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짜여진 상태로 반복되는 일상의 틀.
성인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규범은 아무래도 직장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수업에 빠질 수 있다는 선택 사항이 있었는데, 직장은 그렇지 않다.
물론 병가나 월차 등의 개념이 있겠고, 직장에 따라 휴가를 사용하는 유연성에 있어 차이가 있을 테지만 원칙적으로 직장은 빠지거나 내맘대로 안 가서는 안되는 곳이다.
아... 사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 여전히 어려움을 느낀다. 근무를 할 때 무책임하게 굴거나 무단으로 결석을 한 일은 없다. (몇 번의 지각이 떠오르기는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근무하기로 한 날에는 무조건 'ready' 상태여야 한다는 전제가 적지 않은 압박과 부담으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몇 년간 익숙했던 틀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생활을 선택한 후 초반에는 제일 좋았던 게, 내가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어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일을 할 때는 배가 별로 고프지 않거나 먹고 싶은 게 없을 때에도 정해진 점심시간 안에 밥을 먹어야만 했다. 이런 루틴에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난 나중엔 이런 사소한(?) 사실에도 짜증이 났던 것 같다. 오후 느지막이, 갑자기 먹고 싶어진 짬뽕을 먹으러 간다거나, 집에서 좀 떨어져있는 유명한 우동집에 가서 한 끼를 먹고자 줄을 서는 이런 순간에 나는 마치 대단한 사치를 하고 있는 듯한 만족감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놀면서 지내다보면, 좀 역설적이긴 하지만, 또 다른 루틴들이 하나 둘 생겨나게 된다. 우리 모두가 어릴 때 '방학'을 경험해봐서 알지만 아무 것도 안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헐렁한 형태로라도 작은 습관이나 규칙들이 필요해진다고 해야할까?
이리하여 나에게 생긴 새로운 루틴들은 다음과 같다.
일주일에 두 번 가고 있는 필라테스 그룹 수업, 일주일에 한 번 화실 가기, 그리고 정해진 날은 없지만 일주일에 2-3번 이상은 가려고 하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
남미여행을 앞두고 무료 앱을 통해 하루에 10분 남짓 시간을 들여 공부 중인 스페인어.
또 뭐가 있더라...?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번은 가려고 하는 부모님 집.
일년에 1-2번은 얼굴 보려고 하는 친구 혹은 동료 모임들.
이런 것도 루틴이라는 말에 넣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아무리 틀에 박힌 게 싫고 지겹고 어쩌고저쩌고 해도 삶에서 어떤 일정성 혹은 규칙 같은 것들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는 나로서는 이 주제에 늘 관심이 많다.
주말에는 이맘때 거의 매년 가고 있는 야외 음악 페스티벌에 갔다. 이번엔 가지 않으려다가 최애가수가 나온다길래 다녀왔던 거긴 하지만...
그 곳에서 가을의 볕과 청명한 하늘과 나무들을 보며,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매년 돈을 지불하고 오고 있는 음악 페스티벌도 내게 일종의 습관이고 루틴이라는 사실.
사람이 여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면, 내게 맞는 좋은 습관과 루틴을 잘 선택하고 지속시키는 것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될런지도 모르겠다는, 이런 소소한 생각들을 했다.
내가 선택해서 지금 유지하고 있는 루틴들은 나름대로 좋다.
재능과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살면서 운동을 잘해본 적은 없다- 정기적으로 몸을 늘려주고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을 자극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지만 내가 좋아했던 그림이나 사진을 직접 그려볼 수 있다는 점도 다 마음에 든다. 여행 가서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 배워보는 낯선 단어들과 힘이 잔뜩 들어간 발음도 재밌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해볼 생각이다.
나름의 성실한 루틴들과 즉흥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 이 두 가지가 적절히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은 없을까?
아직도 나는 이런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