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충분히 황당하다고 하신다면,,,
새해가 되자마자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이 많아지니 글을 쓸 엄두도 나지 않았다. 철학에 관련된 책과 유튜브 영상을 많이 본 탓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종잡을 수 없이 비대해졌다. 그에 따라 디깅하는 철학자도 한 명에서 두 명,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어났다. 더듬듯 찾은 철학자 중에는 니체도 있었고, 쇼펜하우어도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철학자는 한국의 최진석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의 1시간 30분짜리 강의 영상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영상을 하나 봤을 뿐인데 뭔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황당한 질문을 해야 발전이 있고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최진석 교수님은 2014년 한 영화를 보고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제 영화를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계는 황동혁 감독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교수님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하게 됐을까?
영화가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한 할머니가 영정사진을 찍으려고 사진관을 갔는데 플래시가 켜지자마자 젊은 아가씨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수상한 그녀>였다. <수상한 그녀>는 교수님이 그동안 봤던 한국영화와 달랐다. 그동안 많은 한국 영화는 있는 사건을 다시 다루거나 재해석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황당한 설정으로 시작한 영화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나라 콘텐츠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후 황동혁 감독은 <오징어게임>이라는 작품을 만든다. 이는 모두가 알듯 세계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물론 타임리프 콘텐츠는 <수상한 그녀> 외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도 많았다. 어쨌든 교수님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황당함’의 중요성이었다. 핵심을 찰떡같이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 모든 문명의 발전은 대답이 아닌 질문의 결과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질문은 황당할수록 황당한 생각이 나올 수 있다. 결국 황당한 생각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 교수님 이야기의 요지였다. 나 또한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교수님이 말하는 황당한 생각이란 무엇일까.
황당한 생각을 한 사람 중 한 명은 탈레스다. 고대 그리스 시대 최초의 철학자라고 꼽힌다. 그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주장을 했다. ‘만물의 근원이 신’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시대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황당한 주장이었다. 그는 나일강의 범람을 그 이전 사람들과는 다르게 설명한다. 나일강의 범람이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강의 범람이 자연적인 주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많은 자연 현상들을 신의 개입이나 신화적 설명으로 이해했지만, 탈레스는 본인이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기존과 다른 황당한 생각을 했다. 이는 과학적 사고의 시초가 되며 서양 철학과 과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그런데 교수님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황당한 생각을 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주체적으로 사상과 문화를 만들어 세계를 주도한 경험은 없다. 우리와 유사한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은 좀 다르다. 중국이 유가나 도가같은 사상을 만들어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주목했다. 중국과 일본은 아편전쟁과 페리 제독 사건으로 강제 개항을 하게 되자 서양 문명을 수입하기로 했다. 이후 각자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름대로 주체적으로 서양 문물을 흡수했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국가이념을 창조해 새로운 국가를 세웠고, 일본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예 새로운 국가로 나라를 재정비했다.
물론 이후 행보들을 봤을 때 초래한 결과들이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다. 중국은 공산주의에 일당독재가 됐고, 일본도 군국주의가 됐다. 이런 점에서 서구문명을 완전히 잘 받아들였다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두 나라가 이후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나라가 됐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화적 측면으로도 일본은 독보적이다. 아메카지 패션과 레이가와 쿠보의 꼼데가르송 등 오뜨꾸뛰르, 자니스로 대표됐던 아이돌 산업과 시티팝 같은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이는 독창적인 오리지널리티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자신에게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더하고 빼며 서구문명을 내재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주체성을 갖기 어려웠다. 개항의 시기 자체도 늦었고, 개항을 한 주체도 서구가 아니라 흑심을 품은 일본이었으며, 지배층의 판단도 아쉬웠다. 게다가 우리를 장기간 잔인하게 식민지 삼았던 일본으로 인해 주체적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Fast follower’로서 기적에 가깝게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이 과정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지는 못했다. 받아들이는 것도 주체적으로 수정하고 맞춰가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받아들인 것이 더 많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문화나 사상을 만들어 세계를 주도해 가는 ‘First mover’로 발돋움하지는 못했다. 이미 기존에 있는 것으로는 최고의 성과를 이루었기에 이제는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낼 시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새로 만드는 것보다 만들어 놓은 것을 빨리 따라가는 것을 잘해왔다. 사실 우리나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의 유교나 인도의 불교 등 문명을 수입한 경험만 있지 우리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수출한 경험은 없었다. 비슷한 이야기로 삼성과 애플이 있다. 삼성은 애플의 후발주자로 기술을 기막히게 따라잡아 글로벌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삼성이 애플을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창의적인 회사와 따라 하는 회사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디어를 수입하는 것과 생산하는 것의 차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고과정이었다. 물론 중국과 일본이 초래한 결과들은 덜 고려하고, 한국이 이뤄온 것들을 낮게 평가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평소에 가졌던 고민들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힙합 아티스트 칸예웨스트를 보며 ‘왜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 것은 이토록 험난한가?’ 생각했고, <왜 모두 미국에서 탄생했을까?>라는 책을 읽으며 현재 웹세상이 1960년대 히피들이 꿈꿨던 공동체적 세계관을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만들어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임을 알고 놀랐다. 모두 장르를 창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칸예는 기존 힙합씬에서 황당하다며 배척당했지만 샘플링과 패션을 적극 활용해 힙합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고 히피들은 60년대 황당하다고 핍박받았지만 웹세상과 실리콘밸리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새로운 생산의 시발점이 됐다. 장르를 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세상에 없어서 평범한 사람을 황당하게 만들어 우선 부정당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각들이 내게는 굉장히 새롭고 자극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인가 생산할 때에 기존에 없는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선택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현재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나은 것을, 최대한 빨리 만들겠다는 생각에만 천착한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에만 집중하니 전혀 없는 새로운 생각보다는 기존에 있던 것을 조합할 생각만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최진석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것이 어떤 경향성으로 읽히며 메타인지를 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완전히 새로운 황당한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과 시야를 얻게 되었다. 가령 <오징어게임>을 접하는 층위도 더 확장됐다. 사실 <오징어게임>이 무척 대단한 콘텐츠이기는 하지만 미국이 만든 인터넷 위에 만들어진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에 <오징어게임>이라는 콘텐츠를 올린 것이다. 누군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나의 사고의 차원이 새롭게 열린 것과 같다. 누군가 만든 것을 수입하는 관점이 아닌 생산의 관점으로 생각하자는 접근방법을 얻었다.
진정한 생산자의 관점을 갖기 위해 올해는 황당한 생각을 많이 해보려고 한다. 물론 내 주위 사람들이 ’너같이 황당한 생각하는 애가 어디 있냐’고 말하는 것이 귀에 들리는 것 같고, 일부 맞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호기심 차원이었지 생산자적 관점은 아니었다. 올해는 생산자의 관점을 가지고 기존에 하던 생각에서 몇 단계 더 나아가볼 생각이다. 다른 관점에서, 더 많이 생각해보려고 한다. 아직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없던 기준이 나에게 새로 생겼으니 만족의 기준이 달라질 것이고, 지향점이 업그레이드됐으니 앞으로 내가 만들어낼 것들은 달라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황당한 질문에서 출발할 테다. 여태까지의 생각보다 더 황당한 생각을 해봐야겠다. 앞으로 펼쳐질 내 생각과 인생이 달라지기를 바라며, 그렇게 될 것이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