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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드 Jan 03. 2024

내가 일력을 굳이 5년째 사는 이유

나의 허슬 부스트 아이템, 그것은 일력


2020년부터 일력을 거의 매년 사고 있다. ‘거의’라는 부사를 붙여 굳이 찝찝한 문장을 만든 까닭은 2022년에는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지 않은 이유 뒤에 나옴) 또 하나 부연할 것은 일력에 대한 간단한 소개다. 가끔 일력에 대해 이야기하면 일력이 뭐냐고 되묻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일력은 매일 넘기는 달력을 의미한다. 보통 달력은 한 달을 기준으로 구성되지만 일력은 하루가 기준이다. 매일 하루 한 장씩 수고롭게 넘겨야 하는 달력, 그것이 일력이다.




원래 일력은 내게 레트로 감성 아이템이었다. 어렸을 적 식당이나 부동산 같은 곳에 걸려 있던 기억이 어렴풋하고 그 뒤로 한참 동안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일력이라 존재를 잊고 살았다. 그런데 2019년 11월, 박막례 할머니 덕에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던 일력이 부활했다. 박막례 할머니 인스타그램에서 일력 굿즈가 출시됐다는 게시물을 본 이후다. 70년 이상을 살아내 온 할머니의 짬에서 나온 바이브를 고스란히 담았으면서도 재미있는 입담이 스민 어록을 하루 하나씩 담은 일력 굿즈였다. 호기심이 발동해 예약까지 해서 샀다. 이후 1년간 일력의 참맛을 알았다.




일력은 매일매일 소소한 기쁨을 주었다. ‘너도 안 해봐 놓고 나를 시키냐? 니가 해갖고 할머니 하나 먹어보라고 주지. 염병 같은 게 다 있네.’ 같이 회사에서 답답한 내 마음을 ‘염병’같은 욕까지 써가며 찰지게 대변해 주는 것 같은 말도 있었고, ‘나 나훈아 이렇게까지 안 좋아하는디. 니들 오해하지 마라. 나 나훈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애. 그런데 어찌 갑자기 생일도 한날이고 나이도 똑같고. 이거 무슨 일이야?’ 같이 팍팍한 삶에서 웃음 짓게 하는 말도 있었다. 맞춤법을 포기하고 대신 할머니 말투를 살렸기에 음성지원이 돼서 더 재미있었다. 매일 일력을 찢으며 오늘은 무슨 말이 나올까 기다려졌다. 그렇게 365일 동안 하루 10초 정도는 재미있고 설렜다. 일력의 매력이었다.




첫해를 일력의 존재 자체로 즐겼다면 다음 해에는 성장과 연결 짓고 싶었다. 지독한 자기계발충 본능이 나왔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도서출판사 민음사의 일력이다. 2018년부터 민음사의 오리지널 콘텐츠로 ‘인생일력’이라는 브랜드까지 가졌다. 민음사 일력은 <논어>, <사기>, <삼국유사> 등 동양고전에서 뽑은 문구들을 하루 하나씩 배치한 것이 특색이었다. 고전이라 하면 늘 지나칠 수 없는 키워드 아닌가. 고전으로부터 인사이트를 얻고자하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게다가 디자인이 다른 일력들에 비해 예쁘고 레트로 감성을 품은 것도 선택의 이유였다. 그런데 1년을 이 일력과 지내보니 예상한 것보다는 인사이트가 적었다. 물론 그때의 내가 동양고전 한 문장을 하루에 음미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의미도 재미도 기대에 미치지 못해 2022년에는 일력을 패스하게 됐다.



이후 2023년이 되어 제 발로 다시 일력을 찾게 됐다. 사실 일력을 먼저 떠올린 것은 아니다. <논어>를 읽고 싶은 마음이 시작이었다. 삶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다잡고 싶었고, 고전을 읽고 싶었는데 손에 닿은 것이 <논어>였다. 사실 논어는 몇 년 전 사놓고 책장 구석에 찬밥대접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늘 마음속 버킷리스트였기에 좀 더 쉽게 쓴 논어를 찾던 차였다. 그러다 논어 일력을 발견하게 됐다. ‘한 구절씩, 매일매일.’ 논어를 읽고 싶지만 어렵고 엄두가 나지 않은 나에게 이만큼 맞는 방법이 없겠다 싶었다. 그렇게 일력을 다시 함께하기로 했다. 이후 1년간 하루 하나씩 논어의 구절을 눈에, 마음에 담았다. ‘공자는 이렇게 생각하셨구나, 이런 삶을 살았구나, 유교는 이런 거구나, 주변에는 이런 제자들이 있었구나.’를 하루 한번 잠깐씩 떠올렸다. 그중 나의 삶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것들은 그때그때 묵상으로 흘려보냈다.


그러나 <논어> 일력 역시 원하던 수준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식사 때와 잘 때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와 같이 굳이 시간 내어 봐야 하나 싶을 정도의 당연해 보이는 말들, ‘자리가 반듯하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와 같이 조금 꼰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들이 체감상 1/3 가량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금씩 감흥이 떨어졌다. 그래도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반복에 따라 서로 멀어지게 된다.‘, ’어찌해야 할까?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이미 어찌할 수가 없구나.‘와 같이 자극을 주는 말들도 가끔씩은 있었고 평소 궁금해하던 논어를 맛보기라도 한 것 같아 절반은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1년이 또 지났고 올해 일력은 패스하나 싶었다. 작년 일력이 크게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것은 올해도 선제적으로 일력을 준비할 동기부여가 떨어짐을 의미했다. 대신 <논어> 일력에 1년 더 도전해 보기로 결정했다.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을 다시 한번 보기로 한 이유는 더 이상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을 그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자극이 덜 됐던 이유를 내부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일력을 바꾸는 대신 일력을 해석하는 내 태도를 좀 더 배움에 호의적으로 바꿔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논어> 일력에 요일이 기재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시도이기도 하다. 분명히 이럴 계획이었는데 1월 3일인 지금 내 책상에는 세 개의 일력이 놓여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책상 위 자리 잡은 일력 중 하나는 ‘최진석의 말’이다. 1월 1일, 최진석 교수님의 강의를 유튜브에서 접했다. 최진석 교수님은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서는 데 도움을 주는 강의를 하고 계신다. 교수님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익히 들었기에 늘 마음 한편에 숙제처럼 남아있었다. 친구에게 교수님의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선물 받기도 했고, 이 책이 인생 책이라는 분을 창업 네트워크에서 만나기도 했었다. (두 번 만났는데 그 이야기를 두 번이나 하심) 그렇지만 철학적 사유가 쏟아져 머리가 과부하될 것 같아 회피하고 있었다. ‘언젠가 마음먹고 봐야지.’ 했는데 그게 연초가 됐다. 역시 교수님의 강의는 명불허전이었다. 그들이 왜 추천했는지, 왜 인생책인지 바로 공감할 수 있었다. 즉시 교수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했다. 피드를 훑다가 2024년 일력을 내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길로 결제했다. 이 일력을 매일 넘기며 나 자신에 대해 숙고해보려 한다.


다른 한 가지는 ‘영어회화 일력’이다. 영어로 읽고 싶은 자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우선 역사를 공부하면서 필요해졌다. 과거의 역사는 정리하고 해석해 놓은 자료가 많았는데 최근 역사는 스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히 한국 정치를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졌다. 외신이나 오피니언을 읽고 객관적인 관점을 흡수한 뒤 스스로 판단력을 높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또 힙합 관련 책이나 자료도 더 읽고 싶었다. 올해 힙합리더십을 좀 더 디벨롭해 볼 예정인데 그러려면 미국의 책이나 자료를 더 읽어야 한다. 한국에는 김봉현 선생님 책이 10권 내외로 가장 많고 다른 분들의 저서 1~2권씩 그게 다인데 이것들은 거의 다 읽었다. 나만의 남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싶기에 국내와 다른 새로운 관점도 궁금하고 특히 본토의 관점이 궁금했다. 역시 공부는 필요해야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한 것이 ‘영어회화 일력’이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영어 노출 빈도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단 간단한 회화라도 영어에 익숙해지면 나의 특성상 계속 줄기를 뻗어 영어공부를 지속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일력은 공부하기에 정말 효과적이고 좋은 도구라는 생각이다. 전체 학습해야 할 내용을 매일매일 계획으로 떠먹듯이 짜준 교재이기 때문이다. ‘쉽고 간단한 성취를 매일 하게 해주는 것. 그리고 그 계획을 미리 짜준 것.’ 지독한 P형인 데다가 귀차니즘이 심해 모든 일을 일단 미루는 게 일상인 나에게 적합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계획과 성취와 성과의 상관관계를 회사에 다니면서 체감한 이유도 있었다. 물론 계획과 성과의 관계는 알고는 있었지만 계획 세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직접 시도해 체험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회사에 다니면서 강제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숫자 달성하는 것을 가까이서 접하다 보니 필요성에 설득되고 있는 것 같다. 보통 회사에서는 하반기에 사업계획으로 연간 달성해야 할 숫자를 잡는다. 그리고 연말에는 그 숫자에 얼마나 다가갔는지로 평가를 한다. 그 계획들은 대체로 주도면밀해서 월간, 주간으로 잘게 쪼개지고 달성의 길을 매우 촘촘하게 그려놓는다. 작게 쪼개진 목표들은 부담을 덜어주고 실현 가능성과 자신감을 높여준다. 이렇게 미래를 제법 단단하게 그려놓고 그것을 따라 그리면 실적이 되고 달성하고 성과가 되는 것을 회사에서 10년 동안 본 것이다. 일력은 이런 관점에서 굉장히 효율적이고 확실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도구다.


아무튼 매년 일력을 찾는 이유는 한마디로 하자면 매일매일 성장하고 변화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나는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다. 그러려면 매일매일 생각을 하거나 지식을 흡수해야 한다. 그중 하나의 성취 도구로써 일력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올해가 끝나면 나는 최진석 교수님의 질문을 바탕으로 365+1일 나에 대해 숙고한 날들을 보냈을 것이며, 365+1개의 영어회화 문장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논어일력을 다시 읽으며 작년보다 호의적으로 변한 태도로 좀 더 공자의 관점을 내 인생에 비추어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작년의 나는 부족한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게 필요한 성정인 겸손을 얻을 수 있다. 올해는 일력을 통해 느끼고 성장한 것들을 휘발시키지 않고 브런치에 더 기록해보려고 한다. 나는 올해도 이렇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나만의 고유한 무늬를 그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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