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과 입춘 사이] 매해 새로워 (2)

2025년 돌아보기

by 히라

한 해를 버텨내고 나니, 조금 차분하고 여유가 생길까 했지만, 또 다른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는거지. 내가 왜 놀이공원을 안가는지? 왜 드라마를 안보는지?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보다 예측 불가능한 삶의 고도가 나를 이렇게나 짜릿하게 혹은 찌릿하게 만들어주는 걸, 드라마보다 더 재미난 이야기가 피부에 와닿는 현실을 살고 있는 걸.


문화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익숙한 감각, 요란법석한 해를 보내고 나서 찾아온 정적의 시간이다.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 기획안을 제출하고 심사를 기다리는 시간도 무언가를 준비하고 날개든 손바닥이든 활짝 펴기 전까지 웅크리는 시간이지만, 준비의 노동이 소득으로 이어지지는 않으니까 내 통장의 입금내역도 일상도 잠잠하다.


내 삶에서 조용한 겨울이란? 그간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과도 같다.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봉사활동이나 대외활동, 인턴, 현장실습을 하느라 휴학을 했든 방학이나 명절이든 일주일 이상 고향에 간 적이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전 취업해서 일을 시작하고, 전직을 여러 차례 하면서도 3개월 이상 쉰 적이 없다. 그러니 소속도 없고 일도 없다? 근데 날씨까지 춥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거지…? 강원 지역의 겨울은 생각보다 더 춥고 혹독한걸. 주말이 무한정 있는 기분이다. 불안과 함께 취침 시간이 점점 밀려서 새벽 2-3시에 잠들고, 해도 늦게 뜨니 그만큼 일어나는 시간도 밀려난다. 밤 12시가 되면 낯빛이 어두워지는 내게 잠들지 못한 새벽은 불안의 증거다. 그렇게 처음 맞이한 정적은 깜깜하고 무섭고 막막하고. 어두컴컴한 단어는 다 붙여도 표현이 안 된다.


생각해보니 농업의 감각과도 비슷하다. 그걸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이유는 농사를 짓는 일도 언젠가 할 것 같긴 한데, 막연한 미래의 일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빨리 이룬 마흔 전 탈서울의 외침도 20대 후반부터 되뇌던 혼잣말에서 시작했고, 외칠때도 그때가 오긴 할건데 지금은 아니라는 아득하고 먼 언젠가일 뿐이었다. 생각 이상 이상으로 빨리 해버린게 함정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농업도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던 조부모님의 영향, 읍면리 지역에서 나고 자라 강과 논 옆을 지나쳐 학교에 갔던 기억이 내 영혼과 세포에 차곡차곡 쌓였을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랑과 관성 사이에서 키워낸 농작물을 엄마의 손맛으로 그저 먹는 사람에 그쳤으니까 말이다. 그 키우기 쉽다는 선인장과 다육식물의 흘러내리는 모습만 지켜봤던 살식마인 내가, 농사를?


불안과 호기심으로 채워나갔던 시간 사이의 정적은 내게 새로움 속의 새로움을 시도할 여지를 주었다. 불안의 시간을 건강하게 지나가도록 도와준 든든한 동료이자 친구들이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지나가듯 툭 내 앞에 던져진 단어가 내 마음에 깊이 심겨진 사건도 생겼다. 드디어 ‘농업’이라는 단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미 농업과 문화예술 사이를 거닐며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던 원주 지인이 던진 한마디가 내 인생을 이렇게 바꾸게 될 줄, 그도 모르고 나도 몰랐다.


생각이 많은 나여도, 해야겠다 결심하면 냅다 입밖으로 내뱉고 시작해버리고 마는 사람. 대책은 없는데, 어쩔 수 없지! 받아들이는 수밖에.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내 삶을 관통하는 관점인 ‘상호문화’와 영혼의 직업이자 꿈인 ‘예술’ 사이 비어있던 무언가가 ‘농업’으로 연결됨을 직감했다. 이건 지금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그 속에서 나다움을 찾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알게된 사실. 작년 초 겨울 내내 노트북을 들고다니며 동료와 함께 한해를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며 겨우내 드나들었던 카페의 이름은 ‘소복소복 소쿠리’. 이제 이 소쿠리의 리도 마을리(里)로 보인다. 농장 이름을 토토리로 짓는건, 역시 운명이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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