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확신한 것은 이상(理想)인가 이상(異常)인가.
너무 많은 것이 결핍된 사람은 때로 결핍마저 기꺼울 때가 있다.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닌데 벌써 잃어버린 감정의 이름이 몇 개인지 미처 헤아릴 수도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무감하게 보낸다. 그리고 나는 대체로 혼자 있다. 일전에는 우울의 늪, 같은 추상적인 감정에 축축하게 젖어있기 마련이었는데 이제 우울은 그다지 가까운 존재가 아니다. 병증은 전혀 낫지를 않았는데 나는 우울의 얼굴을 잊었다. 마치 오래간 만나지 않아 서먹해진 친구 관계라도 되는 듯 이제 우울은 좀처럼 내 앞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일은 상상보다 더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다. 나는 나의 무지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여태 먹어온 수많은 약들의 부작용과 여태 놓고 살아온 과오의 작태를 일일이 끄집어 내어 하나하나 읊고 나서야 비로소 인정했다. 내게 총명함이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한물간 스물 중반, 또는 후반의 나잇대에 접었다. 이상할 정도로 가진 것이 없는데, 또 이상할 정도로 찌꺼기는 많이 쥐고 있었다. 여태 내가 놓친 것은 기회인가, 기만인가.
감정을 하나씩 잃어감은 나를 지탱하던 인간적인 구실이 차근차근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쉽게 분노하지도 쉽게 울지도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사소한 것에 오래 분노하고 울고 뇌를 지글지글 끓이는 총력전을 겨루고 싶었다. 그러니까, 삶이 무료하다는 말이다. 줄곧 부정해온 것이 무정하게도 나는 역린이 쉼없이 공격 당하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과거의 치열함을 탐냈다. 이제는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어린 날의 새빨간 눈알이 그렇게도 탐나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나 열심히 살아온 과거 한 번쯤은 있겠지. 그러나 평범한 신분의 사람이 목숨이나 존재 자체가 저울에 올려지고 평가 당하는 경험은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지간한 정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서야 타인에게서 내 목숨줄과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하찮고 천박한 경험을 하지는 않는다. 나는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모든 방패를 잃고 내 목줄을 되찾아오기 위한 지난한 싸움을 해왔다. 비로소 내 목숨을 내 손으로 영위할 수 있게된 지금이, 나에겐 너무도 평화롭고 또 외려 죽음을 은연 중에 받아들이는 시기가 되고 말았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버리게 된다. 아마 목숨줄도 그렇다.
싸워온 것에 비해 너무 쉽게 얻어진 목줄은 효용가치를 잃었다.
더는 살 이유가 없어졌다. 타인의 힘에 이끌려가던 관성이 삶을 지탱해오던 힘줄이라는 걸 그 누가 믿겠는가?
애정이 결핍되어 있다는 건 오래 전에 알았다. 내게 고백하던 사람이 귀찮게 느껴지고 사람이 닿는 게 싫음을 넘어 역겹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생각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란 건 이런 거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까봐 사랑을 혐오하게 된 것이다. 행여 살이라도 맞닿으면 몸정이라도 들까봐. 내 시간에 들어올 이 사람들에게 집착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러니 이건 내 문제다. 나 자신과 타협했다. 내 인생에 진심을 주는 사람은 없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또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은 결국 언젠가 나를 두고 떠났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었겠지. 나의 존재나 인과 같은 것들.
결핍이 기꺼웠다. 감정의 결핍은 필요를 낳지는 않는다. 결핍에 익숙하다는 건 결핍되지 않은 상태가 되려 비정상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상신호를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예민해진다는 뜻이다. 예민함은 역으로 나를 생존하게 했다. 어떤 형태로든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비록 그 형태가 이끼가 뜬 스노우볼 같더라도.
나는 이상주의자다.
세상에 없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완벽한 세상' 같은.
완벽한 세상을 그림이나 글로 온전히 표현해낼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사람과 동물을 만족시킬 수 있는, 완벽한 세상 말이다. 아마 없을 것이다.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애초에 모두의 만족이라는 전제조건 자체가 우스운 말장난이다. 완벽한 세상은 완벽한 세상이라는 온전한 단어 하나로만 나타낼 수 있으나 뜻은 무수히 많다. 최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 수만큼의 정의가 생겨날 것이다.
나의 정의는 오롯한 나의 평안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상주의자다. 나는 살아있는 한 온전한 평화를 느낄 수 없다. 내가 완벽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사라져야 할 것들, 새로이 만들어져야 할 공상의 결정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을 수없이 되돌려 죽은 이들을 살려내야 한다. 살아있는 자들을 재물로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다면 좋을텐데, 세상은 공평하거나 완벽하지 않아서 등가교환의 가치를 제멋대로 책정한다.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주제에 살아가라고 종용하듯 책임질 것들을 눈 앞에 밀어놓는 것처럼 말이다.
병원에 가지 않은지 오래다. 내 마음은 천박해서 단 몇 푼이라도 남의 시간을 사서 이야기할 만큼 그럴싸한 뭉텅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나는 자꾸 과거를 돌아보며 영광을 회상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했던 말을 또하고, 추레한 행색을 한 채로 자신의 먼 양복쟁이 시절을 회상하는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어른은 용돈도 잘 안 줬다. 천원짜리 한장이면 과자 한 봉에 껌 한 통을 사던 그 시절, 할 말은 많고 들어줄 사람은 없던 어른은 승냥이 같은 눈을 가진 어린이를 데려다 앉혀놓고 한참을 옛 추억에 잠겨있다 시간값을 낸 뒤 넌 나처럼 안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 하고 갔다. 나는 좋은 청자였다. 이미 돌려말하는 법도, 하면 안 될 것 같은 말도 구분할 줄 아는 사교적인 어린이였기 때문에 용돈을 주면 단돈 천원에 구몬 학습지를 푸는 곁시간을 팔았다. 지금 내 마음은 딱 그정도의 가치다. 8살 어린이가 용돈을 받기 위해 맞장구 쳐주는 걸 듣고 천원을 낼 정도의 값어치. 거창하게 병원씩이나 가서 말할 거리는 되지 못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아서 치열하게 살았다는 말은 생존 이외의 구역에 적용하기엔 어폐가 있다. 무엇이든 최소한만 했다. 그런 주제에 바라는 건 많아서 지금도 '완벽한 세상' 같은 말이나 하고 있지만.
결핍이 있음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쓸모없는 것들은 결여되어야 비로소 완벽해질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측은지심이나 타인에 대한 관심, 정, 배신감 같은 것들. 가지고 있으면 마음을 좀 먹는 감정들. 손에 들고 있어봐야 나만 우스워지는 마음들. 완벽해지기 위해 더더욱 결핍을 반겼다.
결핍이란 그것이 내 생각보다 더 쓸모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치일 뿐이다. 결핍되어 봐야 비로소 전혀 쓸모없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사람이든, 감정이든.
날이 갈수록 나의 이상에 닿아간다, 그러나 내 확신의 방향이 제대로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확신한 것은 이상(理想)인가 이상(異常)인가. 혹은 이상(二相)임을 알면서도 불확실한 확신을 믿고자 하는 아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