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세계

Coup de Chance, 쇼생크 탈출, 그리고 세계의 주인.

by perezoso

어제는 낮에 극장에 가서 볼 계획이 전혀 없던 영화를 하나 봤다.

<Coup de Chance>라는 제목의, 우디 앨런이 감독한 영화. 국내에서는 '럭키 데이 인 파리'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저 불어는 '뜻밖의 행운'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원제와 대충 뜻이 통하는 것 같기는 하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열심히 챙겨보던 시기가 있었고 <블루 재스민> 같은 영화는 꽤 좋아하기도 한다. 예술가의 작품과 그(녀)의 사적인 삶을 구분해서 볼 것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해묵은 것이고 정답도 없겠지만 입양한 딸을 부인으로 삼았다는 그의 사생활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용이 되지 않고 심한 불쾌감 같은 것이 드는 게 사실이다. (다시 찾아보니 이 사건은, 사실 미아 패로가 심한 아동 학대를 한 것이다, 우디 앨런이 다른 입양 자녀도 성추행했다, 그건 주입된 거짓 진술이다...등 상반된 주장들이 맞서며 법적으로 확정이 되지 않은 상태인 모양이다. 매우 복잡하군.)

뭐, 아무튼, 요즘엔 큰 관심이 없던 감독의 최신작을 '우연히', 그러니까 시간이 대략 맞아서 보게 되었는데...

영화를 다 본 느낌은 '아, 너무 좋다! 산뜻하다!'였다.

사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스토리의 영화인데 마지막까지 다 보고나면 탄식이 나온다고 해야할까? 깔끔한 만듦새와 영화에서 내내 강조되던 '운'과 '우연'이라는 주제가 관객에게도 확 와서 박히는 것에 대해 탄복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산뜻함'은 아마도 영화에 계속 깔려있는 훌륭한 재즈 음악들의 영향이 클 것 같다.

찾아보니 우디 앨런은 1935년생이라는데 80세를 훌쩍 넘어 90세에 가까운 이가 이렇게 계속 각본을 쓰고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영화를 영화 자체로 즐기고 좋아하는 것과 만든 이를 떠올리고 고려하는 것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인데... 평일 낮에 우연히 시네큐브에 가서 12000원 내고 본 이 영화가, 영화라는 세계가 날 꽤나 즐겁게 해주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며칠 전에는 아주 오랜만에 <쇼생크 탈출>을 다시 봤다.

남편이 <조각도시>라는 시리즈물을 보길래 옆에서 몇 편 같이 보다가, 이 오래된 영화가 떠오른 거였다.

팀 로빈스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외국 영화 배우다. (키아누 리브스가 먼저였나?) 소싯적에 나도 열심히 비디오를 빌려보며 소위 예술 영화를 찾아보던 사람이었는데, <플레이어>라는 영화에서 흰 런닝을 입고 있던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내가 처음으로 섹시함을 느꼈던 대상이라고나 할까? 하핫. <허드서커 대리인> 같은 영화도 갑자기 떠오른다.


다시 본 이 영화는 여전히 명작이었다. 앤디 듀프레인이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를 죄수들이 다 들을 수 있게 트는 장면, 야외 노동을 하는 동료 죄수들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여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벌리고 온몸으로 비를 맞는 장면, 그리고 지우아타네호에서 레드와 앤디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 모든 감동적인 scene들에는 그야말로 '자유'가 너무나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다시 봐도 눈물이 났다.

자유.

소중하지만 추상적이기도 한 이 주제를 이 영화보다 잘 드러낸 작품은 잘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

정말 좋은 영화다.



마지막으로는 올해 화제의 독립 영화인 <세계의 주인>.

영화를 다 보고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이 정도의 섬세함과 감수성은 있어야 '성폭력' 같은 주제를 다룰 자격이 있는 거지...하는 생각.

그렇지 않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온갖 가볍고 자극적이고 관음증적인 방식으로, 뻔하고 쉬운 소재로, 마구 그려내는 창작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말 화가 난다.

당사자의 고통, 가족들의 고통이 결코 사소하거나 일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성폭력 생존자가 피해자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진실을 이렇게 잘 보여주다니. '희망적'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 같다.

깊이 있는 시선과 새로움이 훌륭한 미덕인 영화.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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