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여름가을겨울,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by 시크한 달빛

소설 『데미안』을 읽을 때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데미안이고 나는 싱클레어다.


우리는 중학교에서 만났다. 친구는 당시 농촌 아이들과 다르게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시는데도 일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월등한 성적으로 전교 1등을 차지했다. 평범한 우등생이었던 나와 월등한 우등생이었던 친구는 점점 더 친해졌다.


친구는 공부도 잘했지만 책도 많이 읽었다. 우리는 당시 유행했던 문고판 세계 고전 시리즈를 읽고 시집을 주고받고 시사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정성 들여 쓴 손편지도 주고받았다. 친구의 편지는 매번 내가 도달하기 어려운 수준의 사고와 문장이 가득했다. 나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친구의 편지가 좋았지만, 같은 수준으로 회신하기는 어려워 답장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당시 친구는 나에게 전부에 가까웠다. 친구는 내가 알지 못하는 커다란 우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세계를 동경했고 나도 그곳에 이르고 싶었다. 친구는 그 세계로 나를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했지만 친구 본인도 그 우주를 탐색하고 있는 구도자였다. 나는 그걸 따라가느라 매번 헉헉거렸고, 그래서 위축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나는 친구가 좋았고 친구도 나를 좋아했다.


저녁이면 골목 앞 공중전화에 나가 전화를 했다. 공중전화에 100원을 넣고 뒷사람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100원을 다 쓸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초여름에는 나를 주겠다고 집에서 키운 수박을 땀을 뻘뻘 흘리며 들고 와서 나를 감동시켰다. 어느 날은 읍내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나는 너무 설레어 그 시간이 과연 오기는 할까 걱정스럽기까지 했고, 약속 시간에 가까워질 때는 너무 설레어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에게 그 친구는 인생의 여정을 함께 할 동반자이면서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먼저 개척해 나가는 안내자였다. 그리고 나를 소중하고 의미 있게 바라봐주는 존재의 확인자였다.


운 좋게 친구와 함께 부천으로 고등학교 유학을 갔다. 작은 농촌에서 지내다 부천이라는 큰 물을 만났지만, 친구는 이제야 자기 그릇에 맞는 세상을 만났다는 듯 변함없이 월등한 성적을 유지했다.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유학생이었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평범한 우등생 자리를 되찾았다. 우리는 대입을 코 앞에 둔 입시생이었고 인생의 큰 관문이라 여겨지는 수능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각자 공부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다.


어느 날 11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그 친구의 교실에 갔다. 친구는 아직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책상 뒤쪽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칠 요량으로 내가 왔음을 눈치채길 바라며 기다렸다. 그러나 친구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공부만 할 뿐이었다. 나는 어떻게 모를 수 있지? 의아했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다가 끝내 친구는 바로 뒤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음을 몰랐고, 나는 그 상태를 깨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 혼자 집으로 갔다.


그날의 일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했는지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그날, 호랑이가 나타나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무섭게 공부에 빠져 있었던 친구의 뒷모습과, 5분이었는지 10분이었는지 그렇게 서서 집에 가자 말할까, 이대로 그냥 혼자 가버릴까, 좀 더 기다려볼까를 수없이 고민하다 끝내 혼자서 돌아서버렸던 나의 뒷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이미지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모두 변해가는 모습에 나도 따라 변하겠지."


"이리로 가는 걸까, 저리로 가는 걸까.

어디로 향해 가는 건지 난 알 수 없지만"


"세월 흘러가면 변해가는 건 어리기 때문이야.

그래 그렇게 변해들 가는 건 자기만 아는 이유."

(봄여름가을겨울,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 시절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미 이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친구도 나도 중학생 그 시절의 마음 그대로가 아님을, 이미 우리는 그때와는 달라졌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모르는 채로 우리가 달라졌음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알을 깼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친구는 더 이상 데미안이 아니고, 나도 싱클레어가 아니다. 그러나 데미안 초반부를 읽을 때면 나는 늘 그 친구가 떠오른다.



❤️ 이 글은 봄여름가을겨울의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를 들으며 썼습니다.


https://youtu.be/OiR4afN5zxo?si=6FEO8V5cexms8xg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