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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ghtme Jun 15. 2019

우물 안 노예에서 우물 밖 노예로

당신을 울게 하는 회사를 퇴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2년 6개월 동안 근무한 첫 회사를 퇴사한 지도 10개월째다. 얼마 전, 친구가 사실 회사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그만두지 못하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연락을 피했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전 회사에서 친해진 사람들을 만나면 그때 왜 바보같이 당하고만 있었는지 얘기하며 조금이라도 빨리 퇴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나는 업무적으로 압박이 심했고, 사람들에게도 시달렸다.

 일이 힘들었던 이유는, 나는 신입사원임에도 새로 생긴 직무의 담당자였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해야 했고, 그 일은 회사의 큰 전략을 결정하는 데에 참고가 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2년 6개월 동안 팀이 다섯 번, 팀장은 여섯 번 바뀌었고, 팀장도 없이 팀에 나 한 명이었던 적도 있었다. 입사 초기에는 혼자 일하기 때문에 직무에 대해 더 깊게 배우기 어렵다는 점이 큰 불만이었다. 하지만, 다른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이 불만은 오래가지 않았다.


 업무 이외에 나를 미치게 했던 건 사람이었다. 두 번째로 옮긴 팀의 담당 임원은 ‘회장님 눈에 띄지 않고 가늘고 길게 살아남기’가 목표였다. 모든 고인물 임원이 그렇듯, 얼떨결에 맡게 된 새 업무를 영 탐탁지 않아 했다. 보고서를 만들어가면 '회사 4개월밖에 안 다닌 니가 보고서를 만들어봤자 뭐해? 난 니가 만든 보고서 절대 안 볼 거야'라고 말하며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그래서 보고서를 안 만들었더니 '너 왜 보고서 안 만들어? 니가 회사에서 하는 게 뭐야? 월급 받기 창피하지도 않아?'라고 소리 질렀다. 꾹 참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울었다. 사무실에서 우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퇴사를 결심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마지막 조직에서는 담당 임원의 여남차별을 견디는 게 가장 괴로웠다. 본인도 여자면서 여자는 애 낳기 위해 태어난 몸이며, 고등학교만 졸업해서 시집이나 가면 되고,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야 잘 산다고 했다. 20대 중반인 나에게 40대 노총각 차장 찾아서 결혼이나 하라고 했다. 이런 말들을 상무와 점심 먹을 때, 회식할 때마다 한두시간씩 들었다. 귀가 아팠다. 남자를 너무나 좋아해서 본인 스스로 여자를 깍아내리고 남자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었다.

 업무 차별도 심했다. 나에게는 과장급의 일을 시켰지만, 나보다 한 살 많은 남자 직원에게는 1년 동안 회계전표에 법인카드 사용 금액 입력하는 일만 시켰다. 그분을 애기라고 부르며 아무것도 시키면 안 된다고 하길래 저보다 한 살 많으세요라고 대꾸하자, 남자는 원래 여자보다 어려서 다 봐줘야 한다고 했다.


 같은 조직의 상사들은 다 남자였는데, 내가 차별받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힘겨워하는 날 이해하지 못했다. 상무님이 너 일 잘한다고 얼마나 이뻐하는데, 나라면 차별받아도 너처럼 되고 싶다며 세상 물정 모르는 애라고 했다.

 커피를 사오라고 시키고, 편의점에서 다이어트 콜라를 사오게 하고, 회의실에 와서 자기 겉 옷 좀 가져가라는 심부름을 여자 직원에게만 떠맡겨도 다 참으라고 했다. 가장 분노가 폭발한 건, 상무가 일주일 동안 자기 동네로 출퇴근하여 본인 애를 보라고 해서 정색했다는 이유로 팀장한테 혼났을 때다. '야 너는 애가 왜 그렇게 어리냐? 나라면 상무님 진짜 감사합니다 하면서 애 보러 가겠다. 니가 애 한번 봐주면 상무님이 너를 얼마나 이뻐하겠냐? 넌 상무님이 불쌍하지도 않냐?'라고, 속이 후련하냐며 행복하냐고 비아냥거렸다.


 위의 일들을 다 제쳐두고 상무가 가장 싫었던 점은 직원들을 돌아가며 왕따 시킨다는 점이었다. 항상 상무가 정해둔 왕따가 한 명씩 있었다. 그 대상이 없는 자리에서 '걔는 회사에 왜 그렇게 일찍 출근해? 와이프가 아침밥 안 해준대? 집에서 그런 취급받는 애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겠어?'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험담했다. 그것도 다른 직원이 다 있는 앞에서. 어떤 남자 임원은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게이면 게이라고 말을 하면 되지 왜 거짓말을 하냐고 없는 자리에서 욕을 먹었다. 나는 왕따의 대상이 된 적이 없으니 모두가 부러워했고, 복에 겨웠다고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는 게 일상이었는데도 퇴사를 결정하지 못한 건 첫 번째로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규모가 많이 큰 회사였고, 돈도 많이 줬다. 요즘 같은 때에 이 정도 조건의 회사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무작정 퇴사를 해서 오랫동안 구직을 못하면 회사 보는 눈이 낮아질 거고, 그러면 결국 지금처럼 이상한 회사에 다시 입사하게 되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완벽한 우물 안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회사를 가도 비슷할 것 같았다. 주변 친구들은 내가 겪는 일이 아주 특이한 경우라며 그만두는 것을 권유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인지 몰랐다. 나를 설득하는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직장인은 모두 힘든데, 고난의 종류가 다른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회사에 지원하는 것도 계속 미루었다. 1년만 채우고, 2년만 채우고, 그래도 대리는 달고 이직해야 하지 않을까, 더 버틸 생각만 했다. 내가 겪는 일이 점점 당연하게 느껴졌다. 교통사고가 나면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될텐데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속은 썩었는데 머리는 자꾸 괜찮다고 했다.

 당시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퇴근 후나 주말이면 동기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는 데에 모든 시간을 보냈다. 공부하거나 책을 읽는 등 생산적인 일을 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회사에서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일이 있었고, 결국 다른 직장을 구하여 이직했다. 내가 겪은 일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다면, 어디에든 길은 있으니 당장 퇴사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그랬듯이 섣불리 결정을 못 하겠다면, 이직을 시도해보는 것을 권유한다. 하루 이틀 투자해서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를 완성하면 다른 회사에 지원하는 데에는 30분이면 충분하다. 경력이 짧아서, 스펙 좋은 사람만 지원할 것 같아서, 지원해도 떨어질 것 같아서 고민이 되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지원하는 회사가 좋은 회사인지 확신이 없어서 고민이 된다면, 잡플래닛이나 블라인드를 활용할 수 있다. 업무 환경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니 그걸 보고 참고하면 된다.


 이직한 회사에서는 핍박하는 사람도 없고, 같은 직무에서 일하는 사람도 많아서 자극이 된다. 공부를 시작했고, 마음이 안정되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회사 한번 옮겼을 뿐인데 삶의 질이 올라갔고, 이전 회사에서 겪었던 일이 꿈만 같다.

 고단한 상황이 계속되고,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랬다. 그치만 우리 모두 행복해질 필요가 있다. 탈출하기 위해 첫 발자국을 떼는 게 어렵지만, 용기를 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시작했으면 좋겠다.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바보같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바닥까지 경험 한 뒤에 빠져나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 우물 밖으로 나와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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