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민재 Dec 05. 2017

불균형을 감당하는 것

영화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보고


요즘에는 부쩍 ‘추리‘라는 장르에 끌린다. 내 나름대로의 해석은 딱히 머리를 써서 생각하고 문제를 풀어 나갈만한 지적인 자극이 나의 일상에서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없이 영화를 보러 갔고 영화의 장르 말고는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영화의 주인공인 ‘에르퀼 푸아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탐정이다. 영화 초반에 그는 아주 자신만만하며 확신에 차 있었다. 어떻게 벽에 나 있는 작은 균열  하나로 범인을 그렇게 완벽하게 추리해낼 수 있었냐는 경찰의 질문에 ’세상의 모든 일에는 옳고 그름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그 저울의 균형을 깨는 미세한 차이를 감지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고 대답하는 그의 모습은 세계 최고의 명탐정으로서 그가 갖고 있는 자부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영화가 결말로 치닫고 추리의 결과로 누가 살인범인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복잡하고 우울해보이지만 그 전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인간적인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옳고 그름의 사이에 당신들이 있소. 정의의 거울이 기울어질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이제 불균형을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겠지요. 이중에 살인자는 없습니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만 있을 뿐.”

     

불균형을 감당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 배움의 과정을 통해서 한 인간이 자기 인생에 펼쳐진 하나의 장을 매듭짓고 그 다음에 펼쳐진 세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나는 이 영화 속에서 보았다. 비록 그는 혼란스럽고 다소 좌절한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것이야 말로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의 경우도 그랬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어떤 문제든 명확하게 나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스스로 자신감이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나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고 예상치 못했던 여러 가지 좌절들을 겪으면서 혼란에 빠졌다. 내가 붙들고 왔던 기준들이 사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신기루라는 사실이 처음에는 충격이었지만 여러 번 반복될수록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현명한 대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근에 내가 받아들인 불균형은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것이다. 일과 삶의 영역이 자연스럽게 어우려져 정확히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기대하다보니 나는 일의 영역에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일의 영역에 뛰어들었다가 삶과의 균형을 잡을 수 없어 거의 탈진 상태에서 중도하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남들은 다들 균형을 잘 잡고 살고 있는데 나는 그게 안 되는 것 같아 속상하고 열등감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그런 고통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들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같이 딱 떨어지는 균형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어느 정도의 불균형을 받아들이면서 그 시간을 고통스럽지 않게 혹은 나에게 편하게 맞추어 지내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완벽하게 균형 잡는 것은 어차피 안되니 그 중에서 나는 지금 현재 어떤 것에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둘 것인지 생각해서 거기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곁가지로 유지하는 정도로 하면서 뒤로 미루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어떤 식으로 시도해볼 것인지에 에너지를 옮겨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하는 삶의 영역에서의 시간에 이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이것이 불균형을 감당하는 법을 배우고 난 뒤의 이로운 점이다.

     

불균형을 감당하는 법을 배우겠다고 한 주인공 ‘에르퀼 푸아로’의 다음 편에서의 모습이 기대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