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흐테르를 듣는 가을 오후.

by perezoso

리흐테르.

저 멀리 러시아에서 살았던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며

바람에 사방으로 날리는 붉은 잎들, 창밖을 가만히 바라본다.

늠름한 소나무 가지도,

멀리 있는 메타세콰이어 나무도,

노랑 잎들이 아직 매달려있는 은행 나무도

이리 저리로 마구 흔들리며 잎들을 떨구어내는

11월의 오후.

조금 흐린 하늘 덕에 더욱 스산하기만 하다.

이렇게 또 다음 계절로, 발이 시리고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만 있고 싶은 계절로

넘어가려는 모양이구나.


눈 앞엔 시들지 않고 몇 주째 그대로인 짙은 자줏빛 국화가 날 보고 있다.

가을의 색이다.


싱싱하던 잎들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

황량하고 혹독한 시간을 견뎌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새 봄이 찾아오면

또다시 싹이 돋아나고 연한 잎들이 점점 무성해지는.

이 끝도 없는 순환.

순환 속의 生.


이 세상에 나온지 4년이 채 되지 않은 어린 것은

쉬지 않고 재잘대며 움직인다.

이 주기를 80번 이상 반복하며 시간을 살아온 늙은 할아비는

이제 집 앞에 나가는 데에도 큰 결심이 필요하다.


나고 살다가 죽는 것도

나무의 순환처럼 생각하면

한결 가벼울까.

자연스럽게 여겨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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