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존재의 이름을 훔친 이야기

by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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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은 보통 괴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이름은 본래 괴물을 만든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것이다.

나는 이 뒤집힌 이름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이 비극은 ‘괴물’이 태어나서 시작된 게 아니라,

창조주가 책임을 외면하는 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빅터는 너무 일찍 상실을 배운 사람처럼 보인다.

내가 만들지 않은 것들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

그 공포가 한 젊은이를 ‘창조’라는 단어 속으로 밀어 넣는다.


무너짐을 막으려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생명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결국 해낸다.


죽은 살을 엮어 하나의 몸을 만들고, 생명을 ‘작동’시킨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가장 위대한 성공은 가장 참혹한 실패가 된다.

그는 실패해서 무너진 게 아니라, 성공해서 무너졌다.

집착은 이루는 순간 끝나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 대가를 청구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책임을 명령한다고 했다.

그런데 빅터에게 타자의 얼굴은 책임이 아니라 ‘공포’로 읽힌다.

그는 자신이 만든 존재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도망친다.

윤리가 가장 먼저 꺼지는 그 순간,

그의 도망은 한 생명에게 ‘버려짐’이라는 저주가 된다.


창조는 탄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창조는 양육까지,

그리고 “너는 여기 있어도 된다”는 말까지 포함해야만 완성된다.

하지만 그 말이 오지 않으면, 존재는 이름 없이 태어난다.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괴물’이라 부르고,

그 이름은 피부에 새겨진 흉터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괴물’은 외형이 아니다.

괴물은 어떤 존재를 대하는 방식이다.


어떤 눈에는 흉터가 먼저 보이고,

어떤 눈에는 떨림이 먼저 보인다.

누군가는 외형을 보고 괴물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그 순수한 마음을 보고 아이라고 말한다.

같은 존재가,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운명을 얻는다.


그는 악해서 괴물이 된 게 아니라,

괴물로 불렸기 때문에 악을 배웠다.


그는 창조주를 찾아 나선다.

복수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한 문장을 얻기 위해서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나는 끝까지 책임져질 가치가 있었나.”


인정 욕구는 본능일까, 상처일까.

나는 아직도 헷갈린다.

다만 확실한 건,

인정이 끊긴 자리에서 사람은 ‘존재’ 대신 ‘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헤겔의 언어로 말하면, 이 관계는 인정투쟁의 가장 비극적인 형태다.

인정받지 못한 존재는 폭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인정해줄 수 없는 창조주는 끝까지 도망치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괴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정받지 못한 존재와 인정해주지 못한 존재가

서로의 이름을 훔쳐 쓰다 함께 무너지는 이야기로 읽는다.

책임에 대한 이야기라고.


우리는 불안을 견디기 위해 무언가를 만든다.

성취를 만들고, 이미지를 만들고, 안전한 자아를 만든다.

그 모든 창조의 밑바닥에는 대개 같은 문장이 눌려 있다.

“나를 가치 있게 봐줘.”

그 문장이 간절할수록,

우리는 더 빨리 만들고, 더 멀리 도망친다.

그리고 종종—마주해야 할 얼굴을 외면한다.


나는 마지막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다시 떠올린다.

그 이름은 결국 누구의 것이었을까.


어쩌면 이 이야기의 가장 서늘한 진실은 이것이다.

괴물은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을 외면하는 순간 내 안에서 조용히 태어난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두려워하던 이름을 내가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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