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환상 혹은 신기루에 관하여.

by perezoso

2월 한 달간 긴 여행을 다녀왔다.

머나먼, 이름도 생소한 남미의 나라들이었고 앞서 두 번이나 불발된 후 마침내 성사된 여행이기도 했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나보다 더 여행을 사랑하는 엄마와 둘이 남미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열심히 고른 여행사에 돈도 다 내고 황열 예방 주사도 맞은 후 출발일을 기다리던 중, 갑작스런 엄마의 암 진단으로 모든 일정을 취소하게 된, 큰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20년. 그 때에도 남미를 포함해서 평소에 가기 어려운 나라들을 쭉 돌아보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기로 했었다. 큰 배낭을 당근으로 사고 또 온갖 예방 주사를 맞고 모든 준비를 다 마쳤는데... 왠 듣도 보도 못한 역병이 돌아 해외여행 자체가 불가해지는 황당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올해. 이번엔 어떤 외부적 요인이나 방해 요소가 없이, 드디어,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던 것이었다. (만세...!)


행복한 한 달이었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이란, 온갖 책무와 걱정거리, 지리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뒤로한 채 떠난 이국에서의 시간은 대부분 평소보다 즐겁고 가벼운 게 당연하지만, 이번엔 더 그랬던 것 같다.

몇 번이나 미끄러진 후 마침내 가게된 곳이어서인지,

처음 보는 입 벌어지는 풍경들과 그 곳의 사람들, 귀여운 동물과 새들에 매료되어서인지,

단체여행으로 가서 함께 여행한 이들의 즐겁고 좋은 에너지 덕분인 건지 모르겠다.

아마 모두 다이겠지만 세 번째 요소가 제일 주요했던 듯하다. 같이 먹고 마시고, 근사한 풍경에 함께 감탄하고, 서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고 또 열심히 보내주고, 몸 고생도 함께 하며 공유한 시간들이 참 좋았다. 동류라는 이상한 연대감과 친밀감이 마구 느껴졌었다. 낭만적인 순간들도 많았다.


그리고 지금.

돌아온 지 사실 일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직 시차 적응조차 다 끝나지 않은 시점인데...

나는 조용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내 집 거실에 혼자 앉아있다.

그 한 달의 꿈 같던 시간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것만 같다.

물론 핸드폰 안에는 그간 열심히 찍은 사진들과 동영상이 2000장도 넘게 들어있다. 언제든 그것들을 꺼내볼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은 마치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금방 사라져버리는 모래 같다.

처음 겪는 기분도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여행 기간이 길어서였는지, 워낙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뭔가 더 허무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모든 좋던 것들은 어디로 다 가버렸지?'


여행이란 그저 환상이고,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런 환상에 늘 목을 매고 깊이 마음을 두고 있다니 어리석고 딱한 노릇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로 여행을 이렇게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하고 마음 속으로 떠올려도 아무 소용이 없는데 그리움을 멈출 수 없는 옛사랑처럼, 신기루 같고 손에 움켜쥘 수도 없는 것이어서 이렇게 계속 여행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환상,이라고 해야할까.


한 달간 비행기와 버스로 이동을 너무 많이 하고, 특히 귀국할 때는 '8시간 + 15시간' 비행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아주 넌더리가 나기도 해서, 한동안 외국 여행은 좀 쉬어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을 했다.

과연 결심대로 될런지는 두고봐야 알겠다.









작가의 이전글2026년을 맞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