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이지 Aug 29. 2021

miss summer

웹진 취향껏 19호

여름을 처음 만난 곳은 인적이 드문 제주 오름이었다. 험준한 오름을 오르면서 등산화 하나 사지 않은 게 화근이었을까, 중턱에 다다랐을 때쯤 헛디디어 발목을 접질렸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누구든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나에게 다가온 게 여름이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등산화에 스틱까지 만반의 준비를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살려주세요.” 



 

올해 쓸 수 있는 모든 운을 이곳에 쓴 느낌이었다. 여름의 도움으로 오름에서 내려오니 주차장에는 여름의 차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여름은 조수석 문을 열어 나를 앉히고는 뒷좌석에서 뿌리는 파스를 꺼내와 발목에 뿌려주었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괜찮다면 자기 집으로 가자는 여름의 말을 거절하기에는 이미 부을 대로 부은 발목 탓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하는 동안 여름과 나는 통성명을 했다. 여름의 이름을 듣자마자 계절이 가진 힘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높은 나무로 둘러싸인 여름의 집은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이층 집이었다. 처음 발을 딛는 순간 온 집 안에서 여름과 만났을 때부터 났던 숲 향이 풍겼다. 소파에 앉아 없는 게 없을 것 같은 잡동사니 가득한 집을 둘러보았다. 신기한 건 그렇게나 많은 사물이 제각기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것마냥 정돈되어 있었다.   




“다행히 붕대가 남아있네요. 감아줄 테니까 내일까지 한 번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접질린 발목에 촘촘히 붕대를 감아주는 여름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시원한 소재의 만다라 문양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름은 내가 묵고 있는 숙소가 어디냐고 물으며 시원한 커피 한 잔을 건넸다. 묵고 있는 숙소는 애월읍 근처 게스트하우스였다. 돈을 줄여보자며 예약한 숙소는 사진과 다르게 깨끗하지 않았고,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이 코를 고는데 그렇게 시끄러운 코골이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며 치를 떠니 여름은 한참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묵는 게 어때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제주에 왔더라. 다니던 출판회사가 망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아무리 종이책 판매가 더디다지만 어음을 갚지 못해 파산하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이미 회사 사정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속속들이 떠났다. 유일하게 목적지가 없던 나는 억지로라도 목적지를 만들어야겠단 생각에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하지만 목적지라는 명목만 가진 제주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묵겠다는 대답을 미룬 채 늦은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회사 이야기가 나왔다. 이룬 것 없이 떠돌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어려운 오름을 선택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에 오르면 어디엔가 속할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름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작은 행복을 모으다 보면 분명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게 될 거라고 말했다. 여름의 언어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마음에 새겨지는 순간 이곳에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왜인지 곁에 머물러야 할 것만 같았다.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여름은 어떤 사람일까. 낯선 나에게 동질감 그 비슷한 걸 느꼈을까. 여름에게 이 집은 어떠한 의미일까. 유독 한 쌍인 물건들을 비집고 나오는 그리움은 무엇일까. 여름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혼자 이 집에 머무른 지 2년이 훌쩍 넘었다고 했다. 삼 일째가 되던 날, 마당에 앉아 복숭아를 먹다 나온 얘기였다. 먼 곳에 시선을 둔 여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움을 얼굴에 담는다면 저런 표정이겠지 싶었다.  


발목이 낫고 나서는 자주 맨발로 마당을 걸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후죽순 자라난 잔디를 그새 말끔히 정리한 덕이었다. 높게 솟은 나무가 그늘이 되어주었고 어디에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곳에 서서 눈을 감고 가만히 계절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두고 온 것들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회사에서 그나마 친했던 박 주임에게 전화가 왔다. 이직한 곳에서 직원을 뽑고 있으니 지원해보라는 연락이었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난 사람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는 건 의아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일이었다. 제주에 온 것이 방황에 가까웠단 사실을 깨닫기까지 여름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여름과 보내는 마지막 밤, 나는 언제든 그리우면 볼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안 되냐고 여름에게 물었다. 여름은 여느 때와 같이 웃어 보이며 서울에서 파는 맛있는 빵을 사 온다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캐리어를 현관문 앞에 세워두고 여름을 바라보았다. 여름은 첫날 입은 만다라 문양 원피스를 입고 배웅했다. 제주에 오면 언제든 연락하란 여름의 말에 보이지 않는 나의 뿌리 한 가닥이 이곳에 내려앉았다.  





“돌아가면 발목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오름 비슷한 곳은 가지 말아요. 정상이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곳은 많을 거예요.” 


 


내 인생의 계절 하나를 온전히 차지한 여름은 마지막까지 다정했다. 서울에 올라가서도 문득 여름이 떠올라 반짝이는 서울 풍경 사진과 함께 제주에 가고 싶다고 연락했다. 그럴 때마다 여름은 매미가 울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라는 말과 마당 사진을 보내주었다.  


다시 매미 울음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우는 계절이 찾아왔다. 여름을 만나러 가야겠다.







Photo by Hyunwon Jang on Unsplash


<웹진 취향껏> 에서 더 많은 글을 읽어보세요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