, 다행히 신랑의 집은 그보다 전에 처리되었던 터라 그 짐을 본가에 맡긴 터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많은 짐을 모두 가져올 수 없어 내일 당장 출근할 수 있는 상태로 필요한 것만 급하게 가져왔다. 그렇게 파란 플라스틱 박스 하나와 함께 덮을 이불만이 먼저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침대도 없는 집에 매트리스부터 구입해서 잠자리를 마련했고, 인터넷 연결을 시키고 티브이를 놓고 각자의 이삿짐을 옮기니 얼추 모양새가 갖춰졌다. 전셋집이었고 아이가 생기면 망가질지 모르는 모든 물품에 돈을 아끼자고 우리 부부는 합의했다. 남편이 사용하던 긴 책상은 식탁으로 대체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화장대 색감에 맞춰 거실장을 구입하고 필요한 집기류는 이케아와 다이소를 이용했다. 냉장고도 세탁기도 내가 사용하던 것이 큰 것이니 조금 더 사용하다가 다음에 집을 사면, 혹은 다음 집으로 이사 가게 된다면 구입하기로 하였다.


한 달은 서로의 자취집이 빠지고 이사를 하느라_ 그리고 그다음 달은 모아진 짐들을 정리하느라_ 청소하느라_ 필요한 것을 갖춰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서로가 함께 살아가게 된 첫 공간이 너무 좋았고 세상에서 내 집이 가장 깨끗하게끔 정돈했으며 그로 인해 내 눈에는 가장 예뻐 보였다. (남편 취향보다는 내 취향에 남편의 안목을 맞춰버렸으니 ㅋㅋ)



아빠 엄마는 너희 둘이 살아갈 집 알아서 구해라- 라는 주의였고 시부모님은 따라나서면서 같이 계약하는 날까지 함께 했었다. 비어있는 집들 중에 깨끗하고 괜찮은 방향으로 계약하고 싶어 4군데 정도 보려 했건만 시모는 내손을 확 잡아끌며 두 개만 보고 그냥 정하라며 단호하게 뭐라고 하였다. 매매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2년은 살아갈 집인데 많이 돌아보게 하시 않으실 거라면 그리고 따라다니기 힘드시다면 오시지 말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집에서 보태준 돈과 그동안 서로가 모아 온 돈 그리고 함께 갚아 나아가야 하는 대출로 묶인 집을 알아보는데 어머님 의견이 왜 중한지 모르겠었다.


다행히 두 집 중에 맘에 드는 집이 있었고 그렇게 계약하게 된 신혼집이었다. 어머님은 두 명이서 살게 될 집이 크다고 연신 말하시며 너희 뭐할라고 저리 큰집을 구하냐- 둘이 숨바꼭질하려고 그러냐- 는 소리를 몇 번이고 반복하신다. 시어머니가 생각하기에 신혼집으로는 큰집이었다. 나 또한 넉넉하다고 생각된 집이었지만 이 근방에 집들이 모두 이렇게 빠져있었으며 아무리 둘이산다고 하더라도 원룸이나 투룸에서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시모는 집을 구할 때부터 비싼 집구 하지 말라고 시시콜콜 말했고, 그러면서 남편 직장에 가까운데 구해야 한다는 말을 또다시 귀에 딱지 박히도록 또다시 하고 있었다.

남편 직장이 가까운 곳이 비싸다고요,  어머님!




나름 적당선의 위치에 구하게 된 _ 나에게도 생각보다 넓은 우리의 첫 신혼집.

나는 이렇게 우리가 시작하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아빠 엄마는 어디에 집을 구했니_ 어떻게 갖춰나가고 있니_라는 일체 질문도 없었고 출가외인인 딸인 네가 너의 반려자인 남편과 알아서 잘해 나아가라는 소리만 하셨다. 너무 내 기준이었을까? 나의 부모님과는 성향이 전혀 다른 시부모님을 아무래도 하나도 생각을 못했던  같다. 요즘 집들이는 매매한 자기 집에서만 한다 들었기에_ 그리고 나는 매주 시가에 방문하고 있으니_ 나는 시부모님을 우리의 신혼집에 초대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초대하지 않은 아버님 어머님이 신혼집에 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따로 집 구경을 시켜드려야 한다고 생각을 미처 못한 것도 있었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하시면서 보셨고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 한번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신혼집을 들락날락하셨었다.  



그러던 도중 시아버지 식구들 모임이 있으니 참석하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미리 말씀하시지 않은 날이라 우리는    같았는데 이유는 친정부모님이 오실지도 모르는 날과 겹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모는 나에게 너희 부모님만 초대하냐며- 자신들을 초대하라고- 대뜸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날 너희 부모님 오시는 것을 취소하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하셨다. 만약 너희 부모가 그래도 오게 된다면 그들을 티브이 보게 앉혀놓고 너희 둘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인사하고  먹고 가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말인가 방귀인가. 시어머니가 나의 부모님이자 본인의 사돈을 '그들'이라고 지칭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우리 아빠 엄마를 딸이 사는 집에 티브이를 보러 오게 만드는 재주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자주 가지도 않고 만남도 적은 친정과의 교류의 시간을  한번 먹지 못하게 만들고 거기에 우리 부모님이 해야  일을 티브이 보기로 단정하신 것에 화가 치밀었다.  




사실 시어머니가 말씀하신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어렵사리 복잡했던 이날의 만남을 설명하자면, 시작은 이러했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전화하여 앞으로 2주 뒤 일요일에 시간이 되냐고 물었었다. 매주 금요일 혹은 토요일에 시가에 방문하고 있었지만 말씀하신 그 주 토요일만은 내 생일이었기에 나와 내 남편은 우리 둘이 보내자고 합의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머님이 일요일에 시간 되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주말 내내 시월드 생각일랑 전혀 없는 생일을 맞이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통에 일요일은 괜찮을 거 같다며 무슨 일이 있으시냐 되물었더니 고모님들에게 인사하는 날로 정했다고 하신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되물었다. "일요일이요?"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을 그날로 정했다고 하시니 나는 조금 의야했다. 시모는 토요일엔 본인이 일정이 있어 일요일로 정했다고 말씀하셨다. 진짜 일요일이 맞는지 몇 번 더 확인하고 싶었는데 어머님이 그렇다고 하시고 내 생일에는 약속이 있으시다니 그날만큼은 자유로구나- 그나마 정말 다행이구나- 생각되었다.



그렇게 일요일에 아버님의 식구분들을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어머님 형제분들 그러니까 남편의 외갓집 식구들은 결혼 전에도 뵌 적이 있었고 결혼 후에는 날을 잡아 만나 밤새 놀았다. 어색하고 힘든 자리였지만 아직 살아계신 남편의 외할머니께서 나를 너무 보고 싶어 하셨고 외삼촌들도 나와 만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셨다. 남편은 외갓쪽 손주들 중에는 개혼이었다. 그러니 첫 번째인 내가 인사를 꼭 드리길 원하셨었다. 하지만 고모님들은 결혼 전에 만나뵙길 요청드렸지만 각자 사는 게 바쁘고 일정 맞추기가 어려워 나중에 시간 되면 보자고 하셨다가 결혼식 당일 처음 뵙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버님 누님분들은 나이 차이가 좀 있으셔서 그분들의 자식 모두 결혼을 하였고 우리가 마지막이었기에 집에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 자체를 그리 대단히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계셨다. 어쨌든 그렇게 약속을 정해놓고 나와 남편은 아버님 식구들과의 그 만남을 이주 뒤 일요일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어김없는 주말의 방문요청에 의해 발걸음을 향했던 시가에서 시아버지는 노발대발이셨다. 당신 맘대로 일요일로 정하냐- 다들 토요일로 알고 있다. 누가 만나서 저녁 먹고  먹는 날이 일요일인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냐- 다들 토요일로 알고 있는데- 라며 고모님들과의 카톡을 보여주신다. 단톡을 유심히 살펴보진 않았지만 그 대화방의 많은 이들은 그 주 토요일에 만나서 하룻밤을 자고 일요일에 헤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대화의 내용은 시어머니 또한  방의 초대 인원  하나였기 때문에 읽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약속 있다고 말한다. 아버님은 그럼 다른 주로 바꾸던가 해야지_ 일요일은 무슨 일요일이냐며_ 너희도 토요일로 알아라- ! 라고 하신다. 남편은 우린 토요일이 안된다고 말했다. 왜인지는 그때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약속을 정할 때 각각 사람들에게 의사를 표하지 않고 맘대로 정한 시어머니를 나무라는 시아버지의 목소리를 멀리 한채 우리는 그 집을 나왔다.




조금 불안하였다. 왠지 결혼하고 처음 맞이하는 내 생일이 즐거울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결국 시어머니는 주중에 나에게 전화가 왔다. 토요일에 일이 있더라도 취소하고 여기로 왔으면 좋겠다는 의사셨다. 자신도 토요일에 있던 아주-아주 중요한 약속을 가지 않노라 덧붙이셨다. 고모님들 모시는 자리가 본인에게는 어쨌든 시가 쪽 사람들인데 얼마나 불편한지 아느냐며_ 며느리로서의 약자의 모습을 보이신다. 나도 불편해서 하라는 대로 하오니 너 또한 며느리로서 내가 하라는 대로 했으면 싶다고 크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 생일임을 말하기도 힘들었고 선뜻 그러겠노라 대답하기도 조금 싫었다.


시어머니는 " 그날  일인데 그러냐" 며 "너희 부모 모실라고 그러지 ?" 라고 이제는 대뜸 성을 내셨다. 그날은 내 생일이기에 결혼하고 몇 개월 동안 신혼집이 어디인지, 어떻게 사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하지도 않는 나의 부모님을 모셔 낳아주셔 감사하다는 뜻으로 미역국을 대접하려 하였다. 사실 그 아이디어는 남편이 낸 것이었다. 시가에는 매주 방문하는데 처가에는 신혼여행 이후 단 한번 가본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그리고 우리의 신혼생활을 일체 간섭 하지않으시는 나의 부모님에게 우리가 사는 집은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 바로 남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우리 부모님께 시간 되면 올라오시라고 연락했지만 엄마는 보고 ~ 갈 수 있으면 ~ 생각해볼게 ~ 라는 말로 얼버무리신 상태였다. 엄마가 그럼 그렇지, 안 오실게 뻔했지만 원래 생일이란 것이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라 결혼한 내가 철든 행동을 보이려 해도 엄마는 거부 상태였다.


나는 부모님이 오시지 않겠다고 하셨어도 몇 번 더 말하면 못 이기는 척 오 실 수도 있을 것 같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날은 잦은 방문을 하는 시가에 가고 싶지 않으니 우리 둘이 있는 시간으로 두어도 좋겠다고 의견을 말했는데..  아무래도 남편과 시모가 먼저 통화를   같았다. 남편이 우리 부모님이 오실 수도 있다고 말한 거 같았다. 시모는 그럴 수도 있다는 ~ 말을 듣고 그렇게 했구나 ! 라고  자신만의 결론을 렸고 그렇게 단정 지어 지금 나에게 다짜고짜 따지는 것이다. "너희 부모 모실라고 고모들한테 인사  올라고 그러니?" "너는  거기만 초대하고 나는 초대  하니?"  "우리는 부르고 싶지 않니?"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은데 너의 마음은 그게 아닌  같아 이건 정말 아닌  같아  그렇." 라며 당혹스럽기만 한 멘트를 전화기 뚫릴 기세로 바득바득 하고 계셨다.


따발총처럼 이어지는 질문과 불만 세례에 나는 벙어리가 되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지금 내가 어떤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지금 이 통화가 과연 현실인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모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신다. "어찌 너는  번도 나를 모시려 하지도 않으면서  부모만 달랑 모시고 싶어 그러니 ? " 라고 소리를 빽빽 질러댄다. 매번 나라는 사람을_ 당신의 며느리가 된 나를 '니' '너' 하시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계속 우리 부모님을 '니 부모'라고 지칭하는 그 목소리를 싸잡아 어디에 쑤셔 넣어버리고 싶었다.



미칠듯이 쏘아대는 시모의 멘트와 호통을 잠재울 방법은 알겠노라, 어머님 뜻대로 하겠노라, 대답하는 것 뿐이었다. "부모님 안 오신데요. 못 오실 거 같아요. 그날 시가로 넘어갈게요- " 라고 말을 하는 나의 오디오를 자르고 " 생일이라 그러냐? 그래도 여기 와라 !" 라고 소리치신다. 남편과의 통화에서 이미 내 생일까지 언급된 상태 같았다. 그렇게 통화를 했으면 남편은 내가 이런 전화를 받기 전에 알려라도 주지_ 아무 방패 없이  좋은 소리만 퍽퍽 듣고 있자니 화가 나기보다다리에 힘이 풀려 나는  자리에서 쪼그려 앉아버렸다. 그렇게 쩌렁쩌렁한 시어머니의 목소리를 남이 들을까, 어디 새어나가진 않을까,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볼륨을 줄이며 듣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그리고 너희 부모님 오시더라도 그들을 거기 잠깐 가만히 앉쳐놓고 티브이 보라하고 넘어와서 인사하고 가라 " 라고 하신다. 는 화가 났다. 우리 부모님을 앉쳐놓고 라니. 티브이를 보라고 하고 넘어오라니. 이것은 말인가 방귀인가_ 내가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나 싶었다.


그동안 몇 번을 들락거리신 시부모님과 달리 우리 아빠 엄마는 자신의 딸이 어디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도 모르신다. 그런데 철든 딸과 사위가 생일을 맞아 감사함을 담아 모시려는데 그런 상황에서 두 분을 덩그러니 앉쳐놓고 자신들에게 오라니.. 우리 아빠 엄마가 무슨 훈련받는 애완견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하는 그 명령조 같은 말의 의도는 무엇인가 싶었다.


나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 사단의 문제는 첫 단추를 잘못 끼어 맞춘 시어머니에게 있었다.


 시작으로 우리에게 괜찮은 시간을 묻지 않으셨다. 매주 시가에 방문해야 한다는 일방적인 단정을 지어놓고 자신이 어려운 본인의 시가 사람들 - 고모님들에게만 만남의 시간을 여쭈셨다. 우리는 그들이 오케이 하는 그날이 무슨 날이 건 일이 있건 없건 그냥 뜻대로 그래야만 하는 존재로 결정지어놓으신 것이다.  번째로 본인의 중요한 일정에 맞지 않자 일요일이라는 혼자만의 결론을 지으신 것이다. 몇째주 주말~ 을 통으로 말하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주 주말 토요일은 자신이 안되오니 일요일에 오시라고 혼잣말로 속삭이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일요일이 결정된 것처럼 그날 잠시 잠깐 얼굴만 보고 인사치레를 하는 걸로 알려주셨다.  번째로 모두가 합의된 활자로 남아있는 토요일에 가서 자고 그다음 날 헤어지자는 단톡방의 메시지를 보고도 묵인하고 회피하신 것이다.


그러다 결정적인 단서인 그들 간의 단톡 방 내용이나 아버님의 말씀에 결국 토요일 일요일 모두 시간을 내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나에게 이러이러하게 된 것이니 - 너도 따르라고 고집 피우신다. 하라는 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었기에 화가 났고, 알겠다고 말했음에도 아빠 엄마의 행동까지 지침 하시는 모습에 나는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미리 약속을 정할  저희 일정도 확인하시지 그러셨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어머님이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친정부모님이 오시기로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내 생일인걸 알고 계시니 그날 제 생일이라 신랑과 오랜만에 주말에 데이트나 하려 했다고도 말했다. 어머님께서 복잡하게 만든 주말 스케줄에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시모에게 알겠노라 그날 뵙겠다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님이 이렇게 자신만의 고집으로 약속을 맘대로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저녁에 찾아뵙겠다고 몇 차례 말씀드리고 메시지를 보냈어도 점심에 와서 하루 종일 얼굴 보고 싶다고 그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시고 우리가 점심에는 일이 있어 못 가니 일정이 마무리되면 저녁쯤 도착할거 같다 알려드리고 방문하면 너희는 왜 내 말을 듣지 않느냐- 고 점심을 먹자고- 그렇게 정했다고- 그렇게 약속한 걸로 알고있다며 막무가내를 부리시던 일도 많이 있었다. 그런 시어머니에게 나는 해야  말은 했지만, 시모는  말은 귓등으로 듣고  오디오가 겹치게 성질을 부리셨고, 불만을 토하면서 내가 해야만 해서 기필코 했던 말을 일언반구 들으신  같지 않았다.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셨고 수많은 말을 그 뒤로 이어서도 많이 하셨지만 너무 열 받고 미쳐버릴 언어들 뿐이었다. 그 당시 나는 너무 화가 났었지만 그날 이후 무조건 잊어버리려 노력하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잊고 지우려 했지만  부모 가만히 앉쳐놓고 건너오라는 은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열 받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남편에게 다짜고짜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 또한 갑자기 울린 휴대폰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건만 남편마저 회사에서 일하는 도중 미친 아내의 전화를 받는 것은 더 곤욕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이 속을 뒤집어 보여주고 싶어 엄마에게 전화했지만 도덕교과서 같은 나에게 돌아온 엄마의 멘트는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말아라. 시어른 욕하려거든 끊어라." 였다. 엄마는 뒤집히는 내속을 한마디도 듣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시월드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전하지도 못하게 하신다. 무조건 좋은 마음으로 사람을 보고 참으라고 하신다. 엄마가 미친 듯이 내 고뇌를 들어주고 내편이 되어 공감해주길 바라지만 그건 아마 어려울 것 같다. 나에겐 속 터놓고 욕할 수 있는 친정의 대나무 숲은 불가한 것으로 보인다. 퇴근하고 저녁에 만난 남편에게 시모와 전화를 했으면 그 내용을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을 시어머니는 알고 나에게 다짜고짜 이야기하시면 나는 너무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언제나 윽박지르고 본인 혼자 결정지어서 맘대로 생각하는 통에 대화가 어렵다고도 털어놨다.


내가 오늘 받은 전화의 격 떨어짐과 치밀어 오르는 화는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도 말했다. 우리 부모님을 이러쿵저러쿵하라고 대하시는 태도며 그 생각들이 나를 미쳐버리게 한다고 했다. 화를 주최하지 못하는 아내를 앞에 두고 남편은 자신이 안 그래도 나와 통화한 뒤 엄마에게 다시 걸려온 전화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고 말한다. 어머님은 남편에게 내가 생일이고 나발이고 우리 부모님 모시기로 했던 거든 뭐든 어쨌든 고모님들과의 모임에 내가 직접 가겠노라 대답했다고 자신의 아들에게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또 한 번 연락한 것 같았다. 남편은 그렇게 걸려온 전화에 엄마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진다. 약속을 정하려면 고모님들 의견뿐 아니라 우리의 일정도 물어보고 정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엄마 맘대로 토요일에 일정 있어서 일요일로 정했다가 우리 사정을 다 까발라 놓고 이상한 소리만 하면 어떡하냐고- 따졌댔다고 나에게 말했다. 사실인지_아닌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정말 남편이 내 편이 되어 말해주었다 한들 시모가 또 나를 얼마나 꼬아서 나쁘게 볼 것인지가 걱정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정리해서 우리는 토요일 - 내 생일에 시가에 방문하여 고모님들께 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

나는 포기한 것이다. 내 생일이고 뭐고, 이제는 정말 됐다 싶었다. 그래 며느리가 되는 길은 그런 것이다- 생각했다. 어릴 때는 할머니의 생신과 비슷하게 겹쳐 내 생일행사는 늘 뒷전이었고, 며느리로서 시어머니 생신상을 봐드려야 하는 엄마는 할머니는 늙으셨으니 아직 어리고 생일 챙겨 먹을 날이 많은 나에게 늘 네가 양보하라고 하셨다. 근데 결혼하니 시가의 일이 내 생일을 가로막는다. 그래 엄마 말 마따라 일하는 사람은 일만 하듯이 생일 못 챙겨 먹던 나는 결혼하도고 생일도 못 얻어먹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굳게 단념했다.


엄마가 그렇게 생일 챙겨주지 않아 평생 왠지 이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 속도 전화로도 들어주는 않는 엄마를 조금 원망했다. 더 슬픈 사실은 결혼을 앞두고 나는 외할머니 생신 또한 내 생일과 이틀 차이 나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딸의 생일을 기점으로 이틀 앞으로는 시어머니 뒤로 이틀은 내 외할머니 생신이었지만 나의 엄마는 그중에 며느리로서 시어머니만을 위한 날을 챙기기 위해 군말 없이 묵묵히 몇십 년을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딸에게 사실은 이날이 본인의 엄마 생신이라 이제는 좀 친정에 가보겠노라 말했다. 수많은 시간 동안 혼자 삭히고 일한 엄마도 있는데 그래, 며느리가  나도 어쩔  없는 것이 많은 것이라  자신을 다독였다.


그렇게 시어머니가 어렵다는 시모의 시가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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