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과 춘분 사이] 불가능과 가능 사이 무한한 가능성

토양검정, 그 결과는?

by 히라

“요청하신 ‘토양 비료사용 처방서’가 발급 되었으니 수령해가시기 바랍니다.”


저도 정말 가고 싶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갈 수가 없어요. 방금 필리핀에 도착해버렸거든요.


기다리던 토양검정 결과가 하필 출국 당일에 나오다니, 내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토양검정 결과지가 아니라 비료 사용에 대한 ‘처방서’라 마치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는 기분이 든다.


일단 보리라도 심어두어 다행인가 싶은 마음으로 남은 일정에 집중했다. 귀국 후에도 일정은 쉼 없이 이어졌다. 등록해두었던 강원대학교 농업최고경영자과정 교육을 듣고, 현관 앞을 지키고 있는 대형 캐리어 속 짐을 정리하다보니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결국 회의 참석차 농업기술센터에 방문한 날이 되어서야 겨우 결과지를 손에 쥘 수 있었다. 하필 담당자도 부재중이라 추가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암호 같은 의문의 자료만 들고 돌아왔다.


AI 제미나이의 도움을 받아서 분석한 결과, 예상했던대로 두 필지 모두 할 일이 태산이다. 유기물의 적정범위가 21~50인데 분석 결과는 고작 ‘1’... 비료로서 유효한 인산 성분도 적정범위가 250~350인데 10 미만이니, 영양분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칼슘 성분은 적정량보다 2배 이상 높고, 칼륨도 결핍 상태인 알칼리성 토양이다. 자갈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배수 등급마저 ‘불량’ 판정을 받았다.


작년에 콩과 들깨, 옥수수를 심었다고 해서 조금은 나아졌을 거라 기대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콩이 토양의 비옥도를 올려준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 전에 더 안좋았거나 효과가 별로 없었거나, 오늘의 나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밭을 오며가며 만난 몇몇 동네 주민은 하나같이 혀를 차면서 내게 말했다.

‘여기서 농사를 어떻게 짓는다고, 작년에 옥수수랑 콩 다 잘 안됐어. 그 옆에 땅 들깨는 참 잘됐더만.’

어르신, 그 옆의 땅은 제가 빌린 땅이 아니에요, 빌릴 수 있는 땅도 아니고요. 흑흑. 정말 울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모험심과 개척자 정신이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장면이 과연 영원한 진실인가? 지금 안된다고 해서 다음에도 안 될까?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다. 몇 년 전 옥탑방에서 살 때, 쓰레기 더미에서 토마토 씨앗의 싹을 발견했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내가 믿어야 할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 뿐이다.


생각해보면 처음의 기대가 너무 컸다. 계약 당시 농어촌공사에서 상당한 비용을 들여 객토를 했다고 하니, 내 멋대로 당연히 좋은 토양일 거라 단정 지어버렸다. 현실적으로 영양분이 듬뿍 든 흙으로 채웠을 리 만무한데 말이다. 밭으로 활용할 수 있는 농지를 얻는 것으로도 만족했어야 했다.


약간의 배신감과 함께, 올해 해결해야 할 또렷한 숙제 하나를 발견했다. 앞으로의 농사를 위해 올해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땅의 힘’을 기르는 일이다. 첫해부터 풍년을 욕심내기보다, 내가 지향하는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토양의 영양분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항상 긍정적으로 해석해주는 제미나이는 이 땅을 ‘아기’ 같은 땅이라고 했다. 아기는 키우면 되는거니까, 이 땅도 키우면 무엇이든 되겠지. 어떤 작물이든 자리잡을 수 있는 땅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과정이 나의 독립 여정과 닮았다. 늘 무(無)에서 시작해 무엇이든 해내고야 말았던 지난 시간의 힘을 이번에도 믿고 싶다.


한 필지에는 녹비작물 겸 농업경영체 등록을 목적으로 청보리를 뿌려두었으니, 일부 구역을 제외하고는 일단 5월까지 보리를 충실히 기르는게 좋겠다. 내가 주로 지을 토종 씨앗 종류에 콩 종류가 많아서 6월에 심어도 충분하다. 나머지 땅에는 횡성에서 퇴비를 구해 뿌린 후, 감자든 완두콩이든 정성껏 심어봐야겠다.




2026년부터 발행되는 비경계지대 24절기 뉴스레터 - 토토리 보따리는 농장 '토토리' 로컬콘텐츠 브랜드입니다. 절기와 절기 사이의 토토리 보따리는 브런치에 발행하고, 입춘부터 대한까지 24절기에 발행되는 토토리 보따리는 매 절기 당일 이메일 혹은 카카오톡으로 전달됩니다.


비경계지대 인스타그램

토토리 보따리 뉴스레터 읽기

뉴스레터 구독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수와 경칩 사이] 공항버스 타기 40분 전에 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