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세상과 단절된 것 같다.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보이지 않는 막이 나를 둘러싸고 있고 사람들의 불만과 고민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걱정할까 봐 미리 괜찮은 척하다가 돌아서서 정말 괜찮냐고 나에게 묻는다. 다음번엔 좀 더 깊고 아픈 이야기를 해 보지만, 나의 말은 어디에도 가 닿지 않는다.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모르 듯, 나의 삶이 어땠는지 속속들이 누가 알까마는 '이해받고 싶다'는 이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나는 비로소 내 결혼생활이 수고로웠음을, 애써 견뎌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 노력의 결과는 위태로워 보였지만, 견뎌낸 것만으로 멋있는 일이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었다.
<오십이 앞으로 어떻게 살거냐고 물었다>에서는 그럼에도 내가 주체적으로 내 인생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마음 아프게 인정해야 했다.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가정과 가족 안에서 나의 역할을 해내는 데만 모든 역량을 집중했고, 그렇게 사는 게 마땅한 건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마음속 깊은 곳엔 나로서 살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었다. 아이들 어릴 때 어쩌다 애니메이션을 보면서도 꿈을 찾아가는 주인공을 보며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음에 눈물이 나곤 했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 이전과 똑같이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떨렸던 순간은 꽤 인상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나도 내 삶을 내 뜻대로 살 수 있는 거구나, 내 안에 그런 열망이 가득 차 있었구나'라는 자각이 문장으로 정리되는 순간의 떨림과 벅차오르는 안도감은 아마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서도 중요한 기준점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와의 관계에서 절망과 희망이 오고 가는 사이에도 나는 이 두 가지 깨달음을 놓지 않았다. 지혜롭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나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앞으로의 인생은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다짐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과 다짐은 그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은 것 같다. 나의 확신이 그와의 갈등의 핵심 요인은 아니었지만, 나에겐 관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전의 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끔은 '책으로 배운 섣부른 사탕발림에 넘어간 것은 아닐까, 나의 자각과 확신이 더 큰 것을 놓치게 하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내 삶을 내 뜻대로 살아본다는 게 왜 이리 힘든 일이어야 하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민이 거듭될수록 나의 선택을 믿고 그 길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와의 관계는 점점 더 어긋나고 있었고 이와는 별개로 나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직장과 집안일과 아이들 엄마로서 자리를 지켰고 남는 시간은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는 이때만큼은 확실한 도피처였다. 남들이 보면 이 상황에 책이 눈에 들어오냐 하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에 푹 빠져 현실을 잊기도 했고, 내 인생 과업에 딱 맞는 책을 보며 다시 기준을 정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책을 보며 나와 나의 인생을 되짚어 보고 그동안 없었던 기준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요즘엔 너 자신이 너를 인정해 주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꼭 필요한 말이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것도 지난날의 나를 내가 인정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삶의 기반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 나를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나에게 중요한 타인에게서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은 어느 날은 가만히 가라앉아 있다가, 어느 날은 나를 뒤흔들어 놓곤 한다. 지난 20년의 결혼생활에 대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의미 있게 봐줘야 할 사람은 그 밖에 없지만, 이제 그 관계를 놓아야 하는 이 상황이, 아무도 채울 수 없어 공백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아프다. 내가 가장 공들여왔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공을 들이지 않기로 했으니 방법은 없다.
새해 첫날. 희망의 메시지 대신 나는 다짐해 본다. 그러니 나는 혼자서 버텨보겠다고. 앞으로도 수없이 아플 테지만, 조용히 견뎌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