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꽃도 드물고 꽃수명도 짧은 여름에는 꽃시장 방문을 자제하려고 했는데 우중충한 날씨에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나의 유일한 사치인 꽃 소비 욕구가 솟구쳐 올라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 커다란 우산을 들고 나와 칠 분여를 걸어 꽃도매시장 앞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폐장시간인 오후 12시 이전에 다 둘러보고 꽃구매를 끝내야 해서 서둘렀더니 내 행색도 비 오는 창 밖 풍경만큼이나 칙칙하다.
시장을 다 둘러보았는데 여름은 여름인지라 꽃들도 더위를 먹었는지 꽃송이는 봄의 반만큼 줄어들었고 꽃대도 부실하다. 어떤 꽃을 데려올까 고민하다 꽃대가 짧지만 발그레한 빛깔이 고운 장미 두단, 연한 레몬빛 장미 한 단과 하늘하늘한 유칼립투스 파블로 한단을 골랐다.
신문지에 싸인 꽃들을 상가 계단에 놓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날씨를 검색하니 이런, 아까보다 비가 더 많이 온단다.
꽃 얼굴에 물이 닿으면 꽃은 누렇게 말라가며 썩어버린다. 꽃 두 무더기를 소중하게 품에 꼭 끌어안고 우산을 펼쳐 보호한 뒤 비 속으로 나갔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며 이런 날씨에 대중교통으로 꽃시장에 간 나의 미련함을 원망했다. 어깨에 맨 배낭은 비를 맞아 더 무거워졌고 꽃무게에, 우산에, 지친 몸을 마을 버스정류장에 있는 벤치에 내려놓았다.
멍하니 앉아 비 오는 걸 보고 있는데 선이 고운 열 살 남짓 한 남자아이가 옆에 앉는다. 조용한 아이의 눈길이 신문지에 싸인 꽃에 머물러 있다.
5분여의 휴식을 마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가 다음번 정류장 벤치에서 두 번째 휴식시간을 가졌다. 아까 그 아이가 또 내 옆에 앉는다. 시선은 다시 꽃에 둔 채로.
꽃을 좋아하는 걸까? 심심한 걸까?
" 꽃 예쁘지? 향기도 좋아. 가까이 와서 냄새도 맡아봐"
수줍어 보이는 아이가 냉큼 다가와 꽃향기를 맡는다. 얼굴에 번진 옅은 미소가 사랑스럽다.
"꽃향기가 어때?"
"향기가 좋아요"
꽃구경을 한 뒤 옆 단지 아파트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의 발걸음이 아까보단 가벼워 보인다.
잠시 떠나 있던 오래된 집을 수리하고 다시 이사 들어온다고 하니 아이들 친구들이 집들이를 하라고 한단다.
이 기회에 아이들 친구들 얼굴도 볼 겸 흔쾌히 놀러 오라고 했다.
하루는 막내의 대학친구들이 세 명 놀러 왔다.
어렸을 때는 능청스러운 아이들도 있었던 거 같은데 갈수록 남자아이들은 수줍어한다.
제일 먼저 온 아이가 올리ㅂ영 쇼핑백에 담긴 선물을 공손하게 건넨다. 학생이 왜 이런 걸 들고 오냐니까 '별 거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투리 섞인 억양이 귀엽다. 두 번째, 마지막으로 온 아이들도 손에 뭔가를 들고 왔다. 병이 예쁜 주스. 작은 사이즈의 케이크.
유유상종 끼리끼리 논다고 하더니 다정한 막내처럼 친구들도 따뜻하다.
우리 애들이 어릴 때부터 잘 먹었던 용가리치킨너겟을 에어프라이어에 굽고 치즈스틱을 기름에 튀겼다.
오랜만에 김밥을 만들었더니 생각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모양도 잘 나오지 않아 김밥 옆구리는 터지지 않았지만 내 속이 터져가며 열 줄을 말았다.(속으로 괜히 시작했다고 계속 후회했다).
과일을 색깔 맞춰 담아 접시에 올리고 음료수 컵도 감성 있는 걸로 골라 놓았다.
식탁에 핑크색 라탄 매트를 깔고 나름 예쁘게 세팅한 뒤 아이들을 불렀다.
밖에서 먹고 왔다고 뭐 힘들게 차리셨냐고 사양하던 아이들의 입꼬리가 어느새 올라가 있다.
내 나름 실패작이라 생각했던 김밥을 보더니 "집에서 만든 김밥 정말 몇 년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더니 휴대폰으로 찰칵 사진을 찍었다. 부모 떨어져 서울서 혼자 자취하다 보니 집에서 만든 김밥을 먹을 일도 깔끔하게 깎여진 과일을 먹을 기회도 거의 없었겠구나 생각하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아들과 친구들이 편하게 지내길 바라며 "엄마 장 보러 나갔다 올게" 하고 집을 나섰다.
산책 겸 장보기를 마치고 3시간 정도 지난 후 집에 가 보니 현관 앞에서부터 20대 초반 남자아이들의 수다와 웃음소리가 왁자하다. 비번을 누르고 집에 들어가 보니 거실 대형티브이 화면에는 뉴진스 뮤비 유튜브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누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거실에 자유분방하게 누워서 뮤비를 보다 나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몇 시간 후 아들 친구들이 다 가고 집안을 보니 팬트리에 있던 과자들도 반 이상 사라졌다. 역시 남자아이들의 먹성은 여자애들과는 다르다.
애기 때 소파 뒤 벽지에 크레파스로 벽화?를 그린 사람은 우리 막내아들이었고
우리 집에 놀러 와 내가 아끼는 장식 접시를 깨고 간 것도 아들친구였다.
그럼에도 나는 남자아이들이 좋다.
길에서 만난
우리 집에 놀러 온
남자아이들의 말로 잘 표현해 내지 못하는 외로움, 따스함을 사랑한다.
말로 표현하는 데는 서툴지만 다정한 말 한마디, 따뜻한 음식 한 가지에 웃는 그 순수한 미소가 좋다.
난 내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딸바보도 아들바보도 아니다.
딸바보가 넘치는 사회에서 갈수록 싸잡아 문제아 취급받고 소외되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유독 안쓰러워 보이는 건 내가 아들이 둘이어선지 아님 특이한 취향이어서인지 모르겠다.
오늘 막내랑 오픈 런 해야 먹을 수 있는 냉면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미리 줄 서 있는 아들을 몇 미터 앞에서 발견하니 그냥 웃음이 나온다. 밖에서 보니 내 아들 새삼 잘생겼다.
오뚝한 콧날, 갸름한 턱선에 작은 얼굴, 캡모자 아래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매력이 넘친다.
아들과 같이 먹은 올여름 첫 냉면
이렇게 말하는 나를 보면 세상에 흔치 않은 아주 착하고 똑똑하고 잘생긴 아들을 둔 복 받은 엄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다.
내 아들들은 다른 아들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아들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자기 고유의 색깔을 가진 그런 아이들이다.
내 아이를 사랑하기에
아들들을 키우면서 답답하기도 했고 화가 난 적도 많았고 속상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내 눈에 사랑스러웠다.
내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은 어떤 특별한 노력 없이 내 아이들이 늘 애틋하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이다.
며칠 전 데려 온 부실 해 보였던 장미가 꽃송이가 갈수록 커지며 향기를 내뿜고 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거실로 나오니 유칼리툽스 냄새와 함께 장미 내음이 가득하다. 기특한 우리 집 장미를 위해 이틀에 한 번은 얼음물로 화병물갈이를 하는 수고를 해야겠지만 내게로 와서 꽃을 피우며 향기로 집안을 채우는 장미가 장하고 고맙다. 백화점 플라워샵에서 파는 외국 브랜드의 십만 원 넘는 꽃다발이 부럽지 않다.
길에서 만난 소년이 더 웃을 일이 많았으면,
내 아들이, 아들 친구들이 더 많이 이해받고 사랑받기를 바란다.
딸만큼이나 아들도 그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