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걸으면 보이는 것들

가을 산책

by perezoso

짧은 가을.

안 그래도 짧은데 점점 더 짧아지고 있는 이 가을.

산책에 더 시간을 내어야만 하는 계절이 왔다.


일어나자마자 옷을 챙겨 입고 걸으러 나가본다. 오늘은 일단 동네 공원으로.

더 추워지기 전에 파주도 한 번 다녀오고, 평창동과 부암동에도 가보리라 마음 먹으면서.


자주 가니 새로울 것도 없는 곳인데 오늘은 뭔가 색다른 기분이 든다. 갑자기 선선해진 날씨 탓인가.

삼삼오오 손을 잡고 소풍을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 조카가 생긴 이후로 길에서 만난 아이들과 조카의 나이를 견주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쉬지않고 조잘대고 뛰어다닌다.

'OO여고 총동창회'라는 팻말도 보인다. 동창회를 이렇게 야외에서 하는 모양이다. 명찰 같은 걸 달고 걸어가는 아주머니들의 걸음은 가볍고 표정은 한껏 들떠보인다.

연한 브라운 계열로 자켓을 맞춰입고 온 젊은 연인도 보인다. 저렇게 입기로 미리 계획을 하고, 여기 와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즐거워할, 잘 나온 사진은 SNS에도 떡 하니 걸어둘 그들이 눈앞에 그려지며 왠지 모르게 흐뭇해진다.

혼자 와서는 주위를 신경 쓰며 다니는 듯 보이는, 긴 생머리의 젊은 여성도 지나간다.


잎들은 조금씩 색을 바꿔가고 있는 중인데 성질 급하게 미리 붉어진 애들도 가끔 눈에 띈다.

작은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버드나무와 미루나무는 언제 봐도 근사해서 매번 사진을 찍게 만든다.

말갛게 모습을 드러낸 벌개미취도 참 예쁘다.


천천히 걸으며 하나하나 살펴보니 다 아름답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단풍 절정기를 맞추어 사람이 미어터지는 유명한 산에 가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운치 있는 가을날이다.


점점 더 노쇠해지는 아버지의 기억력 저하 문제로 병원 진료를 의논하고 온 어제의 무거움도 오늘은 좀 가벼워지는 듯하다.


생.로.병.사.

순간 순간을 놓치지 말고 충분히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유일한 진실을,

삶이 시작되고 있는 아이들의 소풍과 한참 전에 여고를 졸업한 어른들의 동창회가 함께 열리는 공원을 걸으며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가을에 대한 의견

마종기


아, 이 어마어마한
하느님의 얼굴 좀 봐.
수억으로 흔들리는 점묘파 그림.
사는 것은 꿈이고
죽는 것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며
멀리 떠나가는 정신 나간 나뭇잎.

매일 색깔을 바꾸느라 밤잠 설치는
저 하느님의 얼굴 좀 봐.
두 개의 직선은
면적을 만들지 못하고 떠난다.
헤어지지 않는 인연은 없다.
자유롭기 위해서 마지막 고집을 모아
겨울의 외로운 병사를
찾아가는 나뭇잎.


작가의 이전글우정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