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와 경칩 사이] 공항버스 타기 40분 전에 뭐해?

귀국했을 땐 밭에 새싹이 났기를

by 히라

바쁜 2월 말을 보내고나서 믿을 수 없으나, 3월이 오고야 말았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이다. 온도가 올라갈때마다 춘채가 혹시나 싹이 났는지 보러 갔다가 밤에 갑자기 내려간 기온으로 급체를 해버렸다. 불편한 사람과 밥 먹을때 빼고는 체한 적이 없는 튼튼한 위장이 갑자기 운동을 멈출 정도면, 춘채만 기다리다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중에는 필리핀으로 가기 전 뭐든 심어놓고 가야 그나마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일단 빠르게 배송되기만을 빌면서 종자를 주문했다.


3월 평일 첫날은 강원대학교 농촌사회교육원 농업CEO과정 입학식이 있었다. 나는 세 전공 중에서 ‘농업 전공’을 선택했다. 청년농업인 영농정착지원사업에 선정되면 농업 관련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데, 관련 기초 지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하면서 이수 시간을 채울 수 있어서 지원하게 되었다. 집에서 가까운 상지대학교에 유사한 과정이 개설되었으나, 전공 이름이 내가 배워야하는 방향과 달라서 신청을 고민했고, 다른 이유로는 내년 정도에는 대학원 입학을 고려하고 있는데 그전에 강원대학교에서 농업 관련 전공 교수님들을 만날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사전 탐색하는 의미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은이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전화하셨어요?

희라야, 이제 땅 녹아서 보리 심을 수 있어.

네 언니, 다음 날에 바로 심어야겠어요.


무엇이든 심어두고 출국하고 싶어서 딱 하루 남은 시간에 청보리를 심기로 했다. 처음엔 이 시간이 얼마나 길게 걸릴지 알지도 못한 채.


입학식을 마친 후 집에 가서 여권도 챙기고 필리핀 갈 짐을 쌌다. 하루 전에 해외 나갈 짐을 싸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이고, 이건 꿈이 아니다. 갑자기 여름옷을 꺼내려 하니 집이 난장판이 되기 직전이다. 겨우겨우 정리를 마치고 새벽 4시 넘어 잠들어 7시에 깨어났다. 수면시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마음으로 필리핀을 가는게 맞나 싶을 정도로 불편한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건 처음이다.


출국 당일 새벽 7시 30분, 밭 가는 레기 하나를 들고 나갔다. 혼자 할 생각에 까마득했지만 마침 시간이 되는 덴버가 함께 도와주기로 했다. 아침에 잠깐만 작업하면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내가 농사에 어느정도의 노동력과 시간이 드는지를 제대로 예측하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두시간을 꼬박 했지만, 생각했던 범위의 반의 반도 하지 못했다.


중간에 농업기술센터도 다녀와야 하고, 집에 가서 짐을 챙겨서 터미널에 가야하는데, 하면서 동선이 꼬일때 쯤 나는 다시 한 번 덴버 찬스를 쓰기로 했다. 평소 민폐를 끼치거나 부탁하는 것을 정말 미안해하는 편이지만 이번 만큼은 눈 꼭 감고 부탁하기로 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같이 일을 하고, 나를 버스터미널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다녀와서 무엇이든 보답하는 것을 약속했다. 내가 부탁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귀한 것이라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무슨 복을 타고나서 원주에서 온통 귀인만 만났는지 마음이 찡했다.


하필 다음 날 새벽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일정이라, 전날 인천공항에 가서 숙박을 해야 하고, 내가 할 수 있는건 공항 버스 시간을 미루는 일 뿐이었다. 동행하는 멤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점심을 먹고나서 다시 작업을 시작하니 조금 빠르긴 했다. 중간에 조은작가님이 와서 잠깐 도와주고 갔으니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나는 밭에 보리도 못뿌리고 공항으로 갈뻔했다.


최대한 미룬 공항 버스 출발 시각은 오후 4시 40분, 그렇게 나는 오후 4시까지 밭을 갈고 보리를 겨우겨우 다 뿌리고 나서야 씻지도 못하고 버스 터미널로 넘어갔다. 가까이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이 보리를 남겨주고 먹기를 바라면서.


경칩이 된 날, 필리핀에서의 첫날 일정을 마치고 토토리 보따리를 쓰고 있다. 원주에는 마침 비가 온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폭우가 쏟아져 보리가 다 쓸려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가물어서 마르는 것보다야 비가 와서 땅이 흠뻑 젖는게 낫겠지 하는 희망회로를 돌려본다. 아마 다시 귀국하는 날까지는 계속 이런 마음으로 보리에서 싹이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그런데 내가 농지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는 농지대장에 등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항버스에서 알게된다. 임대차계약서만 있으면 되는게 아니었다니, 이제까지 계속 준비과정 인터넷으로 알아볼때만해도 몰랐는데 이게 뭔가 싶다. 면사무소를 직접 방문할 수 없어서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지 인터넷으로 계속 찾아봤다.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농업경영체 신청 자체는 가능한데, 실제로 현장 실사는 싹이 나와야 가능하다고 하니 이제 다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귀국하고나서 해결하려고 하면 늦는다. 어떻게든 필리핀에 있는 동안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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