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말 한마디
가끔 들어가는 커뮤니티를 통해 우연히 보게 된 푸바오 영상을 시작으로 종종 판다가족 영상을 보는 팬이 되었다. 첫째가 있는 상태에서 쌍둥이를 출산해 아이 셋 엄마가 된 아이바오가 나와 비슷해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열흘 전쯤 딸아이 방에 빨래한 옷을 갖다 주러 갔다가 아이패드에 푸바오 동영상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파자마 차림으로 나른하게 침대에 누워 있던 선이가
"엄마 푸바오 정말 귀엽지? 나 피곤할 때 푸바오 보고 있으면 기분 좋아진다"
하고 말을 걸어왔다.
"그래? 엄마도 가끔 바오가족 보는데"
기질도 외모도 별로 날 닮지 않은 딸과 공통관심사가 생긴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딸아이의 작은 일인용 침대에 누워 짧은 동영상 하나를 같이 보고 판다가족이야기로 잠깐 수다를 떨다 내 방으로 왔다.
유퀴즈 온 더 블록에 푸바오의 할부지로 불리는 강철원 사육사님이 나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커피 한 잔 들고 티브이 앞에 앉아 유튜브를 재생했다.
방송 내내 사육사님의 눈빛과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푸바오를 사랑하는지 절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판다영상을 보면서 힐링되는 이유가 단지 판다가 귀엽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친구가 알려주었다.
푸바오를 부르는 사육사님의 목소리가 너무도 다정하고 따뜻해서 영상을 보다 보면 자기도 아기판다가 되어서 사랑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계속 보게 된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나도 그랬다. 영상 속에서 모습은 많이 나오지 않지만 한결같이 다정하게 푸바~옹~하고 부르는 사육사님 목소리가 재생이 끝난 후에도 한참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d9QSgwdRzs
비둘기만 보면 피해 다니고 강아지나 고양이에도 그다지 관심 없었던 내 딸이 매일 판다영상을 보는 건 다정한 말 한마디가 고파서였을까.
어제 머리를 하러 가로수길에 갔던 딸이 내가 좋아하는 올드페ㅇ 도넛을 한 개 사 왔다.
보름 전쯤 딸이 식탁에 두고 간 도넛은 내가 보기에 공포스러울 정도로 칼로리폭탄임이 느껴졌지만 커피와 함께 한 입 베어문 순간 탄성이 터지는 맛이었다.
당이 바로 혈관 속으로 침투하는 듯한 극강의 단맛과 쫄깃한 도우의 기분 좋은 콜라보가 평소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까지도 바로 매료시켰다.
"두 개 먹기엔 너무 달 것 같고 도넛은 금방 맛없어져서 하나만 사 왔어"
딸이 시크하게 도넛을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다.
소화기관이 그리 튼튼한 편이 아니라 밤에 빵종류를 먹지 않지만 딸이 사 온 거니까 커피 대신 카모마일 차와 함께 네 등분으로 자른 도넛 한 덩이를 입에 넣었다. 초고속으로 당충전이 되면서 맛있다는 감각이 확 밀려든다.
딸 방 문을 살짝 열고 비음이 섞인 목소리로
" 음~ 역시 너무 맛있어"
하고 말해주었다.
피곤한 눈으로 푸바오영상을 보고 있던 딸아이 눈이 반짝인다.
"맛있지? 내가 또 사 줄게"
뿌듯한 딸아이의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어릴 때 자주 하던 "Sleep tight"를 오랜만에 말하며 딸아이를 한 번 안아주고 방에서 나왔다.
푸바오 영상을 즐겨보는 나도, 딸아이도 귀여운 판다모습에 눈호강하면서 사육사님의 다정한 목소리에 위로받았던 게 틀림없다.
아이가 커서 엄마가 챙겨줄 것이 줄어드는 만큼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비례해서 없어진다.
성인이 된 아이는 엄마에게 대놓고 칭얼거리기에는 어색하지만 여전히 위로가 필요하다.
아이가 내 품에서 멀어지는 걸 알게 되는 엄마는 외롭지만 말할 데가 없다.
비가 계속 내리다 모처럼 개인 오늘 그냥 기분이 좋아져서 맑은 공기를 즐기며 동네를 걸어 다녔다.
장마 중 해가 잠깐 나왔다고 기분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라지만 작은 변화에도 휘둘리는 나약한 나를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마음에 없는 빈 말 하는 데는 재주가 전혀 없는 고지식한 엄마는 아이들이 힘들어 보이는 날에도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 잘 모른다. 다 큰 아이들과 스킨십을 하는 것이 예전만큼 자연스럽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 살짝 서글프기도 하다.
아이들이 장마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면 그냥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려 한다.
"준이야~"
"선이야~"
"영이야~"
그러면 아이들은 왜? 하고 묻겠지.
그러면 무심한 듯 대답해 줘야겠다.
"우리 딸 이뻐서 한 번 불러봤어."
"우리 아들 멋있어서 한 번 불러봤어"
엄마의 다정한 한 마디가 긴 장마 중에 갑자기 개인 하루 같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