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인트라넷에 경조사 공지가 올라왔다. 대표님 가족상이었다. 애도의 마음도 잠시, 인사팀이기에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일 생각이 스쳤다. ‘장례식장에 하루종일, 저녁 늦게까지 있어야 되겠구나.’ 예상대로 조를 짜서 장례식장 지원을 나가야 했다. 우선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장례식장에 갈 때는 매번 복장이 고민된다. 검은색 셔츠가 찢어져 얼마 전 버린 것이 생각났다. ‘꿰매어서 입을걸..‘ 버린 나를 탓하며 어쩔 수 없이 흰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흰색을 최대한 가릴 수 있는 검정 재킷을 입기로 했다. 약간 찝찝한 채 집을 나섰다.
장례식장에 가서는 잡일을 도왔다. 테이블 위에 올려질 일회용 수저를 담을 수저통을 종이를 접어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일회용 숟가락과 젓가락을 채웠다. 테이블별로 일회용 비닐을 한 장 한 장 깔고 그 위에 만들어 놓은 수저통과 콜라, 사이다, 식혜, 꿀홍삼 등 음료수 여러 개를 세팅했다. 특실이라 크긴 했지만 여러 명이 하니 금방 끝났다.
사실 상조회사에서 나오셔서 직원들은 크게 할 일이 없었다. 아직 손님이 많이 오실 시간 전이라 더더욱 그랬다. 예전 회사처럼 신발정리는 안 시켜서 다행이었다. 할 일이 없다 보니 빈 테이블에 직원들끼리 모여서 수다를 떨었다. 나는 어린 여자 직원들이 모여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조금 지쳐 가만히 앉아 듣기만 했다. 재잘재잘 수다소리가 이어졌다.
기다림이 오래 지속되니 나는 지루해졌다. 여직원들의 옷차림을 살폈다. 다른 사람들은 장례식장에 무슨 옷을 입고 왔을까. 색은 검은색이지만 의외로 디자인들이 다양했다. 어깨에 퍼프가 들어간 반팔 블라우스, 목에서 어깨까지 보트모양으로 파인 검정니트도 있었고 검은색 셔츠도 있었다. 화장도 요즘 유행한다는 오버립 메이크업을 한 직원도 있었고 새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메이크업한 직원도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요즘 유행을 한 번에 볼 수 있었다.
곧 그것마저 지루해져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음식이 서빙되는 키친이 보였다. 키친 쪽이라 그런지 중년의 여성 분들이었다. 손님이 아직 없어서 상조회사 직원분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계셨다. 나이는 모두 5~60대 정도, 상조회사의 유니폼을 입고 계셨다. 헤어스타일은 대부분 커트머리나 그보다 좀 긴 단발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가 누군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 내가 나이 들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내 눈앞에 있는 젊은 여직원들이 오버랩됐다. ‘나에게 젊음이 사라진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젊음이 사라지고, 그와 함께 유행이라는 강력한 무기도 빼앗긴 나는 유니폼을 입은 짧은 머리의 단발 속의 군중이 되어 있을까? 그건 싫었다. 유니폼입은 짧은 머리 중년을 안 좋게 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불치병 수준의 홍대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건 싫어!’
평범한 것을 싫어하는 것치고는 외모치장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앞선 글에도 썼지만 외모로 덕을 본 적도 없지만 외모가 발목을 붙잡은 적도 없던 이유가 가장 크겠다. 그리고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자주 들지 않는 성격인데다, 남의 시선에 아랑곳않는 성향때문도 있다. 결정적으로는 나름대로 허슬을 많이 하다보니 필요성이 적으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외모를 연구할 시간에 내면을 연구했다.
그러다 보니 옷도 자주 사는 편은 아닌데 살 때에는 힙한 느낌이 있는 옷을 고르려고 해 왔다. 통이 넓은 바지, 크롭 기장의 티셔츠나 가디건 등이겠다. 유행은 뒤처지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렇지 기본적인 감각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다,,ㅎ 이런 성향 덕분에 30대 중반이지만 동안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나의 젊음은 유행템이 가져다준 젊음일까? 그런데 이 유행템을 내가 몇 살까지 입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패션에 나이가 없다지만 ‘50대 이후에 내가 20대들이 즐겨 입는 유행템을 자연스럽게 입을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양심상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유행템과 젊음이라는 무기가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옷을 입을 건지 물으니 눈앞이 아득했다.
그때 옷에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나이가 들고 유니폼을 입더라도 다른 사람과 다른 아우라를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만의 아우라를 가지려면 내 내면과 개성을 고스란히 외적으로 표현해야 했다. 여태까지 내가 입었던 옷들이 나를 표현 못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게까지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옷을 구매한 적은 없었다. 더구나 회사에 출근할 때에는 더더욱 신경 쓰지 않고 옷을 입었다. 현상을 진단하니 비상이었다. 내면과 외면을 일치시키고 싶었는데 현실은 요연했다.
착장 개선을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유행템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기본템으로 나를 분명히 해보고 싶었다. 옷 잘 입는 방법을 연구해 보니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와닿은 것은 기본템을 잘 조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나의 체형을 잘 알아서 장점을 살리거나 단점을 가리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핏의 영역인데 사실 핏은 예전부터 내가 옷살 때 유일하게 챙겼던 것이었다. 핏을 잘 맞춘 사람을 옷을 잘 입은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핏에 대해서는 방향성만 조금 가다듬으면 될 것 같았다. 급진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좀 더 획기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70대 패션유튜버 ‘밀라논나’ 영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밀라논나가 가끔 패션의 역사를 언급하셨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패션의 역사를 한번보 세요. 시대를 바꾼 디자인이 있어요. 혁명 같은 명품이 있어요. 코코샤넬이라든지, 아르마니라든지..” 한 Q&A 영상에서는 이런 직접적인 질문도 있었다. ‘일반인들이 어떻게 하면 옷을 잘 입을 수 있을까요?’ 논나의 답변은 ‘교양서, 역사서’ 공부였다. 특히 요즘 복식이 서양에서 기반했으니 ‘서양복식사’를 읽어보라고 하셨다. 패션은 돌고 도니 패션의 역사를 통해 유행의 흐름을 파악하고 예측할 것을 권하셨다. 나는 바로 ‘서양복식사’ 책을 주문했다.
패션을 책으로 배우는 게 어쩌면 웃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는 근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가 가진 선택지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것들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아야 올바른 판단을 했던 경험이 많았다. 그게 내게는 더 자유로운 선택이다. 무지는 언제나 내게 자유를 앗아갔다. 힙합 아티스트도 탑티어들은 힙합 장르를 공부한다. 방시혁 프로듀서도 아티스트에게 힙합 공부를 시킨다. BTS도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 선생님 수업을 들었다. 그 외 빅나티 등도 장르에 대해 따로 공부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도 패션을 공부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패션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나의 내면을 외면으로 표현하기 위해, 나만의 고유한 취향과 아우라를 벼려가기 위해 패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 퇴사하고 카카오 이모티콘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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