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이전엔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 글을 보는 게 불편해서 쓸 수 있는 말보다 가둬야 하는 말이 더 많았다.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복잡한 마음, 실은 감추고 있었던 꿈에 대한 열망, 나와 비슷해 보였던 엄마의 삶까지. 쓰고 싶었던 것들은 많았지만, 쓸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이제 나는 그 관계를 놓기로 했고, 지인들에게 작가명을 공유하지 않았다. 블로그에서 쓰던 이름은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 그 한 꺼풀을 벗으니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졌다. 내 안의 것을 다 비워내면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릴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뱉어낼 수 없었던 막막함은 풀려 버렸다.
하루에도 여러 번 글쓰기를 생각한다.
이 말을 할까, 저 말을 할까. 출근길에 듣는 <빨강 머리 앤> 오디오 북에서 '절망의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니 나아졌다'는 앤의 말에, 지금의 나의 여정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몇 달 간 챗과의 대화에 심취해 있는 나를 보며 인간의 외로움과 나약함을 말하고, 과거 특정 시기에 즐겨 들었던 노래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서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나'였다.
나를 발가벗기듯 이렇게 속마음 하나하나를 써도 되는 걸까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는 왜 여기서 풀려고 할까. 어디에도 닿지 않는 내 말을 이렇게라도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걸까. 글쓰기도 결국은 나를 이해받고 싶어서 하는 걸까. 내가 넘치는 이런 글을 써도 되는지 또 주저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과잉은 나의 개인적인 서사에서만 비롯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지금의 이 시기를 '나'의 과잉시대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보다 내 마음이 우선이고 나를 잃으면서까지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시대다. 내가 하지 않아도 괜찮고 오늘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들 말한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나도 한몫하는 순간이 눈앞에 닥치게 된 것이다.
'나'를 중심에 두고 '나의 기준'에 따르는 것이 잘못된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과잉'이다.
'나'의 과잉도 '나'를 찾아가는 과도기여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적인 가족문화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라온 여성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머리로는 남녀평등을 배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몸으로 배우면서 자랐고, 그 여성이 결혼한 뒤에도 그렇게 살았다. 이제 시대는 달라졌고, 너도 나도 '나'를 말하는 세상이다. 뒤늦게 '나'를 찾는 여정에서 단번에 균형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줄 알았던 '나'의 발견에 충분히 과잉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다.
내가 선택한 결혼이었고, 가부장적인 가족문화에서 배워온 대로 살았고, 가정에서 나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어떤 부분은 후회가 되고 어떤 부분은 잘했다고도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나 역시 뒤늦게 '나'를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고, 내가 먼저 나를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어낸 것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도 나로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나'를 발견하고 나니 실은 누구보다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애써보는 삶. 나는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네가 뭘 한다고' 할까 봐 내가 먼저 감추었던 나의 욕망에 대해, 그렇게 억누르고 애썼음에도 끝내 이해받지 못한 고되고 슬픈 나의 서사에 대해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나'의 과잉을 허용하기로 했다.
지난날의 보상이 아니라 더 건강한 나를 찾기 위해 '나'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언젠가 이 과잉이 '나'를 넘어 누군가에게 닿고 그렇게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